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미소의 입꼬리_03

by 김주렁

오른쪽 입꼬리와 눈이 옅게 떨렸다. 왼손 검지를 들어 입꼬리를 훑어보니 피가 묻어 나왔다. 그제야 뒤늦은 쓰라림이 주연의 볼로 퍼져나갔다. 옷가지를 챙기며 출장지의 온도까지는 확인했지만 습도는 신경 쓰지 않았던 자신이 아른거렸지만, 주연은 무용한 후회와는 상극인 사람이었다. 두어 번 입을 앙다물고 휴지로 입가를 닦아낸 후에 그녀는 호텔 앞 마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원형의 버튼으로 가득 찬 황동색의 엘리베이터는 돈이 넘실대는 라스베이거스의 정취에 퍽 어우러진다고 생각하며 주연은 자신의 옆에 선 노년의 부부에게 미소와 눈인사를 건넸다. 사람과 돈이 넘실대는 라스베이거스의 거리를 보고 있노라면 좀체 사막이 연상되지 않았지만, 아린 입꼬리만이 사막을 그녀에게 되뇌었다.


마트 안엔 익숙함과 생경함이 얽혀있었다. 으레 한국에서도 접했던 대기업의 산출물들은 재회의 인사를 건넸지만, 그 외에는 난생처음 보는 상품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인 주연은 미약하게 고양되었다. 마트는 그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제법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어떤 색을 선호하는지, 가격과 품질 중 어느 곳에 집중하는지, 다른 나라에는 없는 상품을 마트에서 팔고 있지는 않은지 등 마트는 제법 생에 맞닿아있는 발화자였다. 이전에 주연이 출장차 방문했던 나라에선 가전제품 옆에서 발전기를 함께 팔고 있었는데, 정전이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이후에 들을 수 있었다. 지당하지만 새로운 경험이었다. 라스베이거스 호텔 앞의 마트에선 특유의 표지판 모양 기념품, 포커 카드, 칩 모양 초콜릿 같은 퍽 주변에 어울리는 물품들이 한 벽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후로도 한동안 마트를 누비던 주연은 립밤과 감자칩, 탄산수를 집어 들고 마트를 빠져나왔다.


짧은 나들이를 다녀온 후에도 호텔 로비와 카지노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다만, 모국어가 아닌 이국의 언어로 가득 찬 공간은 물리적으로는 포화되어 있었지만 심리적으로는 제법 훌륭한 공동(空洞)이었다. 이질적 표현이 보기 좋게 중첩되어 있었다. 먼발치에서 인파에 질겁하던 주연은 이 이질감 덕분에 조금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방으로 돌아와 의자에 걸터앉은 주연은 입꼬리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 푹신하지는 않은 의자 등받이에 목을 기댄 채 그녀는 갈색 천장을 눈에 담았다. 생각을 톺던 안방과는 사뭇 다른 이경(異景)이었다. 다른 색의 천장엔 무엇을 담아야 하나 망설이던 주연은 돌연 몸을 앞으로 웅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을 한없이 늘어놓기엔 기다리고 있는 내일이 버거웠기 때문이었다. 한달음에 잘 채비를 마친 그녀는 약간 무거운 이불에 눌린 채 잠에 들었다.


주연이 다시 깨어난 것은 새벽 세 시였다. 자발적 기상은 아니었다. 열두 시간에 달하는 시차로 어긋난 육체와 정신의 때가 아직 제 자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설익은 잠은 괜스레 우왕좌왕한 꿈의 흔적만을 그녀에게 남겼다. 꿈에선 왠지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 아무리 입을 크게 벌리고 감정을 토해내려 해도 목구멍에서는 바람 새는 소리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 감정이 아쉬움이었는지, 분노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서러움이었는지 고민하던 와중에 꿈은 주연의 머릿속에서 휘발해 버렸고, 어렴풋이 부모님의 얼굴을 보았던 기억만이 남아 그녀를 뒤숭숭하게 했다. 과연 자신은 무엇을 마주했기에 그렇게 아우성을 치려했을까. 고민이 보다 깊어지고 의식이 선명해지기 전에 주연은 두어 시간이라도 단잠을 청하고자 이불에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어둠이 다시 그녀의 위에 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