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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렁 Sep 24. 2023

[독후감]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불확실한 존재에 의한 번민이 이 세상을 흘러가게 한다.

※ 작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 들어가기에 앞서


소재, 표현, 서사 과정 등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불확실한 벽"이라는 하나의 구심점을 향해 모여드는 느낌의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나서 두 번째로 접하는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작품이었는데, 두 작품 모두 선명하고 채도가 높은 원색의 포스터컬러보다는 은은하고 옅은 파스텔로 그린 풍경화 같았다. 문장의 호흡이 전반적으로 길었던 것도 이런 분위기에 일조했다고 생각한다. 전반적으로 비현실적이고 불확실한 상황을 다루다 보니 작가가 그려낸 세상에 몰입하기까지 다소 시간이 필요했지만, 어느 정도 책장을 넘긴 후에는 술술 읽어나갈 수 있었다.


작품 중간에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라는 책이 인용되며 작중 인물이 아래와 같은 평을 남기는데, 매직 리얼리즘이라 할 수 있을 아래 내용이 작품의 배경을 잘 설명해 주었던 것 같다.

"그의 이야기에는 현실과 비현실이,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이 한데 뒤섞여 있어"... "마치 평범한 일상 속의 일들인 것처럼"


총 3부로 구성된 본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소재들,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생각들을 아래에 찬찬히 풀어나가 보겠다.


1. 작품의 제목에 대한 생각 / 도시, 벽, 불확실


작품의 제목은 창작자가 만들어낸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마중물이자 대문 앞에 붙은 명패라고도 할 수 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라는 작품의 제목에는 크게 세 가지의 소재(도시, 벽, 불확실)가 등장하며, 이 소재들은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작품을 착실하게 끌어나간다.


'도시'는 작품의 주인공인 "나"가 열일곱 살의 어린 시절에 만난 한 살 어린 "너(그녀)"에게 들었던 가공의 장소였다. 그녀는 자신이 '진짜'가 아닌 대역이며, 진짜 자신은 그 도시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어린 시절 나누던 둘만의 비밀 이야기 정도로만 들렸지만, 이후에 나는 실제로 그 세계(도시) 앞에서 눈을 뜨게 된다. 도시는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렇게 나는 그 도시로 들어가게 된다.


작품은 크게 '학창 시절의 나와 그녀', '중년의 나이에 그 도시에 들어가 지내는 나와 도시 속의 너(학창 시절 그녀의 모습을 한 도서관의 사서)', '도시 밖으로 나와 Z**시에서 도서관 관장으로 지내는 나와 Z**시의 사람들(전 관장 고야스 씨, 사서 소에다 씨, 커피숍의 그녀, 옐로 서브마린 소년인 M**)', '도시로 들어가게 된 옐로 서브마린 소년과 그 도시 안에 있는 나'로 시공간적 배경이 이동한다. 이렇게만 보자면 "나"라는 존재의 여정과 일대기 같지만, 여기에 '그림자'라는 소재가 더해지게 되면서 작품의 복잡성과 불확실성이 커지게 된다.


2. 그림자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림자는 빛에 사물이 투영되어 나타나는 그늘이자 일종의 부산물이다. 그런데 본 작품 속의 '그림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작품 속 "나"가 그 도시 앞에서 정신을 차리게 된 시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는 단 하나의 문만 존재하며, 그곳은 한 명의 문지기가 지키고 있다. 자세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도시 안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문지기에게 다가가며, 문지기는 도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림자를 잘라야 한다고 말한다. 잘린 그림자는 도시에 들어가지 못하고 본체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오래 살아남을 수 없으며, 그림자가 없어진 사람들은 다시 바깥세상으로 나올 수 없다는 설명 또한 문지기는 덧붙인다. 나는 결국 그 도시에 들어가고자 그림자를 잘라내는데, 잘려나간 그림자는 독립된 자아를 가지고 있는, 마치 나의 분신 같은 존재로 나와 분리된다.


