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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문] 헤어질 결심, 박찬욱

헤어짐의 반복과 농축, 그리고 이를 겪는 사람들의 붕괴.

by 김주렁

0. 들어가며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대상이 무엇이건 간에 하나같이 헤어질 결심을 하고 있었다. 작품의 표면은 살인과 치정극, 수사극이나 내막은 각 인물들이 상실과 이별을 마주하며 좀먹히는 마음들이 표출되는 이야기였다.


스토리와 인물 간 관계, 등장하는 소재 등 고민하고 생각해볼거리가 많은 영화였다. 개인적으로는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영화가 좋다. 너무 평면적이고 명시적이지 않으면서도 불필요한 복잡성은 배제된 영화. 이런 꽃밭 같은 이상론적인 말은 좋아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이상적 형태에 얼마나 근접할 수 있는지가 작가와 감독 등 많은 창작자의 역량일 것이다.


스토리와 인물, 등장하는 소재로 나누어 감상을 남긴다.


줄거리 (출처 : 네이버 영화)
산 정상에서 추락한 한 남자의 변사 사건. 담당 형사 '해준'(박해일)은 사망자의 아내 '서래'(탕웨이)와 마주하게 된다. "산에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 봐." 남편의 죽음 앞에서 특별한 동요를 보이지 않는 '서래'. 경찰은 보통의 유가족과는 다른 '서래'를 용의 선상에 올린다. '해준'은 사건 당일의 알리바이 탐문과 신문, 잠복수사를 통해 '서래'를 알아가면서 그녀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가는 것을 느낀다. 한편, 좀처럼 속을 짐작하기 어려운 '서래'는 상대가 자신을 의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해준'을 대하는데…. 진심을 숨기는 용의자 용의자에게 의심과 관심을 동시에 느끼는 형사 그들의 <헤어질 결심>


1. 제목의 의미, 헤어짐의 반복과 농축


작품의 중추가 되는 인물은 해준(박해일)과 서래(탕웨이)이다. 그 외에도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스토리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해준과 서래의 여러 대상으로부터의 헤어짐이다.


작품의 제목인 '헤어질 결심'에는 주체와 대상이 생략되어 있다. 'A가 B와 헤어질 결심'이라는 문장에서 A와 B가 생략된 형태인데, 실제로 작품에서는 다양한 주체와 대상의 헤어짐이 반복된다. 그리고 이 반복은 지속적으로 관객에게 헤어짐이라는 개념을 상기시킨다.


덧. 작품 내 등장하는 수많은 헤어짐
서래와 첫 남편의 헤어짐, 서래와 해준의 헤어짐, 서래와 두 번째 남편의 헤어짐, 서래와 서래 어머니와의 헤어짐, 해준과 정안의 헤어짐, 서래와 세상의 헤어짐, 해준과 부산과의 헤어짐, 해준과 산오와의 헤어짐.


가장 표면적인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헤어짐이다. 서래와 첫 남편 기도수의 헤어짐, 서래와 해준의 헤어짐, 해준과 정안의 헤어짐 등 많은 인물들이 헤어짐을 겪는 과정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작품 전반적으로 반복을 통한 메시지의 강화 방식이 많이 활용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런 표면적인 사람과 사람 사이의 헤어짐은 점차 개인의 내면으로 파고들게 된다. 기도수 씨의 진범이 서래임을 알게 된 해준은 지금까지 지켜오던 경찰로서의 자부심, 직업의식과 작별을 고한다. 붕괴(부서지고 깨어짐)라고까지 표현하며 본인의 내면이 무너져 내렸음을 서래에게 직접적으로 표출하며, 이는 종국에는 서래가 세상과 헤어지게 되는 순간까지 이어지게 된다. 여러 헤어짐의 과정들이 한 점을 향해 수렴해나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2. 해준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해준은 강박이라고 할 만큼 치밀하고 꼼꼼한 사람이다. 주머니가 많은 옷을 따로 맞추어 입고 다니며 위치별로 항상 똑같은 물건을 넣어 다닌다. 사건에 관한 일이라면 관련된 숫자까지 외우고 있으며 미결 사건들의 사진이 한 벽면을 채우고 있다. 잠복을 하면서도 상황을 모두 녹음한다. 또한 본인이 맡은 일에 대한 사명감과 자부심 또한 높다. 사건 현장에서 피해자가 겪은 상황을 그대로 느껴보기 위해 로프에 몸을 의지하여 암벽을 오르기도 한다.


이는 직업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도 드러난다. 주말부부로 살고 있는 해준과 정안은 아무리 싸우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매주 부부관계를 한다는 약속을 하는데, 해준은 아내가 다른 남자와 집을 떠나는 순간까지 이 약속을 정안에게 묻는다.


