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상을 착실하게 지켜나가고 있는 영웅인 나 자신
2024년 8월 14일에 극장에서 영화 <데드풀과 울버린>을 보고 왔다. MCU의 열렬한 팬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여러 작품을 챙겨보기도 했었고, 엑스맨과 울버린에 대한 작품들도 여럿 관람했었다. 특히 울버린의 마지막 작품이었던 <로건>은 개인적으로는 정말 재밌게 봤었다. 이런저런 배경을 끌어안고 보았던 데드풀과 울버린은 흥과 망의 딱 중간쯤에 위치한 영화였다. 그렇게까지 울림이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의 매력 포인트는 선명했던 작품이었기에 아래에 감상을 남긴다.
줄거리(출처 : 네이버 영화)
히어로 생활에서 은퇴한 후, 평범한 중고차 딜러로 살아가던 ‘데드풀’이 예상치 못한 거대한 위기를 맞아 모든 면에서 상극인 ‘울버린’을 찾아가게 되며 펼쳐지는 도파민 폭발 액션 블록버스터
본 작품의 주된 갈등이 되는 사건은, 데드풀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선의 중심인물인 로건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세계선이 멸망하게 된 일이다. 데드풀은 TVA(시간관리국)로 불려 와 패러독스라는 요원에게 이 사실을 듣게 되고, 본인의 세계선이 아닌 다른 세계선에서 자신들과 함께 일해줄 것을 제안받지만 그는 이를 매몰차게 거절하고 그의 장비를 훔쳐 다른 세계선으로 달아난다. 그리고 본인의 세계선이 멸망하게 된 원인인 로건의 죽음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세계선에서 로건을 찾아 자신의 세계선으로 데려가고자 한다. 그런 과정에서 여러 멀티버스의 로건을 만나고, 10 번째로 만난 것이 본 작품에 등장하는 로건이다. 이후의 스토리는 데드풀과 울버린이 우여곡절을 겪으며 데드풀의 세계선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풀어낸다.
배경 설정과 선후관계 등은 어느 정도 납득할 만 하지만, 역시 데드풀 영화인 만큼 이에 대해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사건과 관객에 개입하는 장면들이 등장하는 것이 인상 깊다. 다른 영화나 배역이었다면 이와 같은 직접적인 방식이 조금 낯설고 무리하게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 데드풀이라는 캐릭터성이 여기에서 생길 수 있는 이질감을 많이 중화시켜 주었다. 이런저런 전후상황에 대한 서사, 세계선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는 과정 등을 정공법으로 풀어나가려면 꽤나 많은 노력과 러닝타임 소모가 필요했을 텐데, 데드풀이 직접 TVA로 소환되어 요원과 대화를 나누고, 요원의 장비를 뺏어 본인이 직접 여러 세계관을 누비며 로건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이 과정을 꽤나 간결하게 풀어낼 수 있었다. 현시점 로건에서 아름다운 최후를 맞이했던 울버린을 어떻게 다시 등장시킬 것인지, 여러 세계관이 존재하는 멀티버스 세계관에 대해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지에 대한 해답을 데드풀은 본인이 직접 발로 뛰면서 만들어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데드풀이라는 캐릭터성이 꽤나 매력적이다.
액션, 대사 등 작품의 순수 재미요소들도 좋았지만, 개인적으로 기억에 가장 깊게 남은 것은 기저에 깔린 인물들의 심리였다.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특히 보이드에 모인 데드풀과 울버린, 그리고 저항군들은 각자 나름의 결핍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자신의 세상에서 결말을 맺지 못하고 보이드로 끌려온 저항군들, 졸지에 본인의 생일파티에 TVA로 끌려와 세상이 멸망할 상황에 놓였다는 것을 알게 된 데드풀, 자신의 과오로 인해 동료들과 함께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로건. 이들이 소망한 것은 세상을 선한 방향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구국적이고 대의적인 의지라기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세상을 조금이나마 구원하는 것이었다. 어벤져스가 되고자 하였으나 문전박대당한 데드풀의 처지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데드풀이 어벤져스가 되지 못했다고 하여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한 것은 아니었고, 그는 결국 여러 사람들의 희생과 함께, 울버린과 함께 본인의 세상을 구해내는 데 성공한다. 물론 그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 전체를 구한 것(그 세계선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몰랐을 수도 있지만)도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로 그에게 있어 더 큰 의미를 가져다준 것은 본인에게 있어 전부였던, 생일날 함께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 속 친구들을 지켜냈다는 점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점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세상을 구원한다는 거창한 의도도 물론 좋은 것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본 작품에 등장한 인물들이 자신의 의지로 본인들의 세상을 개척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점이 인상 깊었다. 본인들의 세상에서 결말을 맺지 못한 저항군들은 종국에는 본인들의 의지를 가지고 카산드라에 맞서며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고, 데드풀은 자신의 세상, 폴라로이드 사진 속 사람들을 구해냈고, 로건 또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주저앉아있던 과거에서 벗어나(X-23, 로라의 응원과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각자에게 주어진 세상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다. 새로운 하루에 눈을 뜰 수 있었다는 것은 어제의 내가 주저앉아 좌절하지 않고 앞으로 한 발짝이나마 나아갔다는 것의 방증이다. 보이드에 갇혀있던 이들이 본인의 의지를 갖고 나아가는 모습은 현실의 우리가 하루하루를 견뎌내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굳이 거창하고 창대할 필요까지도 없다.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에 담긴 자신의 세상을 지켜낸 데드풀처럼, 우리 또한 각자가 감당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의 세상을 착실히 지켜내며 나의 세상을 지켜나가고 있는 영웅인 것이다.
명불허전이라는 말처럼 데드풀은 여전히 데드풀이었다. 전체적인 서사 자체가 매끄럽고 치밀하진 않지만, 그 또한 데드풀이 보여줄 수 있는 강점처럼 비쳤다. 날것 그대로의 매력이 꽤나 인상 깊었고, 역시 선을 넘을 거라면 아예 확 넘어야겠다는 생각도 들게 하는 작품이었다. 나름대로는 이런저런 생각도 해볼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앞으로도 MCU에서 흥미로운 영화가 많이 나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