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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눈부신 안부, 백수린

(스포) 안부를 묻는 일은 사소하지 않으며, 모든 것의 시작이기도 하다.

by 김주렁

0. 상에 앞서.


백수린 작가의 글은 한낮에 머리 위로 내리꽂는 눈부신 일광보다는 옅은 베이지색 커튼에 걸러져 방으로 들어오는, 은은하지만 착실하게 빛나며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아침녘의 햇살 같다. 작가의 소탈하면서도 짙은 여운을 남기는 글이 좋다. 작가의 '여름의 빌라'라는 책을 읽었을 때의 았던 감정은 나로 하여금 이 '눈부신 안부'라는 책을 읽을지 말지에 대한 고민을 사르르 녹여내주었고, 시의적절하게 찾아온 여름휴가는 한달음에 책을 다 읽을 수 있도록 나에게 여유를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작가의 문장이 좋다고 해서 필연적으로 작품까지 좋아지 것은 당연히 아니다. 문학 작품, 그중 특히 신변잡기(身邊雜記) 느낌의 소설 작품에 있어 중요한 것은 '작가가 그려낸 세상에 독자를 얼마나 가깝게 데려올 수 있는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에 있어 필요한 것은 어느 정도 납득 가능한 개연성과 이를 바탕으로 한 공감대 형성이다. 작가의 자유로운 창작에 기반한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너무나 허무맹랑하고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는 독자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 소설과 문장의 개연성에 대해서는 아래 김영하 작가의 말에서도 그 중요성을 엿볼 수 있었다.

소설가라는 존재는 의외로 자율성이 적다. 첫 문장을 쓰면 그 문장에 지배되고, 한 인물이 등장하면 그 인물을 따라야 한다. 소설의 끝에 도달하면 작가의 자율성은 0에 수렴한다.
(살인자의 기억법-김영하, 작가의 말 中)


백수린 작가의 '눈부신 안부'라는 소설은 불완전하고 어딘가 조금은 결핍된 듯한 '해미'라는 화자 현재와 과거 회상을 중심으로 개된다. 어느 하나 순탄하나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이상적이거나 본받을 만한 모습이 있는 것도 아닌 해미의 모습은 날것 그대로인 우리네 모습과 닮아있었다. 그렇기에 해미 우리의 모습에 투영하여 작품에 더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미의 심리, 해미의 주변인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아래에 감상을 이어 나가 보겠다.


1. 해미. 상실과 거짓말. 해명과 방어기제.


해미의 삶은 여러모로 녹록하지 않았다. 해미의 언니는 어느 날 돌연 가스 폭발 사고에 휘말려 세상을 떠났고, 황망한 나날을 보내던 해미는 아버지를 한국에 남겨두고 동생 해나와 함께 어머니의 독일 유학길을 라가게 되었다. 어머니와 막내 사이에 낀 해미는 마냥 어리광을 부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위치에 놓였고, 본인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웃자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해미의 거짓말은 악의가 아닌 필요에 의해 겨나게 되었고, 끝내 본인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고 말았다.


어머니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한 친구가 있다는 거짓말, 어른들의 기대를 져버릴 수 없기에 시작된 작가가 꿈이라는 거짓말, 한수와 한수의 어머니인 선자의 소망을 이뤄주기 위한 일련의 거짓말 등 거짓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성인이 되고 나서도 글을 쓰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들어가게 된 문학부, 진실을 말하고자 기자가 되었지만 자극적인 내용과 거짓된 내용만을 쓰게 된 상황, 그런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퇴사했지만 가족이 걱정할까 봐 알리지 못하는 상황, 우재에게 진심을 전하지 못하는 상황 등 어딘가 하나씩 어긋난 삶을 해미는 살아 수밖에 없어 보였다.


덧. 진실과 거짓의 오마주
작품 초반 해미는 어머니에게 친구가 있다는 거짓말을 실수하지 않고 잘 해내기 위해 비밀노트에 거짓말을 위한 진실들을 적어나간다. 노트의 왼쪽에는 빨간 글씨로 진실을, 오른쪽에는 파란 글씨로 거짓말을 적는다. 매트릭스의 오마주는 아직까지도 건재하다고 생각했다. 이후 해미가 파란 글씨로 '내 꿈은 작가가 되는 것.'이라고 적는 장면을 보며 이 오마주를 이 장면 이후에도 잘 활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해미의 이모에게 위 거짓말을 들키고 실제 친구인 레나와 한수를 사귄 후로는 노트에 검은 글씨로 K.H. 를 찾기 위한 정보들을 써 내려간다.


해미의 상황과 감정에 공감이 되면서도 안타까움이 컸던 것은 그녀의 선택들이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애당초 해미에게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었더라면 구태여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간은 전지전능하지 않기에 무언가를 얻고자 하면 다른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한다. 타인을 배려하고자 한 해미의 거짓말은 결국 본인을 조금씩 좀먹었, 본인과 타인 사이에 일종의 벽을 세우고 말았다.

