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 정답은 없다. 다소 뻔해 보일 수 있는 말이지만 정답이 없다는 것은 지름길이나 요행도 없다는 뜻이다. 자유도가 높다는 것이 권력이나 권한이 되어주지는 않으며, 오히려 주어진 자유도와 동일한 무게의 고민도 짊어져야만 한다.
'행성어 서점'이라는 책에는 김초엽 작가의 짧은 소설들이 열네 편 실려있었다. 통상적인 소설보다는 짧고, 아이디어노트보다는 긴 호흡의 글들이었다. 작가는 서론에서 어깨에 힘을 빼고 쓴 짧은 소설들이라고 말했지만, 짧다고 해서 쉬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되레 짧은 길이 안에서 완성도 있게 글을 빚어내는 것 또한 장편을 쓰는 것과는 또 다른 능력을 요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글을 써 내려갈 수 있는 작가의 역량이 조금은 부럽다.
2. 김초엽 작가에 대하여
김초엽 작가는 SF라는 비현실적, 비인간적 소재를 가지고 가장 인간적인 감정을 다루는 데에 능하다. 'SF적 허용'이 적절한 표현일지는 모르겠으나, 작가는 실재할 수 없는 상황이나 추상적인 개념을 SF라는 도구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구현하면서 작중 인물과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질문을 건넨다. 감정, 지식, 소망 등 실존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것들을 냄새, 물질 등의 형태로 구현해 내며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질문을 보다 가시적이고 우리에게 가까운 거리에서 보여주며 건네는 질문들은 흥미롭다.
또한 작가는 독자에게 섣불리 단정 짓지 말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한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익숙한 풍경에서 본인을 '나'라고 칭하는 화자를 우리와 같은 인류일 것이라고 자연스레 단정 짓기 쉽지만, SF의 세상에서 '나'는 사이보그일 수도 있고, 외계의 정체 모를 인물일 수도 있다. 마치 추리소설의 서술트릭을 보는 것처럼, 작가는 독자가 화자와 등장인물들을 쉽사리 단정 짓지 못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서두의 메시지는 작가의 다른 메시지와도 연결된다. 작가는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절대적인 답을 내리지 않고, 상황과 조건, 관점에 따른 상호보완적 대안만이 있을 뿐이라는 메시지를 건넨다. 우리가 '다르다'라고 말하는 것도 결국은 그 시점에 우세한 집단에서 정한 편견일지도 모른다는 아이디어를 작가는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낸다.이런 다양한 방향성을 지닌 고민을 해볼 수 있는 것도 김초엽 작가의 소설이 가진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열네 편의 소설들 중에서 기억에 남았던 부분들을 아래에 남기며 감상문을 마무리해보고자 한다.
3. 소설들에 대한 감상
선인장 끌어안기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이 사랑일까, 아니면 고통을 견디는 것이 사랑일까.
작가는 위의 심리적 가치판단과 고민을 '선인장 끌어안기'라는 이야기를 통해 물리적인 고민으로 치환하여 상황을 풀어낸다. 타인과 접촉할 수 없는 병을 가진 서로(파히라와 소영)와 영영 거리를 두고 멀어지는 것이 사랑일지, 고통을 감내하고서라도 서로를 껴안는 것이 사랑일지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고민은 말 그대로 쓰라리다. 이런 상황에서 소영이 그들 자신을 선인장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도 적절했다고 생각했고, 마지막 순간에 파히라가 선인장을 끌어안는 장면에서는 '아픈 사랑'이라는 감정이 뼈를 찌르는 듯했다.참으로 쓰라리면서도 애틋한 이야기였다.
멜론 장수와 바이올린 연주자
사진 한 장을 보고 소설을 써 내려가는 작업이 흥미로웠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야기적으로
기억에 남는 점은, 사람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동경한다는 점이다. 다른 평행세계의 같은 인물이었던, 성공하지 못한 멜론 장수와 바이올린 연주자는 서로의 직업을 동경했다. 물론 서로의 직업이 반대였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반대로 서로를 동경했을 것이다. 본인의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이는 자연스레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나였더라면'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지만, 지금과 다른 내가 지금의 나보다 나으리라는 보장은 사실 없다. 오히려 지금이 더 나은 삶이었다고 말할지도 모를 따름이지만, 그런 가정의 세계가 일어나지 않은 현실 세계에서는 혹시 모를 더 나을 미래를 동경하게 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파울로 코엘료 작가의 '연금술사'가 생각났다. 양치기의 꿈에는 피라미드 밑에 보물상자가 묻혀 있었지만, 정작 사막에 살던 이는 양치기가 살던 동네의 땅 밑에 보물상자가 묻혀있는 꿈을 꾸었다. 현실과 이상에 대한 고민 방식이 위 이야기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아래의 문장 표현이 기억에 남는다. 평행우주의 개념을 책에 빗대어 의미도 잘 살리고 표현도 좋았던 것 같다.
