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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진정으로 아끼는 서로이기에 마음의 짐을 지워줄 수밖에 없었던 애틋한 이들

by 김주렁

0. 서론. 원작이 존재하는 작품의 매력이자 고충.


2022년 12월 10일 토요일에 영화관에서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이하 오세사) 영화를 보았다. 이전에 책으로 읽었을 때의 기분 좋은 울림이 남아있었기에 장고 없이 영화를 보기로 결정할 수 있었다.


소설, 만화 등 원작이 있는 영화나 애니메이션은 원작이 없는 오리지널 작품과는 출발선이 다르다. 하지만 이는 감독에게 있어 양날의 검이 되기 십상이다. 좋은 원작이 있는 작품은 그 내러티브와 매력포인트를 답습하여 잘 따라가기만 하더라도 반은 성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글 → 영상, 그림 → 실사 등 다른 매체 특성을 가지고 본연의 강점을 살려내기란 여간 쉽지 않은 일이다.


원작의 팬층이 두터울 경우 이 어려움이 더욱 부각된다. 위에서 설명한 매체 특성상 영화가 기존 매체를 완벽하게 모사해내는 것은 쉽지 않으며, 심지어 완벽하게 모사하는 것이 정답이 아닐 경우도 더러 있다. 원작의 요소와 줄거리를 어느 정도까지 남길 것인지에 따라 작품은 '원작의 인기를 맹신하고 적당히 비슷하게만 만들어내면 성공할 거라는, 원작을 훼손하고 고증에 실패한 경우'가 될 수도 있고, '작품성이나 영상미는 무시하고 단순히 영화화를 위한 무리한 시도로 인해 단순히 움직이는 스토리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덧 1. 필자의 인생 애니인 '카우보이 비밥'의 영상화가 실패한 것이 개인적으로 뼈아팠다. 애니메이션 그림을 영상으로 옮겨오는 작업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덧 2. 요네자와 호노부의 소설 '빙과'를 포함한 고전부 시리즈를 교토 애니메이션에서 애니화하여 2012년에 방영하였다. 빙과 애니메이션이 소설(글)의 느낌을 잘 살리면서 애니화한 사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함께 소개해본다.
소설 원작의 작품은 대체로 서술자의 해설이자 혼잣말이 많다. 원작의 장편 소설을 영상으로 옮길 때 발생하는 어느 정도의 타협점이라고 생각하는데, 빙과 애니메이션은 소설의 주된 플롯인 수수께끼 해결을 글의 느낌이 많이 남아있는 영상으로 소개해주는 경우가 있다. 원작 소설과 애니메이션을 모두 본 입장에서, 빙과 애니메이션은 글을 영상으로 옮기면서도 글의 느낌이자 매력을 잘 살려냈다고 생각한다.
빙과 2화 장면 중 수수께끼 해결 부분. 말 그대로 글이 움직이는 영상 연출을 보여준다.

원작을 얼마만큼 개연성 있게, 영상이라는 매체에 적절하게 각색해낼 수 있는지가 원작이 있는 작품을 선택한 감독이 감내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오세사 작품은 원작 고증과 영상화를 위한 각색 사이에서 구심점을 잘 잡아냈다는 생각이 개인적으로는 들었다. 전체적인 줄거리에 대한 내용은 아래 영화 줄거리와 이전에 작성한 소설 감상문으로 갈음하며, 이 글에서는 소설 원작의 느낌과 비교하며 영화에 대한 감상을 남겨보고자 한다.


줄거리(출처 : 네이버 영화)
“카미야 토루에 대해 잊지 말 것” 자고 일어나면 전날의 기억을 잃는 ‘선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린 소녀 ‘마오리’ “내일의 마오리도 내가 즐겁게 해 줄 거야"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무색무취의 평범한 소년 ‘토루’ 매일 밤 사랑이 사라지는 세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 서로를 향한 애틋한 고백을 반복하는 두 소년, 소녀의 가장 슬픈 청춘담


1. 원작의 느낌과 비교하여


기본적인 스토리 전개는 소설과 동일하나, 스토리 전개를 위한 방법 및 소재가 영상에 맞게 각색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원작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자 아이덴티티는 주인공인 마오리의 수첩과 일기이다. 마오리에게 있어 본인이 본인임을 인지하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글이며, 이 소설 또한 당연히 소설이기 때문에 글을 매개체로 독자와 소통한다. 이 소설은 이 점을 잘 활용하여 글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마오리의 심정과 시점을 직접적으로 독자에게 부여하며, 마오리가 아닌 다른 인물의 이야기들도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하여 이 효과를 배가시킨다. 또한 이 시점을 활용하여 일종의 서술 트릭을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이 영화화되면서, 매개체가 영상이 되면서 이야기의 주된 소재와 매개체가 동일한 방식이라는 이점은 자연스레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주된 화자이자 서술자가 마오리인 것에는 변함이 없으나, 우리는 마오리의 눈으로 작품 전체를 바라보지는 않으며 여느 작품처럼 대체로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작품이 전개된다.