"해미는 제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찾아오지 않는 한 먼저 인사시켜 드릴 리가 절대 없거든요. 아시죠? 해미는 가까워지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일정 거리 안으로는 들이지 않는 거."
(백수린-눈부신 안부 中 우재의 말)


위에서 기인한 해미의 불안한 심리는 소설의 서술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소설은 전반적으로 해미의 1인칭 시점에서 서술되는데, 면적인 서술 외에 해미의 속마음도 꽤나 자주 병기하여 보여준다. 이는 대체로 '이런 상황 -하지만 속마음은 이렇다-이다. ' 와 같이 어떤 상황에 대해 해명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또한 '~했던가' 형태로 끝나는 문장도 꽤나 자주 나타나는데, 본인이 본인에 대해 이야기하더라도 불확실한 느낌의 어미가 많이 사용된다. 한 해미는 과거의 일들이 부분 부분 기억나지 않는다며 넘기기도 부지기수다. 이와 같은 표현방식들은 결국 해미 본인의 불안한 심리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로 작용한다.


2. 선자 이모의 첫사랑. K.H. 찾기의 의미


본인에 대해서는 저렇게나 거짓이 섞여있고 불확실한 해미가 작품 내내 찾아 헤매는 단 하나의 진실은 독일에서 사귄 한수라는 친구의 어머니(선자)의 첫사랑인 K.H. 가 누구냐는 것이다. 가족도, 친구도 아닌 친구의 어머니의 첫사랑, 심지어 이름조차 확실치 않은 존재를 해미와 레나, 한수는 나름의 방식으로 찾아나다.


해미에게 있어 이 K.H. 찾기는 어떤 의미였을까? 물론 거기엔 친구(때때로는 친구 이상의 존재이기도 했던)인 한수의 어머니를 돕기 위함도 있었겠지만, 한수와 선자 이모에게 거짓말로 K.H. 를 찾았다고 한 후에도 해미는 끝까지 그 정체를 찾아 헤맸고, 본인의 성향에 어울리지 않게 생전 모르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기도 했다. 이것은 친구의 어머니를 돕기 위함보다는 본인이 얽혀있는 세상에서 진실된 존재를 하나라도 찾기 위한 여정이 아니었을지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물론 그 과정도 해미가 파독간호사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쓴다는 거짓말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지만, 그렇게 거짓말로 쌓아 올린 인생에서 해미는 진실을 찾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해미의 언니인 해나의 죽음에서는 아무것도 밝혀낼 수 없었고 심지어 시신도 찾을 수 없었지만, K.H.라는 인물은 단서는 부족했지만 좌우간 실존하고 손에 쥘 수 있는 진실 같아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K.H. 에 대한 진실이 해미가 생각한 것만큼 명확하고 깔끔하지는 않았다. 해미가 '기호'라고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던 K.H. 의 이름은 틀린 이름이었고, 실제 K.H. 의 이름은 '근호'였다. 그런데 이는 거짓된 정보였기 때문이 아니고, 수학기호라는 힌트를 들었던 당시 알고 있던 용어가 '기호'뿐이었기에 발생한 정보의 부족이었고, 끝끝내 찾아낸 근호 씨의 성별이 여성이었던 것도 짓된 정보라기보다는 확증편향에 가까웠다. 진실을 좇아 나아가던 해미의 여정의 끝이 이런 진실과 거짓이 애매하게 뒤섞인 지점이라는 것이 해미의 인생을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들어줬던 것 같다.


3. 우재 이모의 존재. 세상과 해미의 접점


3-1. 우재


본 작품의 시점은 크게 우재와 해미가 재회한 현재, 과거 대학 시절의 우재와 해미, 해미가 독일에 살던 과거 시절로 나며 현재 시점의 해미가 우재와 이야기를 나누며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눈부신 안부'라는 작품에 있어 우재의 역할이 무엇이었을지 고민해 보았다. 굳이 우재가 없었더라도 해미의 이야기는 어떻게든 흘러갈 터였다. 하지만 막상 우재가 없는 상황을 생각해 보니 한 곳이 허전했다.


우재는 해미에게 있어서도, 독자에게 있어서도 필요한 존재였다. 세상과 일정 수준의 거리를 두고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으려 하는 해미에게 있어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공감대를 형성해 주며 곁에 있어주는 우재는 해미와 세상을 연결해 주는 교두보 역할을 해주었다. 대학교 동아리 엠티날 과도한 강권에 못 이겨 야밤에 탈출하려던 해미를 붙잡아준 우재의 행동이 작품 내 우재의 역할을 단편적으로 보여준 것 같다.


독자에게 있어 우재는 해미의 속마음을 끌어내주는 매개체이자 해미의 심리를 비춰주는 거울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우재와 해미가 재회하여 이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이야기의 도화선이기도 하거니와, 작품의 종반부까지 본인의 마음을 얼버무리고 우재에게 다가가지 않았던 해미의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척도가 둘 사이의 관계와 거리였기 때문이다. 해미는 아끼는 누군가를 또다시 잃는 것이 두려워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고 싶지 않아 했지만, 성장통 없는 성장은 없다. 과거의 슬픔을 깨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작은 고통부터 감내할 수 있어야만 했고 우재는 마침 해미의 삶에 있어 적당한 치찰음이 되어주었다.


