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문] 콘크리트 유토피아, 엄태화
(스포 有) 가마솥 안 개구리 같았던 콘크리트 아파트 속 주민들
0. 들어가기에 앞서
포스트 아포칼립스 상황 속 한정된 공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대립을 한국을 배경으로 잘 풀어낸 군상극이었다. 기차 이동 시간을 때울 요량으로 넷플릭스에서 볼 영화를 찾다가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예상보다 꽤나 만족스러웠다. 이에 아래에 나름의 감상을 남겨본다.
1. 작품의 배경. 아파트라는 존재의 무게.
본 작품은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서울 지역을 배경으로 하며, 그 사태를 겪은 후 유일하게 무너져 내리지 않은 황궁아파트와 그곳에 살던 주민들이 작품의 주연을 맡아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인류가 대처할 수 없는 대재앙, 한정된 시공간/물질 자원 하에서 사람들이 겪는 갈등이라는 플롯이 기존의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크게 차별화되지는 않지만, 작품의 배경이 되는 황궁아파트의 설정이 한국 관객을 대상으로는 매우 적절했던 것 같다.
황궁아파트는 옆에 있던 드림 팰리스처럼 최고급의 아파트는 아니었지만 아랫 단계에서는 쉬이 올라오기 힘든, 소위 말하는 중산층 정도의 사람들이 살아가던 아파트였다. 작품 속 주민회의에서 한 가족은 다리 건너 빌라에서 이곳으로 이사오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고 말하며, 살아남은 황궁아파트의 주민들이 외부인들에 대해 언급할 때 드림 팰리스의 주민들에게 괄시당했던 과거 상황들을 언급하며 혀를 차기도 한다. 작품의 주된 화자인 민성(박서준)과 명화(박보영)는 대출을 받아 이 아파트에 입주했다. 작품의 또 다른 화자이자 폭풍의 핵인 세범(이병헌)은 황궁아파트에 입주하고자 전 주인이었던 영탁(박종환)에게 집을 구매하려다 사기를 당하고 분노하여 영탁의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그를 죽이고 본인이 영탁의 신분을 가지고 살아간다.
각자의 사정은 다를지라도 그들에게 있어 황궁아파트라는 존재는 뼈에 사무칠 만큼 절박한 공간이자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큰 부분이었다. 그런 공간이었기에 대지진을 겪고도 우뚝 서있는 황궁아파트는 그들에게 있어 천운 그 이상의 존재로 다가왔을 것이고, 아파트를 구심점 삼아 자연스레 모이게 되었을 것이다. 똑같은 상황에 마트나 회사 건물 등 다른 곳이 배경이었더라도 나름의 이야기는 나올 수 있었겠지만 절박함과 집단의식은 덜했을 것이다. 작품 초입에 establishing shot으로 역사와 함께 발전해 나가는 아파트의 모습들을 보여주는데, 작품의 배경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좋은 도입부였다고 생각한다.
2. 작품의 전개 방식과 소재. 가치판단.
대지진 이후의 황궁아파트 주민들이 생존해 나가는 과정과 이때 벌어지는 갈등들이 본 작품의 주된 소재이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주민대표에 오른 세범을 주축으로 한 아파트 내 작은 사회에서의 가치판단 및 갈등, 아파트 주민과 외부인들 사이의 알력다툼 및 갈등, 민성과 명화의 가치관 차이에 의한 갈등 등 주어진 상황에서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갈등들이 모여 하나의 작품으로 구성된다. 모든 이야기와 인과가 유기적으로 얽혀있는 느낌보다는 생존이라는 대전제를 큰 줄기로 놓고 세부 에피소드들을 나열한 옴니버스 형식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이야기들이 뚝뚝 끊어져 보였던 것은 아니고, 스토리보다는 사건 및 상황 중심으로 작품이 흘러갔던 것 같다.
