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미소의 입꼬리_02

by 김주렁

마음의 부스러기가 입꼬리에 묻어있었다. 5월의 내리쬐는 햇살 아래에 앉아 영주와 조운을 이따금 바라보며 주연은 생각했다. 턱을 괸 오른손이 알맞게 다스했기에 그녀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약간 기댄 채였다. 오전 나절을 겨우 흘려보낸 직장인들의 대화는 전쟁과 육아, 정치와 날씨를 오가며 제멋대로 쌓여가고 있었다.

"날씨가 참 좋아요."

몇 발치 떨어진 곳에 뿌리내린 벚나무를 바라보던 영주가 말했다. 봄과 여름의 간극에 알맞은 은백색 카디건을 어깨에 두른 모습이 퍽 부드러웠다. 주연이 머릿속에서 단어를 만지작거리던 사이 조운이 말을 이었다.

"그렇죠? 한여름이 되기 전에 열심히 즐겨야 할까 봐요."

얇은 긴팔에 하늘색 바람막이를 걸친 채 느린 손짓으로 바지런히 부채질을 하는 조운은 성실한 듯 성실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내심 생각하던 주연은 다시금 말꼬리를 붙잡을 때를 놓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세 명 사이의 공기는 일그러지지 않았다. 제법 성향이 잘 맞는 셋의 회동은 별다른 대화 없이도 안온하게 흘러갔고, 이따금 호수에 파문이 일듯 소리와 빛이 그들 사이를 오갈 뿐이었다.


"이제 슬슬 들어갈까요?"

세 명 사이에 잔잔하게 내리 앉던 시간은 어느덧 오후 1시 목전이었고, 눈인사와 옅은 미소는 그들 사이를 원만하게 갈무리했다. 그렇게 주연도 회색 파티션으로 둘러싸인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오후는 다시금 기염을 토하며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약간의 멀미와 어지러움을 느끼며 주연도 그 시간에 하릴없이 올라탔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노트북을 들고 회의실을 오가며 해야 할 일과 하지 못한 일을 솎아내는 주연은 낱알을 골라내는 키였다. 그렇게 두어 번 소임을 다한 주연은 노트북을 덮고 목례를 건네며 사무실을 나설 수 있었다. 비스듬히 올라간 입꼬리엔 아릿한 피로가 걸려있었다.


하루가 저물기엔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지만, 서쪽 하늘에 걸린 태양은 퇴근길에 선 주연의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 어린 시절 퇴근하신 부모님의 손을 잡고 동네 골목을 거닐며 바라보던 긴 그림자가 문득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때에 대한 기억이 문득 그녀의 마음을 저몄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감정이 온몸으로 퍼져나가기 전에 주연은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 이렇게 길 한복판에서 청승을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주연은 다시 그림자와 함께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조금은 차분해진 마음을 채비한 주연은 지하철 탑승구 앞에 섰다. 퇴근길의 1호선은 번잡의 현현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장소였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소리와 냄새, 빛이 서로를 휘감았지만 누구 하나 쉽사리 그 늪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되레 이들은 자청하여 늪과 하나가 되어야만 하는 이들이었다. 주연은 이런 많은 자극엔 상극인 사람이었지만, 그녀 또한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오롯하게 세상과 단절되었다고 되뇌는 것이 최대한의 자구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난 후에 지하철 역사에서 탈출한 그녀는 상대적 해방감을 만끽하며 소박한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문득 쇠인지 피인지 모를 날이 선 비릿한 향이 코를 스쳤다. 두려움보다는 궁금함에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주연은 마땅히 미심쩍은 발원을 찾지 못했다. 잠시 생각의 수렁으로 빠져들 뻔 한 자신을 관망하던 그녀는 이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목요일 저녁의 직장인에겐 해찰에 양보할 정신력이 부족했기에 잠시 피어올랐던 날카로운 이질감은 덩그러니 그곳에 남겨졌다. 하지만 시각과 후각, 청각과 촉각처럼 복수의 감정이 결부된 기억의 생명력은 야속하게도 길었고, 목요일의 퇴근길은 신발에 들어간 모래처럼 한동안 주연의 머릿속에 까끌하게 남아 입꼬리를 달싹거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