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하게 비극을 읊으며 사건의 진상을 톺아나가는 해결사(약사)의 혼잣말
<약사의 혼잣말>은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된 24화 분량의 애니메이션이다. 근래에 봤던 작품 중에서는 인과와 선후관계, 복선의 처리가 단연 깔끔해서 기억에 남는다. 작화도 안정적이었다. 아래에 작품의 전반적인 흐름과 감상에 대하여 남긴다.
작품은 과거 시점 동양의 황궁을 배경으로 한 일종의 퓨전 시대극으로, 궁의 하녀 중 한 명인 '마오마오'가 화자로서 작품을 이끌어나간다. 마오마오는 '녹청관'이라는 유곽에서 나고 자란 인물로, 양아버지인 '뤄먼'에게 약학을 비롯한 여러 지식을 익혔지만 어느 날 상인 무리에게 납치당해 궁에 하녀로 팔려가게 된다. 이후 궁에서 하녀 생활을 하던 마오마오는 우연한 계기로 후궁의 상급비들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해결하게 되고, 이 소식은 후궁을 관리하는 '진시'라는 환관에게까지 전해진다. 그녀의 능력을 일찍이 알아본 진시가 마오마오와 함께 궁 내부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큰 줄기이다.
얼핏 보기엔 개별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는 옴니버스식 구성처럼 보여지나, 본 작품은 몇 건의 개별 사건들을 소재로 삼아 하나의 큰 사건으로 엮어낸다. 마오마오가 일련의 사건들을 해결하며 보다 깊은 곳에 위치한 진의에 도달하는 과정이 마오마오의 혼잣말 형태로 관객에게 전달되는 방식이다. 이 과정이 억지스럽거나 비약이 크지 않은 점이 본 작품의 매력적인 부분 중 하나이다. 차분하고 착실하게 사건의 진상을 쌓아 올리는 과정이 다소 긴 호흡으로 그려지기에 전체적인 전개 속도가 느린 것이 약점이긴 하나, 이 점을 감안하고 조금은 느린 호흡으로 작품을 관람하다 보면 큰 감흥에 도달하게 된다.
작품은 전반적으로 평화롭고 부드러운 작화로 그려지나, 그 안에 들어있는 소재들은 결코 평온하지 않다. 마오마오가 자란 유곽의 이야기, 궁 내부에서 벌어지는 알력 다툼, 상급비의 독 시식 담당이라는 다소 비인륜적인 역할 등 궁 내외부에서 벌어지는 숱한 비극이 담담하게 작품에 녹아들어 있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마오마오의 주근깨에 관한 이야기였다. 작중 마오마오는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모습으로 보이는데, 이는 실제 주근깨가 아니라 화장을 통해 일부러 만들어낸 주근깨였음이 작품의 전개 과정에서 드러난다. 그녀가 굳이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해왔던 이유는 유곽에서 기녀로 팔려가지 않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주근깨를 지우고 치장한 마오마오는 상당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묘사된다. (후에 등장하지만, 그녀의 어머니 또한 녹청관의 기녀였다.) 세상 물정과는 거리가 멀고 그저 약과 독에 관심이 많은 소녀로만 보였던 마오마오의 과거가 드러나는 과정을 통해 작품은 단순히 아름답고 흥미로운 세상의 모습만을 그려내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세상의 어두운 면을 포함한 다양한 국면을 보여주고자 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런 마오마오의 행적을 바라보는 진시의 감정 또한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주된 소재 중 하나이다. 어릴 때부터 하나의 장난감에 꽂히면 그것만 줄곧 가지고 놀았다는 묘사가 그를 보좌하는 '가오슌'과 그를 돌보는 유모 '스이렌'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데, 가오슌은 마오마오에 대해 흥미로워하는 진시를 보며 또 새로운 장난감을 찾았다고만 생각했었다. 금방 관심이 식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의 생각과는 달리 진시는 마오마오에 대해 꾸준히 집요한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 이 감정은 마오마오가 자신의 몸을 날려 제사를 지내던 진시의 목숨을 구한 순간 내적으로 크게 폭발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약과 독 이외에는 관심이 전무한 마오마오의 성격 덕택에 둘 사이에 유의미한 진전이 있진 않지만, 진시가 마오마오를 바라보는 감정은 착실하게 고양되고 있음이 작품의 전반에 고루 펼쳐져있었다.
나름의 역사극 같은 소재와 배경 묘사들도 작품의 흥미로운 요소들 중 하나이다. 본 작품이 본격적으로 특정 시대와 국가의 역사에 대한 고증을 살려 제작되지는 않았지만, 궁 내부의 하녀들 사이의 알력 다툼, 상급비 사이의 경쟁과 원유회, 마음에 드는 이에게 비녀를 전하는 풍습, 성곽 위에서 춤을 추는 모습, 추운 겨울에 돌을 데워 옷 안에 넣는 장면, 나무 조각에 글을 적어 전하는 모습 등 이런저런 과거 시점의 다양한 생활상이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서양의 중세나 가상의 판타지 세계 등을 그려내는 작품들은 많지만, 이런 동양적 요소들이 소소하면서도 다양하게 묘사된 작품들은 그리 많지 않기에 흥미롭기도 했다.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마오마오의 능력이 너무 출중했던 것이 한편으로는 조금 아쉽기도 했다. 물론 약과 독에 관해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그 외에도 마오마오는 작품 내내 벌어지는 모든 사건을 풀어나가는 일종의 만능 해결사 역할로 등장한다. 밀가루의 분진폭발을 알아차리고 재현하여 보여주는 장면, 온실에서 장미를 피워내는 일, 낮은 온도에서 녹는 철에 대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 등 마오마오는 조금은 지나칠 정도로 다양한 방면에서 자신의 재능을 뽐낸다. 사건의 원활한 전개를 위해 마오마오에게 과도할 정도로 해박한 지식수준을 부여한 것이 아닌지 하는 약간의 아쉬움도 남았다. 작중 역할 측면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인물과 행동이었던 것에는 이견이 없으나, 전개를 위해 인물이 이용된 느낌이 있었다.
차분한 호흡을 가지고 풀어내고자 한 이야기를 착실히 풀어낸 작품이었다. '약사의 혼잣말'이라는 제목이 제법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해답이나 명확한 사건 해설이 아닌, 논리와 주어진 단서를 바탕으로 마오마오가 나름대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흥미로운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2기가 2025년 1월에 곧 방영된다고 하니, 마오마오와 진시의 다음 이야기도 찬찬히 지켜볼 예정이다. 여러 단서와 복선을 가지고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작품에 흥미가 있고 시대극에 거부감이 없다면, 그리고 조금은 느린 전개 속도를 납득할 수 있다면 한 번쯤은 관람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