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기에 앞서
터부(Taboo) 시 되는 정치/사회적 역린 같은 이야기들이 쉴 새 없이 돌풍처럼 몰아치던 작품이었다. 전개 속도와 연출, 서사의 인과, 배우들의 연기가 전반적으로 탄탄했고, 내용 또한 언중유골(言中有骨)이라 할 만큼 시사하는 바가 많았던 것 같다. 아래에 나름의 감상을 남긴다.
1. 기본적인 구성과 서사의 흐름
"돌풍"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12부작 드라마로, 현대의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한 대체역사물이자 정치 픽션이다. 작품은 부패한 정치인을 대변하는 정수진(김희애), 이들 뒤에 암약하여 국정을 쥐고 흔드는 대진그룹 회장 강영익(박근형), 그리고 이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돌풍'을 자처한 박동호(설경구) 사이의 알력다툼과 갈등을 연료 삼아 불타오른다. 그리고 이 갈등의 구심점에 위치한 것이 대통령의 자리이다. 실제로 작품은 국무총리였던 박동호가 대통령 장일준(김홍파)을 시해하며 막이 오른다.
권력의 정점에 선 자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서사는 카이사르와 브루투스 이후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어 왔으나, 본 작품에서 박동호의 견지는 다른 경우들과 궤를 달리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더 큰 무력으로 타인을 굴복시키거나, 본인의 범죄를 최대한 숨기는 것이 가장 보편적으로 선택되지만, 박동호는 제3의 선택지를 골랐다. 처음부터 박동호의 목적은 권력 찬탈이 아니었고, 다만 그는 자신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필요했던 권력을 일시적으로 빌리는 선택을 했다. 그는 자신이 성공한다면 그 미래에 자신의 자리는 없음을 그 누구보다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고, "나는 떠난다. 남겨질 것들을 위해서."라는 말을 남긴다. 그렇기에 그는 비서실장이었던 최연숙(김미숙)에게 본인이 대통령을 시해했음을 녹음한 보이스펜을 건네기도 했고, 마지막 순간에는 국민의 앞에서 장일준 대통령 시해 사실을 고하기도 한다.
그 자신이 돌풍이 되어 이 모든 부정한 것들을 휩쓸어버릴 수 있다면, 부당하게 죽은 서기태(박경찬)의 유지를 이뤄낼 수만 있다면 박동호에게 있어 자신의 목숨을 포함한 그 외의 것들은 어찌 되어도 좋았다. 이 지독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목표를 향한 광기 어린 집념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2. 변주와 반복이 이어지는 전개
본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이 있다면 바로 '반복'인데, 크게는 인물 간 역할과 관계의 반복, 그리고 대사의 반복이 있다. 우선 전자의 경우, 박동호와 정수진, 강영익을 포함한 작중 인물들은 서로의 사냥꾼과 사냥감이 되는 것을 지속적으로 반복한다. 감옥,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 대행, 대선 후보 등 각 지위와 위치에 인물들이 반복적으로 배치된다. 그리고 이들 간의 대화는 서로 꼬리물기식의 반문이 이어지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한 인물이 A를 주장하면, 상대방은 A를 A'로 변주하여 반문한다. 일례로 박동호의 약점을 잡은 정수진은 박동호의 고삐를 잡았다고 강영익에게 고하지만, 강영익은 고삐는 정수진이 쥐되 자신은 채찍을 쥐어야겠다고 정수진에게 말한다. 이 순간 고삐는 정수진에게 권력을 부여했던 권력의 도구에서 본인의 의지 없이 수동적으로 말을 이끌어야 하는 마부에게 지워진 짐이자 족쇄로 그 의미가 바뀐다. 또 다른 시점에서 박동호와 정수진의 대화 중, 정수진은 왜 뒤로 물러나주지 않느냐고 박동호를 다그치지만, 박동호는 처음부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는 듯 '자신의 뒷걸음이 당신에게는 진격으로 보일 뿐'이라고 반문한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강상운을 조종하려는 정수진이 귤을 까서 강상운에게 주며 자신이 주는 것만 먹으라고 하는데, 이후 입장이 바뀐 강상운과 정수진의 남편 한민호(이해영)의 사이에서는 강상운이 계란을 까서 한민호에게 먹으라고 건넨다. 인물 사이의 관계를 보자면, 신한당의 조상천 의원은 과거 운동권 시절의 정수진을 고문했는데, 이 악연은 현재까지 이어져 그들 사이의 관계를 더 고조시키기도 했다. 정수진을 고문할 때 조상천은 라이터를 딸깍거리며 여닫았는데, 이후 박동호가 정수진을 압박하는 대화를 할 때 라이터 소리를 낸다. 박동호가 의도했는지, 과거의 사실을 알고 이와 같은 행위를 한 것인지는 불명확하나 이 장면에서는 라이터를 매개체로 정수진의 과거와 현재가 반복되었다.