원작 소설과 영화의 시점 차이를 어느 정도 좁혀주며 1인칭 시점의 비중을 높여주는 것을 마오리의 스마트폰 카메라가 담당해주었다고 생각한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마오리는 본인이 보고 느낀 것을 글로도 남기지만 사진과 영상으로도 남긴다. 카미야와 마오리가 데이트를 할 때 마오리는 본인의 시점으로 카미야를 찍기도 하며, 또 때로는 카미야가 카메라를 넘겨받아 마오리를 찍어주기도 한다. 또 둘이 같이 셀카를 찍기도 한다. 보통이라면 3인칭으로 보여질 데이트 장면을 1인칭 카메라 시점으로 보여주면서 마오리와 카미야의 감정에 더 가까이 다가가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마오리가 공원에서 잠든 후 기억을 잃었을 때는 마오리의 눈을 클로즈업한 뒤에 마오리의 시점에서 세상을 보여준다. 이 장면이 직접적으로 마오리의 시점과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준 장면인 것 같다. 관객은 이미 초반부터 마오리의 상황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이 시점 이전까지는 어디까지나 관찰자의 입장에 머물렀다. 하지만 일순간 마오리의 시야를 통해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관객이 마오리의 입장과 상황에 더 직접적으로 몰입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카미야가 마오리에게 거짓고백을 하게 되는 첫 장면에서 SNS로 영상이 퍼지게 된 것이 조금은 아쉬웠다. 영상미 자체는 좋았지만, 마오리가 카미야에 대해 얼굴도 잊은 채 고백받았다는 사실만을 알고 다음날 교실로 찾아가 카미야를 처음 보게 되는 장면의 임팩트가 반감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만 알고 얼굴이나 생김새를 모르는 상태에서 카미야를 처음 마주했어야 할 마오리이지만, 영상으로 어제의 상황과 카미야의 생김새에 대해 알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오늘의 마유리'가 보여주는 첫 시점의 의미가 다소 퇴색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SNS를

직접 확인했는지 언급이 나오진 않았고, 연출 자체도 카미야를 처음 보는 듯하게 잘 되었지만 이런 소소한 포인트가 조금은 아쉬웠다. 마오리가 매일 처음 카미야를 마주하게 되는 순간의 중요도가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주된 갈등이자 전개는 마오리와 카미야의 관계이지만, 부수적으로 카미야와 카미야의 아버지, 누나 사이의 갈등도 보여진다. 전체적인 배경과 전개는 원작과 비슷했지만, 임팩트와 전체 분량을 감안하여 다소 전개가 압축되지 않았는지 싶다. 내용과 상황은 충분히 감동적이었고 눈물도 흘렸지만, 카미야의 누나와 카미야의 아버지 사이의 갈등이 그 깊이 치고는 다소 빠르게 해결된 것이 아닌지 싶다. 인상 깊은 장면이었기에 분량에 문제가 없었다면 조금은 더 긴 호흡으로 풀어내도 어땠을지 싶다. (사실 더 길게 구성되어 있었다면 지루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만큼 인상 깊은 장면이었기에 작은 아쉬움을 남겨본다.)


2. 영상이었기에 보여줄 수 있었던 장면들


위 단락에서 원작 글과 영상의 방식에 대해 비교했다면, 이 단락에서는 영상이었기에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던 장면들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확실히 영상이기에 임팩트 있게 보여줄 수 있는 장면들이 있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색감 자체도 전반적으로 적절했다. 아름답지만 마냥 쨍하지만은 않은 청춘의 색이었다.)

영화 스틸컷(출처 : 네이버 영화) 중 일부. 아련하고 빛바랜 추억같은 색감이었다.

마오리와 카미야, 와타야의 하굣길 삼거리 육교


마오리와 카미야, 와타야의 하굣길에는 삼거리로 나뉘는 육교가 있다. 삼거리에서 마오리는 왼쪽으로 향하며, 카미야와 와타야는 멀어지는 마오리를 바라보다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카미야가 죽고 난 뒤 카미야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와타야의 입장이 직관적으로 보여지는구나 싶었다. 카미야가 죽기 직전 일기에서 본인의 이름을 지워달라고 말하는 것도 이 육교의 갈림길에서이다.


