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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장송의 프리렌 1기

"용사 힘멜이 그랬던 것처럼"

by 김주렁

0. 들어가기에 앞서

<장송의 프리렌>은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매드하우스'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으로, 1기는 총 28화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평화롭고 따뜻한 분위기의 작화에 시간과 존재, 관계에 대한 다양한 고민이 녹아들어 있는 작품으로, 아래에 이에 대한 감상을 남긴다.


1. 작품의 배경과 제목의 의미

제목에 등장하는 '프리렌'은 용사 '힘멜' 일행과 마왕 토벌을 함께했던 엘프 마법사로, 아득히 오랜 세월을 살아오고 있는 존재이다. 용사 일행은 힘멜, 프리렌, 그리고 성직자인 '하이터'와 전사 '아이젠'으로 이루어진 비교적 정석적인 구성을 보여주지만, 독특하게도 본 작품은 용사 일행의 여정이 아닌 마왕 토벌 이후의 시점을 배경으로 삼는다. 마왕 토벌 이후 수십 년이 흘러 인간이었던 힘멜은 수명을 다해 죽게 되며, 이를 기점으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용사 힘멜의 죽음으로부터 27년 후"와 같은 시간 표현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힘멜의 죽음을 마주한 프리렌은 하이터의 제자였던 '페른'과 함께 다시금 여정길에 오르고, 이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 힘멜과의 기억, 용사 일행이 남긴 흔적들을 마주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이 과정이 마치 힘멜 일행과 함께했던 순간들을 이 세상에서 떠나보내는 장송의 모습처럼 보이는데, 슬픔과 회한이 아니라 정말로 그들의 마지막을 잘 보내주고자 하는 프리렌의 마음이 작품을 전반적으로 이끌어나간다.


작품을 전반적으로 보면 장송은 위와 같이 힘멜과 프리렌의 회자정리(會者定離) 이후의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활용되는 단어이지만, 작품 내에는 또 다른 의미의 '장송'이 활용되기도 한다. 작품 속 세계관에서 프리렌은 상당한 세월을 살아남아온 마법사로, 이에 걸맞은 터무니없이 강한 힘을 보여준다. 그녀는 역사상 가장 많은 마족을 저세상으로 보낸 마법사이며, 마물들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본인들의 '장송'을 치르는 존재로 등장한다. 작품의 제목인 '장송의 프리렌'은 이처럼 힘멜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의미와 마물을 해치우는 무소불위의 존재라는 의미를 중의적으로 보여준다.


2. 상징적 요소들

작품의 외적 배경은 프리렌과 페른, 그리고 아이젠의 제자인 '슈타르크'의 여정이며, 이 과정에서 프리렌이 느끼는 여러 감정과 생각들, 그리고 매 순간 떠오르는 힘멜 일행과의 기억이 작품을 내부에서 이끌어가는 주된 흐름이다. 인간에 비해 터무니없이 오랜 시간을 살아온 프리렌의 입장에서 인간과의 관계는 찰나와도 같은 짧은 시간이었고, 그렇기에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었다. 그런 프리렌의 생각을 조금씩 바꿔준 순간이 힘멜 일행과 떠났던 마왕 토벌을 위한 여정이었다. 프리렌은 오랜 친구인 드워프 '폴'에게 "힘멜은 내가 인간을 알려고 한 계기란 말이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때 깨달았던 사실들, 그리고 차마 그 순간엔 깨닫지 못했지만 페른과 슈타르크를 만나 깨닫게 된 프리렌의 다양한 생각들이 본 작품의 흥미로운 부분들 중 하나이다.


시간

그중 가장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소재는 '시간'이다. 인간에 비해 월등하게 긴 엘프의 수명이 프리렌의 고민과 행동의 시작점이 되어주며, 수십 년이라는 시간은 인간에게는 일평생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엘프에게는 잠깐 스쳐가는 순간의 시간이기도 하다. 이때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은 자연스레 힘멜 일행과 인간의 시선에서 작품을 바라보게 되며, 프리렌의 입장에 온전히 몰입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기에 본 작품에는 몇 장면만에 수개월이나 수년이 흐르는 연출을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이를 통해 관객 또한 간접적으로 프리렌을 포함한 엘프들이 느끼는 시간관념을 이해할 수 있다. 연출 방식 자체가 새롭다기보다는 작품과 인물에 보다 잘 몰입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장치 역할을 시간의 흐름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장면들이 담당해 주었다.


프리렌은 힘멜 일행과 자신의 여행이 "고작 10년짜리 모험"이었다고 말하며 본인 인생의 100분의 1도 안 된다고 그들에게 말했지만, 아이젠은 그 100분의 1이 본인의 인생을 바꾼 거라고 답한다. 같은 상황과 시간에 대해 여러 관점에서의 해석을 내놓는 것이 작품의 기저에 깔린 생각 같기도 하다.


크게 보면 작품의 두 부분에서 '말'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된다. 프리렌이 머무르던 마을에 화친의 사자로서 마족이 방문한다. 그런 마족들을 경계하는 프리렌을 보며 슈타르크는 대화로 해결할 수 있다면 좋지 않냐고 말하지만, 프리렌은 마족이 인간의 언어를 쓰는 이유가 인간을 속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말이 이해와 소통이 아니라 속이기 위한 수단으로 오용된 것이다. 서로 다른 존재와 대화하는 수단으로써 말이 가진 의미와 힘이 이 장면에서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이후 장면에서 실제로 인류에게 쳐들어온 마족 '아우라'를 상대로 펼치는 프리렌의 전략이 인상 깊기도 하다. 인간을 속이기 위해 인간의 말을 사용하는 마족처럼, 프리렌 또한 마족을 속이기 위해 자신의 마력을 제한하여 자신의 강함을 상대방에게 오판하도록 만들었다. 서로의 마력을 천칭 위에 올려놓고 마력이 더 높은 쪽이 낮은 쪽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복종의 천칭'을 사용하였던 아우라에게 이는 상당히 효과적인 전략으로 작용하였다. 마족이 언어로 인간을 속이듯 마력으로 마족을 속이라고 프리렌에게 말한 그녀의 스승 '플람메'의 지략이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장면이었다.


