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젖은 듯 찌뿌듯한 눈꺼풀을 치켜뜨며 주연은 회백색 도로를 걸었다. 박자를 곧잘 놓치는 두 발은 정박과 엇박을 오가며 제멋대로 바닥을 지르밟고 있었다. 주말 동안 장염으로 호된 고초를 겪은 터라 어젯밤엔 하릴없이 일찍 잠에 들었는데, 그 덕택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오래간만에 세상이 제법 선명하게 보였다. 아픔에서 피어오른 상쾌함이 의아한 몸짓으로 자신의 존재를 반추(反芻)하며 주연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던 사이에 그녀는 지하철로 빨려 들어갔다.
뱃속에 남은 통증의 부스러기가 이따금 주연을 움켜쥐었고, 입꼬리는 그믐달처럼 말렸다. 그와 동시에 옅은 신음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허공에 고개를 저어본들 차도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주연은 연거푸 고개를 저었고, 지하철에서 내리기까진 아직 시간과 분과 초가 한아름 쌓여있었다. 상쾌하고 선명한 이물감에 몸 둘 바를 모르던 그녀를 실은 2호선은 어느덧 지하를 빠져나와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간밤에 내린 비는 이제 막 닦은 유리창처럼 말끔하게 하늘을 정돈해 놓았고, 초록 빛깔의 나무들은 본래보다 더 진한 색을 세상에 내비치고 있었다.
'바삐 흘러가는 계절은 어느덧 꽃잎을 떠나보냈다.'
푸른 나무를 바라보며 주연은 수개월 전의 과거를 톺았다. 삭막하고 이골이 난 출근길에 피어난 연분홍빛 벚꽃은 수 일 동안이라도 판에 박힌 일상으로부터 그녀를 이격 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자신에게 여행을 오는 호사를 누리는 기분이었다. 예전엔 이 짧디 짧은 여행을 아쉬워해보기도 했지만, 요즈음 주연은 조금은 다른 각도로 세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름다움이 존속할 수 있는 이유 중엔 필시 외로움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고, 그녀는 꽃잎이 머물다간 자리를 보며 곱씹었다. 아름다움과 외로움은 초견엔 제법 상이한 맥락을 내비치지만, 어느 한 구석에서 그들은 제법 닮아있다고도 그녀는 생각했다. 절대적인 존재가 천명한 아름다움이 아닌 우리가 인지하고 관측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움은 상대적 우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테고, 그렇다면 희소한 고립은 아름다움 자신의 가치를 어느 정도는 고양시킬 것이라고 말이다. 일 년 중 단 며칠 동안만 세상에 얼굴을 보이는 연분홍빛 꽃은 단순히 그 색이 너무도 아름답기에 자신을 응시하는 사람을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장소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색이기에, 한정된 시간 동안만 접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희소하고 외롭기에 벚꽃은 보다 진한 여운을 봄에 선사한다.
출구 없는 생각에 잠겨 세상에서 떠오르려던 주연은 배를 찌르는 통증에 휘감겨 현실에 다시 뿌리를 내렸고, 그믐달 모양의 입에서는 여지없이 마른 숨이 새어 나왔다. 한강을 건너던 지하철은 다시 지하로 몸을 숨긴 채 좌우로 요동치고 있었다. 문득 돌아본 지하철 안의 풍경은 외로움이라고는 없는, 너무나도 친숙하고 눈에 박힌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익숙함의 바다에 잠긴 채로 떠내려가기를 삼십 여 분 후에 주연은 지하철에서 내렸고, 이제는 어느 정도 제 박자를 찾은 두 발은 사무실로 가는 가락을 읊었다. 썩 흥미로운 가락은 못 되는, 그런 미진한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