위의 다양한 갈등들은 결국 아래의 두 방향으로 귀결된다.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아파트 내부인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이기적이지만 합리적인 선택이 전자, 내부인/외부인 관계없이 모두 함께 살아남자는, 공도동망 할 수 있는 박애주의가 후자이다. 전자와 후자 중 정답은 없다. 이 둘은 누가 얼마나 잃고 양보할 것인지를 골라야 하는 차악을 골라내는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악이 불분명하고 정의 내리기도 모호한 갈등은 직접 마주했을 때는 고역이지만 작품 측면에서는 효과적인 방식이 될 수 있다. 양측의 입장이 균형 있게 합당하다면 창작자는 관객들에게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하며 작품의 몰입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칫 잘못하면 이도저도 아닌 결말의 작품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3. 주민대표 세범의 기구한 역할
생존과 존엄 사이에서 갈등하던 주민들의 구심점이자 일종의 면죄부가 되어준 것이 바로 주민대표 세범이다. 외부인을 내쫓아야 할지에 대해 주민들은 회의를 진행하지만, 누구 하나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민성의 의견으로 주민대표를 뽑게 되고, 일전에 아파트 1층에 화재가 났을 때 거리낌 없이 뛰어들어간 세범이 주민대표로 선출된다. 그리고 세범과 부녀회장 금애(김선영)의 진행 하에 외부인 퇴출 투표가 진행되고, 압도적인 표차이로 외부인 퇴출이 결정된다. 이후에도 외부인의 저항에 피를 흘리며 저항하는 그의 모습은 마을 주민들을 감화시키고 그의 입지는 나날이 올라간다. '불'과 '피'라는 두 개의 강렬한 이미지가 그를 주민들에게 각인시킨다.
이후에도 외부인에 대한 의견이나 식량 배급 등 다양한 갈등과 불만들이 생기지만, 이미 세범은 무소불위의 존재가 되어버렸고 그의 의견대로 아파트 내의 모든 일들이 진행된다. 모든 것이 아파트 집단을 우선으로 결정되며, 그 과정에서 외부인을 옹호하고 몸이 약해 방범대에서 빠진 도균은 자연스레 아파트 사회에서 배제당한다. 이미 세범에게 감화되다시피 그를 신봉하는 아파트 주민들 또한 그를 외면하며, 끝내 그는 이 상황을 뒤집지 못하고 죽음을 택하고 만다.
이 상황을 뒤집어놓은 것은 외부에서 들어온, 진짜 영택의 옆집 이웃이었던 혜원(박지후)이다. 아파트 내부의 인원들은 이미 눈앞에 주어지는 하루하루의 생존에 눈이 멀어 작금의 상황의 심각성이나 이상함을 인지하지 못하지만, 외부에서 온 객관적 관찰자인 혜원이 바라보기에 아파트 내부의 사회는 명백히 이상했고, 심지어 진짜 영택도 아닌 사람이 본인을 영택이라 칭하며 주민대표를 맡고 있는 것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명화는 혜원과 함께 진실을 파헤쳐가고, 영택의 집에서 영택의 시체와 신분증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야 아파트 주민들은 세범이 영택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이후의 전개 과정이 세범에게는 너무나 가혹했다. 지금까지 주민대표로 칭송하며 그를 떠받들던 주민들은 일순간 그에게서 돌아선다. 물론 그가 영택을 죽이고 그의 행세를 한 것은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나, 실적으로만 보자면 그는 지금까지 아파트 내부 사회를 비교적 훌륭히 이끌어왔다. 하지만 일순간 소속감이 사라진 세범을 마을 주민들은 배척한다. (이때 외부인이 단지 내부로 침입하는데, 이 침입을 조금 뒤로 미루고 단지 내 주민들 간의 갈등을 더 풀어냈어도 흥미로웠을 것 같다.) 그럼에도 세범은 끝까지 외부인으로부터 아파트를 지키며, 끝내 자신의 집이었어야 할 영택의 집에 들어가 생을 마감한다.
작품 속 세범의 인생은 너무도 기구했다. 아파트 사기를 당해 황궁아파트의 주민이 되지 못한 그는 끝내 영택을 죽이고 살인마가 되었으며, 이후 어찌어찌 주민대표가 되어 아파트를 위해 헌신했지만 끝내 본인의 집이 되지 못한 그 아파트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물론 그의 행동들이 도덕적으로 옳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행동들은 아파트 전체의 존망 측면에서 보자면 차악, 차선의 선택들이었지만 면면이 들여다보면 다소 폭력적이거나 감정적이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처음 주민대표가 되었을 때는 다소 소극적이었던 그는 점차 아파트를 위한 주민대표라는 자리에 감화되었던 것 같다. '아파트 만세', '아파트는 주민의 것'처럼 구호를 외치는 그의 결연한 태도가 대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이유 없는 무덤은 없다는 말처럼, 민성, 도균, 세범 등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만큼 감독이 '타당해 보이는' 설정들을 잘 배치해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4. 디테일한 연출과 구성들
작품의 전체적인 메시지도 좋았지만, 기본적인 연출이나 구성도 탄탄했던 작품이었다. 기본적으로는 한국적 미장센을 참 잘 구성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파트 내부의 전경이나 소품들, 복장 등 실제로 한국에서 재난이 발생했을 때의 상황을 상정하고 소품들을 세심히 준비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품 중간에 세범과 주민들이 아파트 보수를 하며 각 시설들을 소개하는 부분이 있다. 마치 홍보영상을 찍는 것처럼 행복한 배경음악과 희망찬 말투로 음식, 방범, 의료 등 자신들이 구축한 작은 사회를 소개하는 그들의 모습은 해맑지만, 전체적으로는 옛날 시절의 사회 부흥 운동 선전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힘든 상황을 무시하고자 억지 미소를 짓는 사람들을 보는 것만 같아서 보는 입장에서는 안타까움이 더 컸던 것 같다. 이와 반대로 처절하게 시설들을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과정을 우울한 음악과 함께 보여줬더라면 그냥 끄덕끄덕하며 적당히 상황에 공감하고 끝났을 것 같은데, 되레 밝은 모습으로 절망적인 상황을 소개하는 것이 임팩트가 더 컸던 것 같다.