공원에서 낮잠을 자고 기억을 잃어버린 마오리


앞에서 설명하긴 했지만, 마오리의 눈을 비춘 뒤에 마오리의 흐릿한 시점으로 생경한 장면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 인상 깊으면서도 감정이입이 되어 두려웠다.


마오리의 추억에서 카미야가 사라지는 연출


카미야가 죽고, 와타야와 카미야의 누나는 카미야의 바람대로 마오리의 일기에서 카미야를 지우고 그 자리에 와타야를 써넣는다. 그렇게 되면서 카미야라는 존재가 마오리 안에서 사라지게 되는데, 이때 둘의 추억들이 나오면서 그 영상에서 카미야가 사라진다. 직접적이면서도 마음 아픈 방식으로 영상이 표현되었다. 그 자리에 와타야가 서있는 것까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상실의 슬픔을 극대화하기 위함인지 카미야가 사라지는 것까지만 표현된 것 같다.


덧 3. 소설에서의 표현
소설에서는 이 장면이 더욱더 충격적인 방법으로 제시된다. 전체 이야기의 3/4 시점쯤에 잘 흘러가던 이야기에서 갑자기 카미야의 이름이 와타야로 바뀌어 자연스럽게 전개가 이어진다. 마치 마오리가 일기를 보고 세상을 파악하듯, 독자도 글을 읽으며 마오리와 동일한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이야기의 소재가 마오리의 일기장이었고, 원작이 소설 글이었기에 가능한 훌륭한 서술 방식이었다.


아버지의 백지 원고. 원고를 손에 움켜쥐고 일어서는 아버지.


작품에서 카미야의 아버지는 아내가 심장병으로 죽고 난 후에도 소설가의 꿈을 이루고자 글을 써내려 나가지만 그 결과는 신통치 않다. 카미야는 후에 이를 세상에서 도피하고자 글을 쓰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카미야의 누나가 작가로서 큰 상을 수상한 것을 알게 되고 나서 이 갈등이 절정을 맞이한다. 카미야는 더 이상 도피하지 말자면서 이전에 청소하다가 아버지의 책상 밑에서 찾은, 문고에 보내지 않은 아버지의 봉투들을 내민다. 그 봉투가 땅에 떨어지자 빈 원고지들이 나온다. 아버지가 문고에 책을 보내지 않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일순간 흩뿌려지는 백지 원고지가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효과가 컸다. 그리고 그 이후, 과거를 후회하며 원고지를 손에 움켜쥐는 아버지의 손이 클로즈업되는데 그 손동작과 구겨지는 원고에서 슬픔과 후회가 깊게 전해져 왔다.


기억 장애가 치료되는 과정에서 카미야를 그린 그림들 사이에 앉아 카미야를 그리는 마오리


점차 호전되면서 어제와 그제의 기억이 남게 된 2022년의 마오리(고등학교에서 3년이 흐른 시점)는 방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카미야를 그린 스케치북을 발견하게 된다. 일기에서 내용을 지웠기에 마오리의 안에는 카미야가 남아있지 않지만, 왠지 계속 그리게 된다면서 마오리는 카미야를 계속 그린다. (작품 중간에 카미야가 마오리에게 말해준, 기억이 사라지더라도 남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던 절차기억이라는 개념이 여기까지 연결된다) 그리고 와타야가 카미야에 대한 진실을 말해주고자 마오리의 방에 들어왔을 때, 일순간 네다섯 장의 카미야 그림에 둘러싸인 마오리가 화면에 비친다. 이 장면이 일순간 관객에게 주는 임팩트가 상당하다. 이전 단계에서 마오리의 감정을 일기를 읽으며 차곡차곡 쌓아 올려온 와타야의 감정이 일순간 무너져 내리며, 그 순간 관객의 감정도 크게 일렁인다.


'카미야 토루를 잊지 말 것'이라는 쪽지가 매일 아침 일어나면 보는 안내문 뒤에 숨겨져 있는 점


그렇게 큰 요소는 아니나, 매일 마오리 자신이 보고 일어나는 안내문 안에 '카미야 토루를 잊지 말 것'이라고 메모를 남겨놓은 마오리의 애틋한 마음이 전해져 왔다. 마오리는 기록이 사라지면 기억도 사라지고 만다는 본인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더더욱 잊고 싶지 않았던 카미야 토루라는 존재를 그곳에 남겨두었을 것이다.


3. 글을 마무리하며


큰 기대 없이 원작만 어느 정도 따라가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에 영화관으로 향했었지만, 기대했던 것보다 영상미도 좋았고 감정 몰입도 잘 되었다. 서로를 지켜주기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고 서로에게 짐을 지워주는 마오리와 카미야, 와타야의 빛나는 우정과 청춘이 아름다우면서도 너무나 슬펐다. 꽤나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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