작품의 후반부 1급 마법사 2차 시험에서 프리렌과 페른을 포함한 시험 응시자들은 미궁의 최심부까지 탐색하는 과제를 받는데, 이때 그들의 외형과 기술, 힘을 그대로 모방한 복제체가 등장한다. 이는 미궁 내부의 마족이 만들어낸 존재였고, 실제로 그들의 능력과 생각, 기억을 가진 복제체는 프리렌을 포함한 이들과 호각 이상으로 싸운다. 이때, 미궁 돌파를 위해 힘을 합치는 마법사들은 말과 대화의 힘을 강조한다. 복제체들은 서로 대화하고 협력할 수 없지만, 대화하고 전략을 세울 수 있는 인간의 강점에 대해 공감하며 그들은 프리렌의 복제체를 포함한 자신들의 복제체에 맞서 싸운다. 프리렌과 아우라의 다툼에서는 인간과 마족 사이의 차이를 통해 말의 중요성과 힘에 대해 보여주었다면, 복제체와 싸우는 장면에서는 말이 인류의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음에 대해 보여주었다.


두려움

힘멜 일행의 전사 아이젠과 슈타르크는 두려움을 단순히 약하고 없애야 할 대상으로 치부하지 않으며, 이를 통해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에 대해 보여준다. 아이젠의 제자였던 슈타르크는 이전에는 마물과 싸워본 적이 없던 전사로, 어린 시절 마을을 침략한 마족으로부터 홀로 도망친 겁쟁이라고 자신을 여기고 있었다. 수련을 통해 이미 충분히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두려움을 뛰어넘지 못하던 슈타르크는 프리렌, 페른과 마물을 해치우는 순간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오히려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에 살아남고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전투에 임할 때 두려움에 손을 떠는 슈타르크의 스승 아이젠의 모습을 보여주며 다시금 강조된다. 전사의 두려움을 나약함이 아니라 살아남을 수 있는 원동력으로서 활용한 장면이 인상 깊다.


반복과 계승

감기에 걸린 페른의 손을 잡아준 프리렌은 과거 자신의 손을 잡아주었던 힘멜을 떠올렸었고, 힘멜은 어린 시절 자신의 손을 잡아주었던 어머니를 떠올렸었다. 이처럼 프리렌이 페른과 슈타르크에게 건네는 따뜻한 행동은 이전에 힘멜이 프리렌에게 일깨워준 부분들이 많으며, "용사 힘멜이 그랬던 것처럼"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힘멜에게 힘을 주었던 것은 다름 아닌 프리렌이었다. 어린 시절 힘멜은 약초를 캐다가 산에서 길을 잃고 조난당했던 적이 있는데, 이때 우연히 앞을 지나던 프리렌이 마을로 가는 방향을 알려주었다. 그 후에도 이런저런 생각에 발걸음을 떼지 못하던 힘멜에게 프리렌은 꽃밭을 만드는 마법을 보여준다. 그제야 힘멜은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중반부에 등장하는 성직자 '자인'은 과거에 자신의 친구 '고릴라'와 여행을 떠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도 쉽사리 여정길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런 그에게 여행을 권한 것은 프리렌이었다. 그리고 그런 프리렌에게 처음 여행을 권한 것 또한 힘멜이었다. 1급 마법사 시험 부분에 등장하는 '비어벨'은 용사 힘멜의 모험담을 듣고 자라며 마왕군의 잔당과 싸우는 북부 마법대가 되기도 했고, 제국의 궁정마법사인 '뎅켄'은 용사 일행의 마법사 프리렌을 동경하여 마법사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선행과 도움, 의지가 반복되고 계승되는 구조를 통해 사람의 생명이 다한다고 해서 그 존재 자체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며 그 의지와 마음은 이어져내려 온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졸트라크

졸트라크는 80년간 봉인되어 있던 마족 '크발'이 만들어낸 마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강력한 마법이었다. 그렇기에 힘멜과 프리렌 일행도 크발을 쓰러뜨리지 못하고 봉인해놓아야만 했는데, 80년이 지나 페른과 함께 크발 앞에 선 프리렌은 크발을 쓰러뜨리고자 봉인을 푼다. 강력한 마법을 대비해 긴장한 페른이었지만, 정작 봉인이 풀린 크발이 사용한 것은 현재 시점에서는 너무나 기본적인 공격마법이었다. 당시에는 너무도 치명적이고 강력했던 마법이었지만, 크발이 봉인된 80년 동안 인류가 이에 대한 연구를 통해 공격 마법과 방어 마법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크발은 자신이 만들어낸 마법에 의해 프리렌에게 죽는다. 작품이 주로 프리렌의 입장에서 전개되기에 수십 년의 시간이 대수롭지 않게 흘러가는 경우가 많지만, 이 경우에는 80년이라는 인류의 세월을 통해 마물을 극복해 내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시간의 무게와 힘을 보여줄 수 있었다. 1기를 통틀어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였다.


3. 마무리하며

마왕 토벌 이후라는 독특한 시점, 수려한 작화, 고민해 볼 수 있을 다양한 소재들을 포함한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다. 잔잔하게 보기 좋기도 하고 애니메이션 입문으로도 무난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2026년 1월에 2기가 나온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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