민성과 명화는 현재의 상황에 대해 반대되는 입장을 보여준다. 민성은 타인보다는 우선 자신과 명화의 생존이 우선이며, 이를 위해서는 외부인을 내보내거나 타인을 다치게 하고 죽이는 것에도 동참한다. 하지만 명화는 기본적으로 사람들 간의 차별을 두지 않고 모두 같이 살아남기를 소망한다. 그녀의 직업인 간호사가 이와 같은 성격과 가치관을 대변해 준다. 민성은 방범대장으로서 아파트 내부 주민과 명화의 생존을 우선시한다. 외부인인 주몽과 주몽의 어머니를 집으로 받아준 것은 명화이며, 어렵게 구해온 황도를 둘이서만 먹자고 하는 민성을 앞에 두고 명화는 아이와 어머니와 같이 먹자고 제안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민성과 명화의 모습이 작품의 후반부에 병치되어 표현된다. 민성은 음식을 찾아 무너진 건물의 좁은 구멍으로 푸드코트를 향하며, 명화는 현재의 상황에 회의감을 느끼고 진실을 밝히고자 혜원의 집에 가서 베란다를 부수고 그 틈으로 영탁의 집으로 들어간다. 결국 민성은 음식을 발견하고, 명화는 김치냉장고 속에서 영탁의 시신을 발견한다. 각기 다른 목표를 가지고 본인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비슷한 장면으로 병치되어 표현되는 것이 직관적으로 잘 보였다.
도균이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후, 주민들은 외부인이 시체를 가져가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로 도균의 시체를 불태운다. 이를 바라보던 주민들은 갑자기 아파트 외벽 언덕 쪽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는 것을 보고 그곳으로 향하여 기쁨을 나눈다. 타들어가는 불 속 시체와 터져 나오는 물, 물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 대비되어 장면이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연출을 위해 스토리가 다소 이용된 감이 있지만 장면 자체의 임팩트는 좋았다.)
작품의 마지막 순간, 아파트를 탈출한 민성과 명화는 정체 모를 건물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잠을 청하지만 다음날 민성은 눈을 뜨지 못한다. 스테인드 글라스 아래에서 빛을 받으며 죽어간 장면의 이미지가 강렬했다. 이후 명화는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그들의 거처로 함께 가게 된다. 그들이 있는 곳은 한눈에 보기에도 넓고 으리으리한, 하지만 쓰러져 90도가 돌아가 있는 아파트였다. (정황상 드림 팰리스가 아닐까 싶다.) 그곳에서 그들은 아무 조건 없이 명화를 받아주고, 주먹밥을 건넨다. 쓰러지지 않은 황궁아파트의 사람들보다는 쓰러진 건물에서 살아가는 그들이 더 정상적이고 인간적이었다. 이를 아파트의 시설 차이와 90도 차이로 시각적으로 보여준 것이 직관적이었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명화와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이 점점 작아지며 앵글이 확대되는데, 이렇게나 작은 공간 속에서 이토록 수많은 갈등들이 일어났구나 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창백한 푸른 점인 지구를 우주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다.
5. 마치며
근래에 봤던 재난영화들 중에서는 꽤나 강렬하게 기억에 남은 작품이었다. 소재, 연출, 구성 등 기본기도 전반적으로 탄탄했다. 다만 표현하고자 했던 바가 어느 정도 명확한 만큼 스토리 전개 과정이나 속도가 이에 끌려가는 느낌도 조금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매 장면들이 주는 임팩트가 강렬하기에 한 번쯤은 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