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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렁 Apr 06. 2024

MP3의 시대에 자라나 CD를 구매하는 사람

물질적 음악 덕질을 해나가는 나날

격동의 21세기 초반을 거쳐오며

음악, 영화, 그림 등 당대의 예술은 그 시대에 우세한 기술을 통해 전파되기 마련이다. 1994년생인 필자의 유년기는 MS-DOS와 플로피 디스크, 카세트테이프의 끝자락쯤에서 시작되었다. 유치원 즈음에는 부모님과 노래방에 가서 부른 노래들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오기도 했고, 아버지가 일할 때 쓰시던 PC에서 '위험한 데이브' 같은 PC 본체에서 버저 음이 울리던 게임을 하기도 했다.

1990년 MS-DOS 용으로 출시된 '위험한 데이브(Dangerous Dave)'

그렇게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윈도우와 플로피 디스크, CD를 두루두루 접하면서, 한컴 타자연습에 매진하면서 파워포인트와 한글, 포토샵 같은 프로그램들을 배우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참으로 격동의 시기였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기술 모두 아직 포화되지 않고 급격한 경사를 그리며 성장하던 당시에는 아이리버와 삼성 옙, 코원, 애플 등 여러 회사들이 128mb, 256mb 용량의 MP3를 가지고 자웅을 겨루기도 했고, MP4, PMP, 넷북, 전자사전 등 지금에 와서는 스마트폰과 태블릿 정도로 통합된 다양한 기계장치들이 물밀듯 생겨나고 또 사라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흥미로웠던 혼세의 역군들은 결국 iOS과 안드로이드 장치들이 주류로 자리 잡게 되면서 대부분 이들 생태계에 통폐합되었고, 개중에 특화된 성능이나 편의성을 가진 장치들만 이 급류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남아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카메라/음향 장비가 전자, 이북리더가 후자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좌측부터 아이리버 클릭스 플러스(MP3), 아이리버 딕플 D31(전자사전), 코원 V5(PMP)     [출처 : 다나와]

위의 두 가지 사례를 벗어난 사례가 LP 플레이어와 필름 카메라겠구나 싶다. 이들 장비의 성능이 현대의 장비보다 부족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나, 이 두 장비는 낮은 해상력이 가져다주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이 무슨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은 열화 된듯한 해상도와 낮게 깔리는 치찰음은 당대 LP와 카메라를 겪었던 사람들에겐 향수를, 당대에 이 장치들을 갖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늦게나마 소유에서 오는 기쁨과 성취를, 당대를 겪지 못한 현대의 사람들에게는 간접적으로나마 과거를 엿볼 수 있는 창의 역할을 해준다.


음악과 사람을 연결하는 물질적 매개체들

컴퓨터로 음악 파일에 일일이 가사 자막을 입혀서 MP3 플레이어에 고이 담아 음악을 듣던 당시에 보더라도 소니의 워크맨을 허리춤에 차고 CD로 음악을 듣는 것도 당시에는 먼 과거의 이야기 같았다. 당시에는 음질과 장비에 대한 욕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음악만 제대로 나오면 괜찮았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장비라고 해봐야 젠하이저 mx400, 돈이 조금 많으면 소니의 e888, 뱅앤올룹슨 A8 정도의 이어폰 정도만 머릿속에 있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mx400 번들 이어폰을 두세 번 사서 썼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당시 기준으로도 2~3mb로 꾸역꾸역 압축해 낸 MP3 포맷의 파일과 CD 원본 파일의 음질은 하늘과 땅 차이였겠구나 싶다. (아는 만큼, 볼 수 있는 만큼 보이기 마련이니 말이다.)


젠하이저의 'mx400' 이어폰. 지금 생각해 봐도 가격 대비 음질이 썩 좋았다.