3-2. 해미의 이모


독일에서 의사 생활을 하던 해미의 이모는 해미에게 있어 본인과 타인 사이의 딱 중간 정도의 역할을 해주었다. 차마 가족에게는 풀어놓을 수 없는, 그렇다고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전할 수도 없는 고민과 생각들을 해미는 이모에게 전한다. 그리고 해미의 이모는 너무 재촉하지도, 너무 무관심하지도 않은 정도의 관심을 해미에게 건넨다. 엄마가 아닌 이모라서, 딱 그 정도의 거리감이었기에 성립할 수 있었던 관계라고 생각한다. 작품 초반에 해미는 이모에겐 거짓말을 잘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이모에게마저 진심을 전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세상과 자신을 이어 줄 수 있는 존재가 없다고 은연중에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4. 파독간호사. 제주도의 야자수.


작품의 심리적 주체는 해미이며, 사건과 배경의 주 요인이 되는 것은 해미의 이모들, 파독간호사들이다. 파독간호사라는 배경은 독일을 단순히 해미 가족의 도피를 위한 먼 타국이 아니라 동포와 가족이 생을 이어나가고 있는 또 다른 터전으로 변모시켰다. 한국은 아니지만 한국의 사람들과 음식이 있는 독일의 G시는 세상에서 한 발치 떨어져 있는 해미의 처지와도 닮아있다.


실제 역사적 배경을 소설에 차용하는 것은 가공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자니 스토리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 같고, 그렇다고 이야기에 맞게 각색하자니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이따금은 실제 사실이 소설보다 개연성이 떨어지기도 하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파독간호사라는 소재가 소설로 풀어나가기 쉬운 소재는 아니었을 것이다. 작가의 말을 읽어보더라도 어느 수준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지 고민이 많았던 것이 느껴졌다. 어느 부분이 사실이고 어느 부분이 각색인지 작가는 책의 말미에 소상히 밝혀놓기도 했다. 또한 작가는 파독간호사를 가난이나 희생, 애국의 프레임으로 단순화해서 바라보지 않으려 했다고도 말한다. 그런 면에서 작가가 하나의 소설을 써 내려가며 했을 수도 없을 고민들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하나의 소설을 써내려 나가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작품에는 제주도의 야자수라는 소재가 두어 번 등장한다. 제주도에 심어진 야자수는 원래부터 자생했던 것이 아니라 수입해 온 것이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이야기였다. 해미는 야자수를 독일에 살던 본인의 가족들에 빗대어 바라보며 조금은 안타까워 하지만, 우재는 말미에 아래와 같은 말을 남긴다. 살아남았다는 말은 자조적이지 않다. 강인한 생존의 상징이다.

"그런 야자수들이 살아남아 이젠 제주의 일부가 되었으니 정말 아름다운 일이지?"
(백수린-눈부신 안부 中 우재의 말)


5. 안부의 의미


작품의 제목인 '눈부신 안부'에 대해 생각해 보자. 눈부시다는 말은 긍정적인 표현인 것은 맞으나 너무 강렬하여 마주 보기 어렵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안부는 서로의 안위를, 소식을 묻는 행위며 작품 내에서 해미가 서툰 분야이기도 했다. 안부를 묻는 데 있어 해미는 수동적이었다. 애당초 타인과 접점이 많지 않기도 했고,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레나와 한수의 연락과 편지에도 답을 안 하기 일쑤였고, 본인에게 가장 가까운 우재와 이모에게도 적극적이지 못했다. 제주도에 있는 우재는 해미를 보러 서울로 매번 올라왔고, 해미가 이모와 만난 것도 이모가 귀국하여 서울에 있는 해미의 집으로 와서 뿐이었다. 안부를 전하는 행위가 아름답고 눈부시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거기에 쉽사리 다가가지 못한 해미의 마음가짐이 '눈부신 안부'라는 표현으로 빚어진 것은 아닐지 조심스레 사견을 남긴다.


작품의 종국에 해미가 K.H. 의 정체를 알아내는 과정이야말로 안부를 전하는 행위였다. 다만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에게 타인(선자 이모)의 안부를 전하는 전달자의 역할이었지만 말이다. 전화로, 편지로, 메일로 마음과 마음은 이어지고 전달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해미는 마음이 이어지는, 안부를 전하는 행위의 아름다움을 깨달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우재에게 안부를 전하려 제주도행 비행기에 오른 해미의 모습을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6. 마무리하며


여러모로 읽고 나서 여운이 많이 남았던 작품이었다. 완전하지 않은 존재인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해미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문장들이 좋았다. 일순간 휘황찬란하고 강한 임팩트를 주기보다는 종이에 베인 상처 틈을 지그시 누르는 듯한, 소탈하면서도 아릿한 자극이 문장들에서 느껴졌다. 차분하면서 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작가의 글은 차분하면서도 올곧은 방향성을 가지고 점진적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나도 언젠가는 이런 눈부신 문장들까지는 아니더라도 은은하게 빛나는 문장들을 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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