3. 서래의 등장


그런 그의 삶에 실금을 내기 시작한 것이 바로 서래였다. 남편이 죽은 순간에도 마침내 죽게 되었다는 말을 하며 감정에 큰 동요가 없었던 중국인 서래는 정황상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다. 범행을 밝혀내고자, 증거를 잡아내고자 했던 해준의 수사가 점점 과도한 관심과 관음으로 이어지며 이야기는 무르익는다. 조사실 내부에서 서래의 폭행당한 사진을 찍고, 서래의 동네 및 서래가 돌보고 있는 할머님 집에 가서 망원경을 통해 감시하는 등 해준은 점차 서래에게 몰입하게 된다.


노인 돌봄 일을 하고 있던 서래의 사장이 해준에게 설명해준 출퇴근 확인 방식은 대충 봐도 허술했다. 서래의 사건일 출퇴근 기록이 주요 알리바이이나, 이는 서래의 통화로만 확인되기에 너무도 손쉽게 조작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매주 월요일에 같은 할머님을 돌보러 가는데, 할머님이 서래를 매우 좋아한다. 주말에 기도를 하면 어느 때는 월요일이 빨리 오는 것 같다고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는 주요 복선이었다.)

여기서 해준이 의심을 하지 않은 건 그가 허술하고 미숙해서가 아니고 이미 이때 서래에게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한다. 폭력을 당하면서도 참고, 노인 돌봄 일을 하고 있는 서래의 상황은 이에 대한 당위성을 높여주는 역할을 했다.


4. 수완(고경표), 산오(박정민)의 작품 내 역할


해준이 서래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이질감이 점차 늘어나게 되는데, 이때 관객을 대변해주는 것이 수완의 역할이다. 예쁜 중국인 여성이기 때문에 이렇게 의심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이것이 역차별이라고 말하는 수완의 물음에도 해준은 예쁘다는 점만은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서래가 중국에서 살인을 저지른 증거 자료를 보고도 해준은 이를 서래에게 보내며 되묻는다.


수완의 시선이야말로 해준의 사심을 제외한 객관적인 시각이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억지로 짜 맞춘 느낌이 날 수 있기 때문에, 관객의 입장에서 대신 질문을 해주고 상황을 환기시켜주는 것을 수완이 해주었다.


해준은 온 동네를 뛰고 계단과 건물을 오르며 끝끝내 산오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때 해준이 산오에게 건네는 말은 정황상은 산오를 안심시키고 제압하기 위한 수단이었겠으나, 내용 자체는 자기 고백이자 진솔한 감정의 표출이었다. 뜬금없이 독백이나 생각으로 해준의 의중을 표출하기에는 어색하고 뜬금없을 수 있으니 산오 체포라는 핑계를 대고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제시해준 느낌이다.


5. 진실을 알게 되고 괴로워하는 해준


기도수 씨 사망 수사를 거치며 서로에게 마음을 열게 된 두 사람이었지만, 서래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녀를 돕고자 갔던 할머니의 집에서 해준은 진실의 실마리를 마주하고 만다. (할머니의 치매 증상, 집 밖을 나서지 않는 할머니의 스마트폰 내 계단 오르기 기록)


해준은 영화 초반에 피해자의 시선으로 산을 올랐던 것처럼 이번엔 피의자의 시선으로 다시 한번 산을 오른다. 해준은 시선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진실을 마주하고 나서 본인이 경찰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증거물인 스마트폰을 서래에게 건네며 자신의 직업의식과의 작별을 고한다. 이 순간 그가 택한 것은 서래와 헤어질 결심이 아니었다. 표면적으로 그는 서래와 헤어졌지만 이 순간 그에게 더 크게 다가온 것은 지금까지의 본인과의 작별이었다.


6. 해준과 서래의 재회. 헤어질 결심.


결국 근무지인 부산에서 떠나 아내가 있는 곳으로 이사 온 해준. 하지만 시장에서 해준 부부와 서래, 그리고 서래의 두 번째 남편이 조우하게 된다. 자신을 서래의 두 번째 남편이라 소개하는 그의 소개는 은연중에 해준이 첫 번째 남편인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해준과) 헤어질 결심을 하고자 새 남편을 만났음을 서래가 말하며 영화 제목이 작품 내에 처음 등장한다.


7. 서래의 두 번째 남편의 죽음. 해준의 자책과 고뇌.