이와 같은 반복과 변주는 연출적으로도 좋았지만, 본 작품이 정치극이라는 것을 감안하고 생각해 보면 꽤나 효과적인 장치였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사람과 지위가 바뀔 뿐, 역사는 지독하게도 반복된다는 사실을 이와 같은 전체적인 구성과 대화를 통해 나타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이 부패와 권력의 연쇄를 끊어내기 위해 정공법이 아닌 파괴적 돌풍이 필요했던 것이다. 체제 하에 귀속된 존재는 그 체제를 뒤엎을 수 없다. 대지에 선 자가 대지를 뒤집을 수는 없다. 그렇기에 박동호는 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반복이라는 요소가 돌풍, 박동호라는 인물의 당위성과 의미를 더 강조해 주었다.
3. 문장들
돌풍에 등장하는 이들의 대화는 가벼운 일상체보다는 만연체, 사극이나 연극 같은 느낌에 더 가까웠다.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대사에 많은 공을 들였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 아래에 기억에 남았던 장면과 대사를 남겨본다.
당신이 만드는 미래가 역사가 되면 안 되니까
내가 한 일 그들도 할 수 있다는 걸 (박동호와 정수진의 관계)
(대사는 아니나, 커피에 설탕을 듬뿍 담아 영부인에게 건네며 회유하는 박동호의 모습에서 감언이설을 시각적으로 직유 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나라에 빛은 없습니다. 어둠이 더 짙은 어둠에 맞서며 스스로 빛을 참칭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왼쪽의 어둠을 걷어내고, 오른쪽의 어둠을 부수고 새로운 빛을 만들겠습니다. (박동호의 의지가 강하게 나타나는 표현)
적벽대전의 공명은 적의 화살을 얻어 승리했다 (강영익의 힘을 빌리는 박동호)
세상 문제 절반은 사람을 믿어서 생기는 것이라고 말하는 정수진.
지금 너의 침묵은 시인이니? (진실을 고하라고 박동호에게 말하는 이장석)
정수진과의 대화를 마치고 남은 술은 자신이 마시겠다는 한민호 (이후 한민호는 모든 과오를 안고 자살했다)
홍어, 과메기, 취두부. 냄새나는 건 자신이 먼저 먹겠다고 이장석에게 말하는 박동호.
연숙과 정연을 사건에서 분리시키려던 박동호. 연숙을 베드로로 칭하며 함께 순교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연술은 십자가에 함께 매달리겠다고 말한다. 연숙은 이후 우리 이후에 남아야 할 것들을 방주에 태우겠다고 말한다.
나는 떠난다. 남겨질 것들을 위해서 (박동호의 의지)
장례식은 최고의 정치적 이벤트죠 (정수진의 대사. 참혹한 진실)
4. 마무리하며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와 타당한 고민의 갈래가 많은 작품은 흥미롭기 마련이다. 개인적으로는 꽤나 강렬한 인상의 작품이었다. 한국에서 정치 픽션으로 이보다 날것으로, 이보다 더 강렬하게 작품을 만들어내긴 쉽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