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월권에 대한 흥미로운 가정법
영화 <컨택트>는 '테드 창'의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Story of Your Life)>를 원작으로 제작된 '드니 빌뵈브'감독의 작품이다. 공교롭게도 1997년에 개봉한 영화 <콘택트(Contact)>와 본 작품 모두 SF 장르이면서 외계인과 인류의 소통과 접촉을 주된 소재로 다루지만, 주어진 상황과 해석, 접근 방식은 상이하다. 아래 글에서는 2016년 개봉작인 컨택트에 대한 감상을 다뤄보고자 한다.
이야기는 정체미상인 12개의 비행물체가 지구 상공에 나타나게 되며 시작된다. 각 비행물체가 위치한 국가들은 대응을 위해 각 분야의 전문가를 소집하며, 이 과정에서 언어학자인 '루이스 뱅크스(에이미 애덤스)'와 이론 물리학자 '이안 도널리(제러미 레너)'가 현장으로 불려 오게 된다. 루이스와 이안을 포함한 이들은 후에 '쉘'이라 부르게 되는 비행물체에 올라가 외계인으로 추정되는 '헵타포드(7개의 다리로 인하여 이와 같이 명명되었음)'가 지구의 상공에 나타난 목적을 밝혀내고자 그들과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루이스는 'HUMAN'이라는 언어를 헵타포드에게 보여주며, 그들은 이에 대한 대답으로 자신들의 문자를 그려 루이스와 인류에게 답한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인류와 헵타포드간의 소통,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 전개되며 이야기는 무르익는다.
본 작품은 여러 측면에서 흥미롭게 다가오는데, 첫 번째 요소는 SF 장르의 본질적 특성에서 출발한다. 서로에 대해 무지한 인류와 헵타포드 사이에서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은 관객으로 하여금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대한 새로운 간접경험을 제시하는 동시에 이와 최대한 유사한 상황에 대한 선례를 머릿속에서 탐색하도록 하며, 이 과정이 마냥 허무맹랑한 망상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 자신에게 인지시킨다. SF가 흥미로운 이유 중 하나는 긍정적인 의미의 '그럴듯한' 상황을 관객에게 잘 제시하기 때문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겉보기에는 화려해 보일지라도 내면적으로는 관객의 기억에서 쉽게 휘발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최소한의 개연성과 논리, 추정에 대한 근거만 존재하더라도 창작자가 풀어내는 이야기는 관객을 보다 깊은 곳으로 끌어당길 수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헵타포드는 관객이 살아가는 현실과 동떨어져있는 존재이지만, 루이스가 헵타포드와 소통하고 서로의 언어를 공유하는 수순은 우리가 아이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과정, 애완동물과 반복학습을 통해 소통하는 과정과 닮아있다. 이 배경지식이 영화 내부의 상황과 연결되는 순간 관객은 루이스와 헵타포드의 소통이 정제되는 과정을 보다 가까운 심적 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다.
헵타포드의 언어형식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물론 흥미롭다. 헵타포드의 언어는 시작과 끝이 없는 원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렇기에 그들에게 과거와 현재, 미래는 개별요소가 아니라 연결된 하나의 고리이다. 이는 언어가 발화자의 사고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SF적 허용을 가미하여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던 소재였다. 영어를 쓰는 사람은 영어로 꿈을 꾸고, 영어의 어순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명함에 대한 지식을 이해하고 납득하기는 쉽지만, 비영어권의 사람이 이에 대해 정확하게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동사가 앞에 배치되는 영어와 뒤에 배치되는 한글을 배운 사람, 좌→우로 쓰이는 여타 언어와 우→좌로 쓰이는 아랍권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생각이 처음 체득한 언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음은 불가피한 사실일 것이다. 이에 대한 극단적인 사례집이 본 영화가 보여준 헵타포드의 언어였다. 이전에도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조하고 관여하며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작품은 몇몇 존재했지만, 전체가 하나가 되어 사건을 풀어나가는 본 작품의 갈등 해결 과정은 나름 참신했다.
덧. 여러 시간선이 함께 등장하며 얽혀있는 영화들
프리퀀시(HAM 통신을 통해 미래에서 과거에 관여한다)
테넷(시간 자체를 역으로 돌려 과거로 돌아간다)
나비효과(시간의 인과관계가 이어지며 시간선을 넘어 영향을 미친다)
어바웃 타임(과거로 돌아가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낸다)
트라이앵글(타임루프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황이 등장한다)
작중 헵타포드는 '무기'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이 순간 이후로 미국과 중국을 포함한 전 세계는 극도로 긴장에 휩싸인다. 루이스는 그들이 아직 인류의 언어에 완벽하지 않기에 다른 의미와 혼동이 있었을 것이라 설명하지만, 그녀를 제외한 대부분의 인류는 이를 지구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결국 헵타포드가 언급했던 무기는 정말로 인류를 번영시킬 수 있는 도구이자 그들이 인류에게 도움을 주는 행위였다. 그들은 먼 미래에 인류로부터 도움이 필요함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미리 인류에게 연락을 취했던 것이다. 이 장면을 보며 무지와 오해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무지는 객체를 발전시킬 수 없겠지만 오해와 곡해는 높은 확률로 상황을 그르치게 만든다. 만일 작품에서 인류의 곡해로 인해 헵타포드를 공격했었다면 인류와 헵타포드는 모두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헵타포드와 인류 사이의 곡해,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한 각 국가들 사이의 소통의 단절 과정을 보며 언어가 가진 힘과 위험성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차분한 SF라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본 작품은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와 고민거리들을 차분하면서도 착실하게 풀어나간다. 시청각적 요소에 압도되기보다는 언어와 과정에 빠져드는 SF 작품이었고, 내용이 잊힐 때마다 한 번씩 다시 보아도 재밌는 작품이다. 앞으로도 종종 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