서래의 두 번째 남편도 결국 살해되고 만다. 이때 해준은 본인의 과오를 떠올리며 저번과는 반대로 서래를 지나치게 의심한다. 다른 사람이 진범으로 잡히고 나서도 그는 서래에게 집착하고, 이는 첫 번째 살인사건과는 반대로 동료 경찰의 의심을 받는다.


끊임없는 집착으로 결국 해준은 이 살인 내막의 진실을 알게 되지만 이는 그를 더욱더 혼란에 빠뜨린다. 서래의 두 번째 남편을 죽인 범인의 살해 동기는 범인 어머니의 죽음이었는데, 이는 서래의 범행이었다. 그리고 이 살인의 배경은 해준이 불륜을 저지른 음성 메시지를 남편이 정안에게 보내려고 했음임을 깨닫고 괴로워한다. 그 때문에 두 명이 죽게 된 것이다.


8. 서래의 헤어질 결심


서래는 진심으로 해준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님의 유골을 뿌리게 한 것도 결국은 해준이었다. 그녀는 상황이야 어찌 되었건 해준과 멀어지지 않기를 희망했고, 이는 종국에는 뒤틀리고 만다. 서래는 해준의 방에 붙은 미결 사건들의 사진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녀는 미결 사건이 되어서라도 해준과 함께 있고 싶어 했다. 그녀의 헤어질 결심은 세상과의 작별이었다.


그렇게 서래는 바닷물에 잠겨 생을 마감하고 세상과의 작별을 고한다. 해준이 해질 무렵의 바닷가를 헤매며 작품은 막을 내린다. 해준은 서래와 헤어질 결심을 하지 못했다


9. 작품 내 등장했던 여러 소재들


작품 내 등장한 단어, 소재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들을 모아 감상을 남긴다.


마침내 : 작품에서 헤어짐과 결심 다음으로 무게감이 있는 단어였다. 서래가 첫 번째 남편에 대해 설명할 때 '마침내' 죽었다고 표현한다. 한국어가 서툴다고 말하는 서래에게서 나온 말이었기에 더 울림이 컸다. 마침내를 사전에 검색한 뜻은 '드디어 마지막에는'이다. 해준과 영원히 헤어지지 않도록(미결 사건으로 남도록) 마침내 헤어질 결심을 내린 서래의 메시지로 연결되지 않았는지 한다.

눈(目) : 기도수 씨의 시선으로 앵글이 비춰지는 장면, 직접 피해자와 피의자의 입장에서 보기 위해 산을 오른 해준, 수산시장의 생선 눈으로 비춰지는 해준과 정안, 눈에 계속 안약을 넣는 해준, 눈 위로 벌레가 기어 다니는 장면, 서래를 감시하는 해준의 망원경 등 눈에 관한 소재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산, 수직 방향 높이 차이 : 작품의 첫 장면인 기도수 씨가 오른 산, 해준과 산오의 추격씬에서의 계단과 건물 옥상 등 수직 방향으로의 높이 차이가 나는 장면들이 있다. 서래가 돌보던 할머니 스마트폰의 계단 오르기 어플이 서래의 범행이 발각되게 된 원인인데, 이런 높이 차이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따로 있을지 궁금하다. 영화 '기생충'에서 신분과 높이 차이를 직유로 표현했던 것이 기억에 남아 이번 영화도 유심히 봤지만 직관적으로 느낌이 오는 것은 잘 없다.

스마트폰, 스마트 워치, 음성 메시지 : 작품 전반적으로 스마트 기기의 비중이 생각보다 높다. 첫 번째 사건의 해결, 해준과 서래의 스마트워치를 활용한 녹음, 서래가 두 번째 남편을 죽이도록 한 원인이 된 메시지, 해준의 음성메시지 내용대로 바닷가에서 죽음을 맞이한 서래.


10. 글을 마무리하며


물리적 헤어짐, 한 사람의 내면에서의 헤어짐, 세상과의 헤어짐(그리고 이를 통해 마음으로는 해준과 헤어지지 않게 된 서래). 수많은 헤어짐이 있었고, 각각의 헤어짐은 또 다른 헤어짐을 낳았다. 기도수 씨의 죽음을 기점으로 하여 수많은 헤어짐을 겪으며 붕괴해버린 해준만이 끝끝내 살아남았다. 살아남았다기보다는 남겨졌다는 표현이 적합하겠다. (영화의 영문 제목도 'Decision to leave'이다)


(세상과) 헤어질 결심을 통해 (마침내 해준을) 성취한 서래. 해준은 아직 남겨질 결심을 하지 못했다. 헤어짐의 부산물은 남겨짐일 것이다. 헤어질 결심을 한 자와 이를 통해 남겨진 자의 마음이 복잡 미묘했다. 오래간만에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재밌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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