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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문] 스포트라이트, 토마스 맥카시

자정을 위한 혼돈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은 없어야만 한다.

by 김주렁

0. 서론. 실화 영화가 관객에게 가져다주는 공포


예술 작품의 존재 의의는 작품과 관객 사이의 상호작용을 바탕으로 한다. 작품을 보고 공감하거나 비판하는 관객의 존재를 통해 작품은 생명력을 얻는다.


영화를 일례로 들자면, 감독은 관객과 소통하고 그들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이는 1) 관객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일 수도 있고, 2) 궁금증을 유발하여 관객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혹은 3) 시청각적 즐거움을 관객에게 제시하는 유희적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이 중 첫 번째 방법을 더 깊게 살펴보면, 감독은 관객의 동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다양한 감정들을 작품을 통해 제시한다. 이는 사랑, 분노, 공포 등 1차적인 감정일 수도 있고 권선징악, 애국심, 염세주의, 인류애 등 더 복합적인 감정 혹은 신념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감정들을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감독은 관객의 시점을 작중 인물들의 시점에 투영한다. 마치 내가 겪은 일인 것처럼 몰입하게 하는 간접경험을 관객에게 제공하면서 감독의 의도를 관객에게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실화 기반의 영화를 위와 같은 방식으로 보게 될 때는 느껴지는 감정이 남다른 것 같다. 아무리 공포스럽고 말도 안 되는 장면에 몰입하더라도 픽션임을 알고 있는 작품은 일상과 분리해내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아주 약간 충격적인 장면이라도 그것이 실화임을 알고 있는 경우에는 그 여운에서 헤어 나오는 것이 쉽지 않다.


특정 장면이 주는 충격의 경중보다는 그 장면의 현실감이 관객 몰입에 있어 더 주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싸구려 총소리에 픽픽 쓰러져나가는 인물들, 허공에 칼질을 하면 목이 잘려나가는 장면들보다는 손톱 옆 살점이 실제 같은 소리를 내며 피 한 방울이 흐르게 되는 장면이 더 공포스럽다. 실화 기반의 영화는 위의 표현 방식과는 별개로, 정말 실제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현실감 측면에서 느껴지는 공포가 큰 것 같다.


서론이 길어진 이유는 '스포트라이트'라는 실화 기반의 영화를 보고 나서의 충격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줄거리 (출처 : 네이버 영화)
미국의 3대 일간지 중 하나인 보스턴 글로브 내 ‘스포트라이트’ 팀은 가톨릭 보스턴 교구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취재한다. 하지만 사건을 파헤치려 할수록 더욱 굳건히 닫히는 진실의 장벽. 결코 좌절할 수 없었던 끈질긴 ‘스포트라이트’ 팀은 추적을 멈추지 않고, 마침내 성스러운 이름 속에 감춰졌던 사제들의 얼굴이 드러나는데… ‘스포트라이트’ 팀이 추적한 충격적인 스캔들이 밝혀진다!


1. 이야기의 점진적 확장


이 작품의 골자는 보스턴 글로브의 '스포트라이트' 팀이 가톨릭 사제들의 성추행 사건을 밝혀나가는 것이다. 실제 사건 자체도 너무나 충격적이지만, 이 작품이 단순히 실화 기반의 다큐가 아니고 몰입도 있는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소 느리더라도 점진적이고 순차적인 전개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한 신부의 추행에서 시작된 사건은 점차 복수의 피해자, 복수의 가해자로 확장되며, 점차 교회의 더 높은 곳을 향해 전개된다. 그릇에 물을 한 번에 채우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하지만 멈추지 않고 채워나가는 느낌의 전개 방식이었다. 1명, 13명, 87명으로 점차 확장되던 가해자는 엔딩 크레디트 4페이지의 빼곡한 가해자 목록으로 확대되어 나간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가버니움'이라는 영화와 비슷한 느낌의 엔딩이었다. (실화 기반의 영화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쯤 보시는 것을 추천드린다.)


나무가 아니고 숲을 봐야 한다는 결단력을 보여준 스포트라이트 팀과 보스턴 글로브의 취재 방식도 인상 깊었다. 일시적이고 단발적인 노이즈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사가 아니고 더 깊숙한 근간을 향해 나아가고자 했던 그들의 모습은 언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잘 제시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자본주의 하에서 모든 기사를 이런 방식으로 낼 수는 없기에, 이 스포트라이트 팀을 구성한 것이 매우 영리한 발상이었다고 생각한다.