"우린 사실 쌍둥이도 형제도 아니란다. 동일한 존재의 다른 세계에 있는 판본이지."
데이지와 이상한 기계
이야기 자체는 짧았지만 평소에 하던 고민과 맞닿아있던 이야기여서 기억에 남는다. 결국 한 시스템 하에 포함된 존재가 그 시스템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는 관찰자가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세상의 진리에 수렴할 수는 있더라도 도달할 수는 없다는 점을 번역 장치(이상한 기계)를 통해 잘 풀어낸 것 같다.
'평생을 살아도 우리는 타인의 현실의 결에 완전히 접속하지 못할 거야.'
행성어 서점
기술의 발전에 이점만이 수반되는 것은 아니다. 완벽을 향한 고민은 불완전함과 결핍에 대한 갈망을 불러온다. 완벽을 향한 시도(번역장치)는 읽을 수 없는 책과 낯설음이라는 존재를 앗아가게 되었다. 세상은 상보적 관계라는 점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포착되지 않는 풍경
결핍과 제한에서 오는 매력도 있다. 무지개,
오로라가 1년 365일 하늘에 걸려있다면 그렇게까지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의 모든 순간을 나노초 단위로 기록할 수 있는 세상에서도 구시대 방식의 사진이 성행하는 것은 그 순간을 붙들어 액자에 담아 보존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글을 읽는 내내 화자(사진작가)의 감정에 이입하여 '포착되지 않는 풍경'을 어떤 기술로 포착할 수 있을지만 고민하던 찰나에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던 노인의 모습을 보니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얼했다.
늪지의 소년
'개별적 개체성'이라는 단어가 기억에 남는다. 분명 SF적 상황이었음에도 왠지 전체주의와 개인주의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작가의 이전 작품중 '인지 공간'에 대한 내용도 함께 연상되었다. (온 세상의 지식을 공간에 모아놓은 세상에서 개인의 지식을 별도로 모아 세상과 구분해 놓을 필요가 있는지) 비슷한 맥락으로 김영하 작가의 '작별 인사' 작품도 연상되었다. (시스템의 하나가 되어 완전해지고 개별성을 잃을 것인지, 세상과 단절된 나라는 존재를 유지할 것인지)
본 작품에서 전체에 해당하는 '늪'은 늪과 하나가 되지 않는 한 소년을 보며 '고유한 신체로 살아가기 위한 이해할 수 없는 투지'라고 언급한다.
아직 늪의 일원이 되지 않은 소년과 늪의 사이에 위치하는 것이 '오웬'의 존재인 것 같다. 늪에 흡수당했지만 본인의 자아를 유지하고 있는 오웬은 늪 전체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가 되지 못한 어정쩡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데, 오웬의 존재 자체가 작은 치찰음이 되어 전체가 아닌 개인, 개별적 개체성에 대해 늪이 이해할 수 있는 마중물 역할을 해주는 것 같다.
시몬을 떠나며
가면(인 줄 알았던 기생생물)을 얼굴에 쓴 시몬의 사람들은 거짓된 얼굴을 함으로써 진실되게 행동할 수 있었다. 거짓된 표정을 연기하지 않고 진실된 감정을 나눌 수 있다는 설명이었는데, 작가의 이전 작품 중'마리의 춤'에서 나오는 모그(시각을 차단당하고 더 예민한 다른 감각을 얻은 존재들)가 떠올랐다. 가면을 씀으로써 본성이 나타난다는 점에서는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 엔딩씬도 떠올랐다.
우리 집 코코
TV속 존재는 본인이 TV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외계식물 코코는 외적으로 보기에는 일종의 마약처럼 보이나, 정작 그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겐 생필품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에는 절대적 진리와는 무관하게 그 세계를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린 것 같다.
오염구역, 가장자리 너머
단편 사이에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글을 읽다가 갑자기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을 보니 흥미로웠다.
오염구역은 몸에서 버섯이 자라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였는데, 마을 사람들은 본인들이 생존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살아가고 있었으나 외부인 입장에서 보기엔 명백히 비정상 같아 보였다. 하지만 외부인의 관점에서 쉽사리 비정상으로 낙인을 찍기도 어려운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현상이 자명하게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면 무리하게라도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맞겠지만, 그들 나름대로 잘 살아가고 있는 상황이라면 굳이 그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할 필요가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 보게 되었다.
결국엔 다름과 틀림을 어떻게 이해하고 구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넓은 범위의 질문으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김초엽 작가의 글은 이렇게 생각의 타래가 꼬리를 무는 것이 즐거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