그렇게 그림자를 잘라낸 나는 '꿈 읽는 이'로서 도시 안에 있는 도서관에서 어린 시절 그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사서와 꿈 읽는 일을 하게 된다. 그렇게 반복적인 일상을 보내던 나는 문득 자신에게서 잘려나간 그림자를 궁금해하게 되고, 그렇게 문지기가 있는 곳에서 지내고 있던 그림자와 재회하게 된다. 본체에서 떨어져 나간 그림자는 이미 쇠약해져 있었고, 도시 안의 삶과 도시 밖의 원래 세상에 대해 고민하던 나는 그림자가 사라져 버리기 전에 그와 함께 도시를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갖은 역경을 거쳐 도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웅덩이 앞에 도달하지만, 나는 도시 안에서 살아가기로 다시 마음을 바꾸며 나의 그림자만 도시 밖으로 나가게 된다.


이렇게 1부가 마무리되고, 2부는 도시 밖에서 눈을 뜬 나의 시점으로 시작된다. 나는 그 도시에 남기로 결심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나니 그림자가 다시 생긴 채로 도시 밖에서 눈을 떴으며, 거기에 이상함을 느꼈지만 일단은 바깥세상에서 살아가기로 한다. 그 후 원래 직장을 그만두고 도시를 벗어나 Z**시의 도서관 관장으로 지내는 것이 2부의 내용이다. Z**시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고, 도시와 그림자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 도시로 들어가고자 하는 소년을 만나며 여러 사건을 겪던 나는 2부의 마지막에야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그림자가 있는 본인이 진짜인 줄 알았던 나는 사실 원본이 아닌 그림자였으며, 어린 시절 만났던 그녀 또한 도시 안에 있는 그녀의 그림자였다는 사실이었다.


작품의 종국인 3부에서는 나의 귀를 깨물고 도시로 들어오는 데 성공한 Z**시의 옐로 서브마린 소년과 도시 안에 있던 진짜 "나"가 만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소년은 문지기의 안내를 받아 정식으로 도시에 들어온 것이 아닌 이른바 불청객이었고, 그는 나와 하나가 되어 꿈 읽는 이가 되기를 소망했다. 또한 소년은 본래 본인과 내가 하나였다고 말하며, 3부의 후반부에는 나와 소년이 일체화를 이루게 된다. 소년에게 도시 밖의 나(의 그림자)에 대해 듣게 된 나는 이제라도 도시를 나가 자신의 그림자와 하나가 되기를 원하게 되며, 다시금 도시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를 하는 나의 모습을 보여주며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막을 내리게 된다.


3. 작품 내 소재들의 수렴. 불확실함.


도시, 벽, 그림자. 별반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 소재들은 결국 "불확실함"이라는 점을 향해 모여들게 된다. 그럼으로써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완결된다. 이 소재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결국 불확실한 존재 이에 수반되는 번민이다. 도시는 그 존재 자체가 불확실한 곳이며,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벽 또한 그 형태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마치 세포처럼 형태를 바꾼다. 나와 그림자가 도시를 탈출하려고 할 때 벽이 갑자기 나타나 그들 앞을 막지만,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그림자의 말을 듣고 나는 그 벽을 돌파한다. 벽은 실제로 그들의 눈앞에 있었지만, 그들이 벽을 뚫고 지나가려고 하자 마치 액체처럼 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림자는 나의 존재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부여한다. (나는 진짜 원본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그림자인가, 그렇다면 진짜 나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이며 누가 그것을 증명해 줄 수 있는가...) 2부에서 그림자인 나에게 그림자가 있다는 사실 또한 이 고민을 배가시킨다.


세상이 자명하다면 고민은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세상에 불확실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번민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번민은 생의 부싯돌이자 불씨 되어 존재를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변화시킨다. 고인 물은 흐르지 않는다. 불확실한 세상을 바라보며, 잠재된 여러 가능성을 타진해 보며 세상은 움직이게 된다고 생각한다. 작품 속 도시 안의 시계탑에는 바늘이 없고, 도시의 안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영원의 공간이라고 묘사한 것은 실제로 부딪히고 깨지며 흘러가는 세상과 멈춰있는 도시를 상반되게 표현하기 위한 장치 중 하나였을 것이다.


4. 그 의 소재와 인물들


글의 큰 줄기를 이어나간 도시, 벽, 그림자 외에도 작품에는 다양한 소재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중 기억에 남는 것들을 두서없이 남겨보겠다.


꿈 읽는 이

그 도시 안에 있는 도서관에는 책이 아닌 오래된 꿈들이 있었고, 주인공인 "나"는 '꿈 읽는 이'로서 도서관 안에 있는 오래된 꿈을 읽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어째서 책이 아니고 꿈이 도서관에 있었던 것일까? 애당초 사람들의 상상에서 시작되어 만들어진 도시였기에 그들의 꿈이 서고에 차곡차곡 쌓이게 된 것일까? 지식(책)으로 쌓아 올려진 현실세상과 상상(꿈)으로 만들어진 도시의 대비일까?