내가 음악 장비, CD에 대한 실질적 접점을 가지게 된 것은 CD와 MP3의 시대에서 조금은 물러난 20대 중순쯤이었는데, 시기적으로 경제적 선택권과 자유가 조금이나마 생겨날 무렵이었다. 큰맘 먹고 혜화나 압구정에 있는 청음 매장에 가서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사기도 하고, 중고서점에 가서 예전에 좋아했던 가수의 앨범을 사기도 했었다. 처음으로 구매했던 그럴듯한 장비는 슈어(SHURE)에서 나온 SRH440 헤드폰이었고, CD는 넬의 'walk through me' 앨범이었다. 헤드폰은 특유의 모나지 않은 탄탄함과 어느 정도의 공간감이 좋았었고, 넬의 저 앨범은 아직까지도 앨범의 수록곡 몇 곡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앨범에 수록된 모든 노래를 좋아한다.

넬(Nell) 2집 'Walk Through Me' 앨범.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 후로 취직하여 진정한 경제적 독립을 이뤄낸 후에는 장비와 물질적 요소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졌다. 물론 그렇다고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어내 올인을 할 정도의 담력과 재력은 없었기에 소소하게나마 장비를 늘려갔다. LG V40에 탑재된 DAC로 음악을 들어보기도 하고, 이후에는 흔히 말하는 꼬다리 DAC도 사보고, 어린 시절 써보지 못했던 B&O A8도 중고로 사서 써보고, 이런저런 이어폰도 한두 개 사보고, 이전에 샀던 헤드폰의 다음 버전인 SRH840A도 사보고, PC에 연결해서 사용하는 Fiio의 DAC도 사보고 하면서 지금에 와서는 이런저런 소비 인생을 나름대로 즐기고 있다.


CD라는 존재가 가져다주는 것

위의 장비들을 사는 것은 조금 더 좋은, 만족스러운 음질을 경험해 보기 위해서인데 필자에게 있어 CD를 구매하는 것은 이와는 조금 다른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 위처럼 장비들을 하나하나 사모으는 것이 발전된 기술을 통한 성능적 개선에 의의를 두고 있다면, 개인적으로 CD를 구매하는 이유는 그것보다는 LP와 필름 카메라를 구매하는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CD는 나에게 있어 '음악과 거기에 얽힌 추억들을 실재하는 물질을 매개체 삼아 소유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해주는 존재'로서 기능하고 있다.


기술의 발전과 디지털화는 어디에서나 별다른 불편함 없이 음악에 접근하고 새로운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해 주었지만, 이와 같은 아카이브 형식의 음악 감상은 각각의 노래들이 우리의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낮출 수밖에 없다. (개별 객체와 전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비단 음악만의 사례는 아닌데, 넷플릭스를 켜고 무엇을 볼지 고르다가 정작 아무것도 고르지 못하고 앱에서 나오는 것도, 이북리더를 들고 읽을 책을 고르다가 결국 고르지 못하고 집에 남아있던 읽었던 종이책을 집어드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겠다.) 언제나 그 대상에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그 존재에 대해 가지는 절실함을 줄인다. 풍요롭기 때문에 개별 객체에 대해서는 빈곤해지는 것이다.


위와 같은 풍요로움 속에서 추억을 기억하기 위한 매개체로 나는 CD를 선택하였다. 존재에 대해 깊은 수준의 성찰을 할 수 있을 만큼 정신적으로 성장하지는 못했지만, 손에 잡을 수 있는 물질적 존재가 눈앞에 존재하는 것은 그렇지 못한 존재들과 확실히 다른 인상을 준다. 이 물질세계에서의 접점은 이윽고 그 음악을 듣던 시간, 기억과 나를 이어주는 매개체이자 마중물 역할을 착실히 수행해 준다. 사람의 감정과 기억은 좋든 싫든 휘발되고 사라지기 마련인데, 이런 매개체는 기억의 증발을 조금이나마 뒤로 미루어주기도 한다.



마무리하며

구구절절이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이런저런 기억과 사견들을 풀어놓았는데, 실로 즐거웠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의 발자취를 좁게나마 생각해 볼 수 있어서 재미있었고, 또한 나름대로 생각의 정리가 된 것 같아 기쁘다. 앞으로도 물질적 음악 덕질은 차근차근 계속될 예정이다.


(덧. 글의 커버 사진은 지난주에 신나게 구매한 한로로의 이상비행 앨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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