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약과 진화의 화신(化身) 루시
'라플라스의 악마'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원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고 있다고 가정한 가히 악마에 가까운 존재이며,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기계 장치로 무대에 내려온 신이라는 뜻처럼 모든 문제를 단박에 해결하는 편리주의적 방법론으로 남용된 존재이다. 이와 같이 인류의 능력을 아득히 넘어선 절대자는 그 존재 자체가 대전제를 벗어난 모순적 모습을 띠나, 그와 동시에 현시대의 존재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모순이 필수불가결하다. 2차원의 세상에서 도약하기 위해서는 3차원의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고, 3차원의 세상에서 다른 3차원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 높은 차원에 도달해야만 한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을 대전제를 <루시>라는 작품은 가시적인 상황과 전제를 바탕으로 하여 관객이자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인류(관객)에게 제시한다. 아래에 이에 대한 감상을 남긴다.
작품은 '루시(스칼렛 요한슨)'라는 인물이 전 남자친구의 부탁으로 '미스터 장(최민식)'에게 서류가방을 전달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 전개는 각 생물과 인류가 뇌를 사용하는 비율과 각 조건에서의 상황에 대한'새뮤얼 노먼(모건 프리먼)'의 뇌과학 강연과 병치되어 관객에게 제시된다. 미스터 장은 루시가 가져온 서류가방 안에 들어있던 'CPH4'라는 일종의 마약을 루시를 포함한 네 명의 뱃속에 숨겨 세계 각지로 운반하여 판매하고자 했다. 그러나, 루시가 구금되어 있던 중 간수 역할을 담당한 사내에게 배를 걷어차이게 되면서 이 마약이 루시에게 주입된다. 그런데 마약이라고 소개되는 이 물질은 실제로는 임신한 산모가 태아를 위해 생성하는 극소량의 물질이었고, 미스터 장은 이 물질을 인공적으로 합성해 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작품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위 물질이 루시에게 흡수되면서부터이다. 본래 태아의 성장을 위한 물질이었던 CPH4는 루시의 체내에서 강력하게 작용하며 루시의 뇌내 가용비율을 점차 높이게 되고, 루시는 점차 세상의 모든 존재를 이해하고 조종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소량의 물질을 투여한 루시의 육신은 이를 감당하지 못했고, 결국 그녀는 다른 운반책들이 가진 모든 CPH4 물질을 수거하여 자신에게 투여하고자 움직인다. 물론 미스터 장 또한 이 상황에서 마냥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니나, 루시의 상식을 초월한 능력 때문에 사실상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한다. 그렇게 새뮤얼 노먼과 그의 연구팀을 만난 루시는 남은 물질을 모두 자신에게 투약하고, 그녀 자신이 깨달은 세상에 대한 지식과 섭리를 USB 형태로 노먼에게 건네며 자신의 육신은 이 과정에서 소멸하게 된다.
루시의 복장과 행동이 각 시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작품의 도입부에 루시는 표범 무늬의 의상을 입고 있지만,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뇌의 활용 비율이 높아지며 의상이 단조로워진다. 그리고 그녀의 존재가 세상으로 발산하며 사라지는 순간엔 그녀의 몸이 흑색으로 뒤덮인다. 작품의 전개 과정에서 루시의 뇌 활용률을 %로 보여주기도 하나, 루시의 외견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녀의 말투와 행동 또한 점차 인간성을 잃어가며 딱딱해진다는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사람의 목숨에 대해 가벼이 언급하거나 마치 인공지능처럼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 이를 엿볼 수 있다. 어느 면에서는 게임 '포탈'의 인공지능 로봇 '글라도스'의 어투가 연상되기도 했다.
루시는 뇌를 일정 비율 이상 사용하게 되면서 깨우치게 된 사실들을 노먼과 연구팀 인원들에게 전하는데, 그중 시간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작품의 결말부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질주하는 자동차를 예시로 들어 설명하는데, 자동차의 속도가 무한대에 도달하면 그 자동차는 사라져 버린다고 설명한다.(더 이상 관측할 수 없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 자동차의 존재를 무엇으로 증명해야 하는지 노먼에게 되물으며 '존재를 규정하는 건 시간'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비유 자체도 적절했지만, 이 비유 자체가 작품의 마지막 순간 뇌를 100% 활용하게 되면서 육신이 사라져 버린 루시의 모습을 잘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무한한 진리에 도달한 것이며, 일면으로는 세상을 초월해 버린 존재가 되었다. 그녀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마지막 순간 루시가 어디에 있는지 묻는 '피에르 델 리오 (아미르 와케드)' 형사의 전화에 '나는 어디에나 있다(I AM EVERYWHERE)'라는 문자가 화면에 표시되는 장면을 통해 재차 입증된다.
편집 방식에 있어서는 여러 쇼트를 짧은 호흡으로 연결하는 몽타주 기법이 종종 활용되었는데, 시간의 흐름에 대한 중요성을 점차 깨닫게 된 루시의 심리가 시각적으로 표현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시각적으로는 영화 <빅쇼트>와 <바이스>가 떠오르기도 했다.
액션 씬의 비중이나 중요도가 그렇게까지 높은 작품은 아니다. 액션을 경시했다기보다는 어차피 규격 외의 힘을 깨우친 루시와 인류의 대결을 구태여 보여주는 것이 투자하는 시간 대비 효율이 낮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겠다. 작품의 구성 자체가 액션보다는 특정 개념과 이론을 풀어나가는 과정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전자와 후자 모두 제각기 다른 강점과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진일보하는 인류의 모습을 루시라는 인물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준 작품이었다. 89분이라는 러닝타임 내에서 세세한 서사와 갈등은 덜어내고 주요한 전개 위주로 박자감 있게 이야기를 잘 풀어나갔다. 캐스팅 측면에서는 스칼렛 요한슨과 최민식을 한 작품에서 볼 수 있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가벼운 마음으로 관람하기도 적절하며, 이런저런 고민을 해볼 수 있는 다양한 소재들을 제시해주기도 하는 SF 작품이다. 앞으로도 종종 재관람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