꿉꿉한 공기와 흘러넘치는 인파에 몸 둘 바를 모르던 주연은 이내 지하철에서 탈출해 합정역에 당도했다. 지긋지긋했던 하루에서 벗어나기라도 하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뜬 그녀는 시계를 바라보았고, 채근당하기엔 제법 이른 시간이었기에 잠시간의 여유와 손을 맞잡은 주연은 이내 발걸음을 거두었다. 모두가 어딘가로 흘러가기 마련인 지하철 역사 내에서 멈춰 선 그녀는 모난 돌 같았고,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몇몇 사람들은 그녀에게 걸려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 어딘가로 향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지하철 역이 머무를 장소라는 목적으로 변모하는 그 이질감이 주연에겐 제법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고개를 돌린 곳에는 나무 바닥이 깔린 쉼터가 있었다. 조화 몇 송이와 몇 개의 원형 탁자, 그리고 제각기 다른 의자가 놓인 장소에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세상에 잠겨있었다. 구석에서는 한 사람이 가방을 베고 엎드려 단잠에 취해있었고, 다른 쪽에 앉은 사람은 여유로이 책을 읽고 있었다. 또 다른 탁자에서 바둑판과 기보가 적힌 책을 번갈아 바라보는 적당한 연세의 어르신은 흑돌과 백돌을 골똘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정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어버린 착석을 보는 듯했다. 회백색 돌과 시멘트로 빚어진 지하 공간의 한편에 마련된 나무 쉼터는 마치 자신만 다른 세상에서 잘못 섞여 들어온 이방인 같았다. 생경함은 이내 그녀를 이끌었고, 정신을 차린 주연은 어느새 맹목적으로 의자에 앉아있었다. 봄과 여름이 포개어진 계절의 공기는 영 상쾌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그저 그곳에 뿌리내린 부표처럼 자신 앞을 흘러가는 사람들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나마 세상에서 한 발짝 만큼 이격 된 장소에 올라 하계를 관망하는, 딱 한 뼘만큼의 권력을 손에 쥔 기분이었다. 그렇게 십여 분이 지나고 나서야 시계는 그녀를 넌지시 채근했고, 나무바닥의 세계와도 헛헛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해가 가라앉은 저녁나절의 공기는 차분하고 낮게 바닥에 깔렸고, 발에 치이는 공기를 흩뿌리며 주연은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엔 승연과 지우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익숙하게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그녀는 자리로 향했다.
"일찍 오셨네요들?"
짧은 안부인사를 건넨 후 주연은 물을 한 잔 마셨다. 이제는 알게 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친구들이었다. 살아온 인생의 반이 넘는 시간을 알고 지낸 이들은 그녀 자신의 과거가 실존했음에 대한 현신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타인을 통해 증명해야만 하는 사실이 일면으로는 억울하면서도 또 그만큼 이들의 존재가 무겁게 다가오기도 했다.
"별일 없었지?"
생각이 머리를 도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갔는지 지우가 주연에게 물었다.
"그럼, 별일 없지 뭐. 너희들은? 뭐 특별한 일 있어?"
"나도 뭐 딱히?"
별다른 변고가 없음에 만족한 이들은 이내 편안한 면면을 서로에게 보였다. 차릴 체면도, 거리낄 마음도 없는 이들과의 회동은 제법 즐겁다. 감정이 치솟지는 않지만 구들장처럼 따뜻한 감정이 퍼져나감을 주연은 매번 느꼈다. 아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주연은 술잔을 기울였다. 하루 내내 긴장한 채 달싹이던 입꼬리도 그제야 힘을 풀고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구태여 기대와 실망, 그 어느 쪽으로도 향해야 할 연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안락한 방임이었다. 주연은 이내 느슨함에 젖어들었다. 요즈음 그녀의 일상은 너무도 팽팽하기 일쑤였고, 사무실에서는 쉬이 덜어낼 수 없는 부담감이 곧잘 그녀에게 들러붙었다. 이제는 마냥 도움을 구하고 후일을 도모할 수는 없을 만큼의 경력이 쌓여버린,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무거운 압박감에 지긋이 눌리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에도, 손에 쥔 것을 내려놓는 것에도 그다지 능하지 못했던 주연은 조금씩 앞으로, 아래로 나아가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승연과 지우는 이따금 그녀에게 잠시나마 여백을 만들어주는 존재들이었다. 공백은 공허와 부재가 아니라 숨구멍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더 떠들던 그들은 이내 짧은 손인사와 함께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