단각수

그 도시가 현실과는 동떨어진 공간이라는 것을 명시적으로 보여준 소재가 단각수라고 생각한다. 그림자가 없고, 다소 사람들 간 교류가 없고, 입구가 하나뿐인 벽으로 둘러싸여 있더라도 우리와 같은 생김새를 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는 독자가 시각적으로 경험하지 않고 상상하기에는 비현실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도시에 단각수가 살고 있다는 설정은 그 세상의 비현실성을 손쉽게 높여주었다. 상상 속 동물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유니콘이 이미지적 클리셰가 되어 단각수가 살고 있는 도시 자체를 비현실적인 상상 속 공간으로 만드는데 일조한 것 같다.


고야스 씨

2부에서 나(의 그림자)는 Z**시에 도서관 관장을 맡게 되는데, 이때 도서관의 전 관장을 맡고 있던 것이 고야스 씨였다. 고야스 씨는 내가 Z**시와 도서관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며칠에 한 번씩 도서관을 방문하여 여러 조언을 해주지만, 도서관의 다른 직원 분들은 고야스 씨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려하기도 하고 고야스 씨에 대한 말은 왠지 과거형으로 서술된다.

 

도서관장으로 나름 적응해 나가던 어느 날 밤, 고야스 씨는 도서관의 반지하 방(전화선이 없다)에서 나에게 지금 볼 수 있겠냐고 전화를 걸어온다. 그렇게 찾아간 도서관의 문은 잠겨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반지하 방에서 고야스 씨는 나에게 진실을 고한다. 그는 일 년 전에 죽은 사람이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며칠에 한 번씩 실체화할 수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리고 고야스 씨는 자신에게 그림자가 없음을 밝히는데, 그제야 작품 속 나는 그의 그림자가 없음을 깨닫는다.


고야스 씨 등장 전까지의 작품이 현실 세상과 도시 사이의 불확실한 경계에 대해 집중했다면, 고야스 씨의 존재는 이승과 저승, 삶과 죽음의 불확실한 경계에 대한 고민들을 독자에게 제시한다. 일찍이 어린 아들과 아내를 잃고 오랜 시간 홀로 살아오던 고야스 씨는 어느 날 심장발작으로 돌연사했다. 종종 여러 작품에서 귀신이나 원혼은 이번 생에서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미련을 밑거름 삼아 성불하지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 존재로 묘사된다. 고야스 씨의 경우에 그가 이승을 바로 떠나지 못한 것은 도서관에 대한 걱정과 책임감, 애정이었던 것 같다.


고야스 씨는 시편을 인용하며 아래 말을 남긴다. 다시금 그림자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 것, 한평생이래야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


5. 기억에 남은, 좋았던 문장들


서사, 내용과는 별개로 기억에 남았던 문장들을 아래에 남겨본다. 같은 상황, 같은 감정, 같은 생각이라도 어떤 단어와 호흡을 가지고 풀어내느냐에 따라 그 문장의 생명력과 강인함이 천차만별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강인한 문장들을 써 내려가는 작가들을 존경한다.


나는 의자에 앉아 나라는 신체의 우리에서 의식을 해방시켜 상념의 너른 초원을 마음껏 달리게 한다.
침묵을 위한 침묵-그 자체로 완결된 구심적인 침묵이다.
열일곱 살이고, 사랑에 빠져 있고, 그날은 5월의 청명한 일요일이니 당연히 내게 망설임 같은 건 없다.
물론 당신은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무거운 둔기를 닮은 침묵과 무 앞에서 희망이라는 존재의 그림자는 옅다.
가끔 무언가에 실질적으로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건 제법 괜찮은 기분이다.
이 세상은 날로 편리한, 그리고 비로맨틱한 장소가 되어간다.


6. 마무리하며


오랜만에 읽은 장편 소설이었는데, 중반부 이후로는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품에 빠져들 수 있었다. 불확실함을 주제로 이렇게 탄탄하게 글을 써 내려갈 수 있음이 신기하면서도 놀라웠다. 개인적으로는 존재와 생에 대한 다양하고 깊은 고민을 해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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