점차 늘어나는 피해자와 가해자, 종국에는 현실의 참극으로 확장되는 이야기의 방식과 점진적으로 더 깊은 진실을 향해 나아갔던 스포트라이트 팀의 방식이 어우러지면서 점차 거대해지는 공포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범죄나 마약 등 일상에서 한걸음 물러나 있는 범죄가 아니고 모두의 이웃에 산재해있던 범죄인 것이 한층 그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를 다니는 사샤 파이퍼의 할머니, 본인이 조사하고 있는 신부가 이웃집에 사는 것을 알게 된 맷 캐럴, 본인의 고등학교 시절 신부가 사건의 가해자 목록에 있음을 알게 된 월터 로빈슨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보여주며 이 사건은 이름 모를 누군가의 불행이 아니며, 내가 운 좋게 피해자가 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공포를 심어준다. 스포트라이트 팀의 모든 노력이 사랑하는 고향, 나와 내 이웃들을 지켜내고자 했던 것임이 이와 같은 전개를 통해 강조된다.


덧. 작품 내에서 사제들에게 성추행을 당한 사람들을 생존자라고 칭한다. 멀쩡하지도 않고 트라우마를 가지고 살아가는 그들 조차 삶을 포기한 나머지 사람들에 비해서는 살아라도 있는 것이었다. 표현하는 단어의 차이로 이렇게 감상이 깊어질 수 있구나 하고 느꼈다.


2. 닫힌 커뮤니티, 묵인


작품의 배경이 되는 보스턴은 닫힌 커뮤니티와 암묵적인 묵인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를 제시한다. 그들은 도시의 전체적인 평화를 지켜나가기 위해, 잡음을 줄이기 위해 사건을 묵인한다. 누구 한 명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도시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시대적인 배경이 그러했다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배경이 보스턴일 뿐이지, 보스턴이라는 도시를 폄하하고자 함은 아니다. 보스턴 글로브는 시발점이자 부싯돌이었고, 이미 범죄는 범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었으니 말이다)


작품 속 악인이 명확하나 변호사와 언론인 등 인물들이 큰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것은 그들 또한 몇 차례 악행을 묵과하였기 때문이다. 그 이유와 당시 상황이야 어찌 되었건, 교회와 합의한 변호사, 교회 측의 변호사, 이미 모든 내용을 제보받았고 기사도 한 차례 냈지만 이에 대한 후속 대처가 미흡했던 언론사(그리고 스포트라이트 팀 담당자인 월터 로빈슨이 저질렀던 묵과)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정을 위한 혼돈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만 한다. 이것이 결국 작품이 제시하고자 했던 메시지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한 번 엇나간 방향은 점차 관성을 얻고 가속해나간다. 이를 멈추고 원래의 길로 되돌리고자 할 때는 상당한 여파가 뒤따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늦었다고 멈춰서는 안 된다. 한 차례 실패했더라도 단념하기에는 이르다. 잘못된 것, 잘못한 것을 늦게나마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용기이다.


이런 자정의 순간에 시작점이 되어준 것이 보스턴 글로브의 새 편집장인 바론이었다. 그는 고여있는 물에 조약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켰다. 미혼이고 야구를 좋아하지 않는 유대인이자 외지인인 바론은 기존의 닫힌 커뮤니티를 뒤바꾸기에는 적임자였다고 생각한다.


3. 미봉책의 위험성


결국 이 모든 사건들은 특정 순간을 조용히 넘기고자 했던 미봉책들이 쌓이고 쌓인 결과였다. 이번만 좋게 좋게 넘어가자는 합의는 말이 좋아 합의지 권력형 압박이었다. 이 작품은 미봉책이 아닌 근원적인 문제의 해결이 필요함을 실제 사건을 통해 여실히 보여준다.


일시적인 평화에 눈이 멀어서는 안 된다. (물론 사회 전반적인 평화이지 피해자들에겐 생지옥이었을 테지만 말이다.) 일단 나때까지만 넘겨보자는 미봉책은 본인에게 있어서는 성공적 일지 모르나 전체로 보자면 젠가 아랫 블록을 빼서 계속 위로 쌓는 꼴이다.


4. 글을 마무리하며


실화 기반의 영화는 픽션보다 실제가 더 가혹하고 잔혹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빅쇼트, 스포트라이트, 가버니움, 아메리칸 스나이퍼, 연평해전 등 우리의 일상과 맞닿아있던 아니든 간에 같은 세상 속에서 벌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너무나 두렵게 한다.


스포트라이트라는 영화는 실화라는 점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구성이나 전개, 연기 등도 훌륭했다.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언론의 역할을 제시해주면서 사회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도 밝혀준 이 영화가 개인적으로는 매우 인상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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