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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꿈과 사랑의 숭고함에 대하여

by 김주렁

<진격의 거인>은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으로, 크게 총 4개의 시즌(1기, 2기, 3기, The FINAL)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내용과 설정에 대해서는 이미 숱한 분석이 널리 퍼져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느꼈던 인상 깊었던 부분을 아래에 남긴다.

(스포일러 다수 포함)


#개인 #소망 #사랑

작품의 큰 얼개는 조직과 국가, 민족 사이의 갈등과 인류의 존망을 위한 투쟁, 선악과 시시비비를 가리는 가치판단 등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정작 이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가장 핵심적인 원동력은 개개인의 소망에서 비롯된다.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 The FINAL 후반부에 등장하는 '좌표'에서 아르민과 지크의 대화였다. 지크는 일찍이 에렌에게 배신당하고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런 지크를 마주한 아르민은 모래바닥에서 나뭇잎을 주워든다. 그리고 동시에 지크는 아르민의 손에서 야구공을 본다. 아르민이 손에 쥔 것은 인류 증식과는 관계없는, 지극히 개인적으로 중요한 존재였다. 아르민에게 있어 그것은 에렌과 함께 책을 보며 꿈꿨던 벽 바깥의 세상에 대한 동경이었고, 지크에겐 쿠사바와 함께 했던 캐치볼(아버지인 그리샤와 함께하지 못했던 추억이 겹쳐진 것이리라)이었다. 그렇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를 깨달은 지크는 이내 아르민에게 협력하며 최종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도록 리바이에게 자신의 목숨을 내준다.


이 외에도 작품에는 엘빈 단장의 세상에 대한 탐구욕, 샤디스 교관의 카를라에 대한 연정, 히스토리아를 위해 자신을 내던진 유미르, 팔코를 희생해서라도 엄마를 되살리고자 하는 코니 등 대의적 가치판단에 어긋나는 개인의 강렬한 소망들이 드러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주요하다고 생각했던 소망은 엘렌을 향한 미카사의 무조건적인 사랑, 그리고 과거 프리츠 왕을 사랑했기에 이천 년 동안이나 속박되어 있던 시조 유미르였다. 세상을 뒤집고 바꾼 것은 결국 명분과 사상, 계약과 속박이 아닌 사랑이었다.


#확장 #찰나 #일장춘몽

에렌, 아르민, 미카사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시작된 서사는 점진적으로 민족과 국가, 나아가 범지구적 갈등까지 확대된다. 이와 같은 규모의 확대가 여타 작품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The FINAL의 마지막화 엔딩 크레디트에 등장하는 장면이 꽤나 인상 깊었다. 작품은 에렌을 묻어준 나무 앞에 앉아있는 미카사를 보여주고, 그곳에 찾아온 옛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게 한동안 나무를 바라보고 있다 보면 뒷배경을 통해 문명이 발전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건물이 빠른 속도로 올라가고, 기술이 발전하며 마천루를 이룬다. 그런 후에는 다시금 전쟁이 발발하고 미사일이 도시에 떨어진다. 그러고 나서 문명은 다시금 붕괴한다. 이후에 무너진 건물 외벽과 자연이 뒤섞인 장소에 우두커니 남아있는 그 나무를 찾아온 이름 모를 여행자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작품은 막을 내린다. 그렇게나 치열했던 다툼과 갈등, 전쟁, 종의 보존을 포함한 이야기는 엔딩 크레디트에서 보자면 정말로 일장춘몽 같은 찰나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진격의 거인 1기 1화의 제목이었던 "2천 년 후의 너에게"가 이 순간 작품의 종장과 연결된다. 장장 네 시즌을 통해 달려온 이야기는 이렇게 작품의 마지막 순간, 2천 년 후의 너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이런 수미상관의 구조 자체도 인상 깊었지만, 이 압도적인 시간의 길이를 통해 그 속에서 벌어졌던 전쟁과 다툼이 얼마나 덧없는 행위였는지를 상기시킬 수 있었다. 동시에 그 꿈결 같은 순간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메시지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자유

작품에서 여러 차례 회자되는 "자유"는 목숨을 바쳐 울부짖을 만큼 완전무결한 해결책은 아니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자신의 존재를 발할 수 있고, 태양 아래에서 별은 온전히 자신을 내비칠 수 없다. 자유 또한 기본적으로 상대적인 우위를 기반으로 성립되는 개념이다. 다수의 생명체가 공존하는 사회에서 한 생물의 자유는 다른 생물의 양보나 배려, 혹은 포기나 희생 위에 쌓아 올려지기 때문이다. 에르디아인의 자유를 위해서는 마레를 포함한 타국의 희생이 필수불가결했다. 다수의 희생을 동반해야만 하는 자신의 행위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 에렌이 자유라는 개념을 이용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애당초 본 작품 자체가 완전무결한 절대자의 심판보다는 개개인의 생존과 꿈을 위한 발버둥에 가깝기에 이런 약간의 억지스러운 주장 방식도 나름 잘 어울렸다.


작품의 종장에서 에렌은 자신은 '자유의 노예'라고 말한다. 상반되는 단어의 조합이지만 에렌이 처한 상황을 놓고 보면 자유를 위해 자신을 내던지면서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던 에렌 자신의 처지를 잘 보여준 표현이었다.


#군상극 #소모전 #연쇄 #상대성

긴 분량을 고려하더라도 본 작품에는 상당히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며, 여러 군상을 볼 수 있어서 흥미롭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서, 각 인물이 가차 없이 소모되는 동시에 허투루 쓰이는 인물이 잘 없다는 점이 기억에 남는다. 에렌 일행과 함께 훈련을 받은 동료들, 조사병단과 리바이반, 엘빈, 미케, 한네스 등 작품 내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 인물들이라고 해도 서사에 필요하다면 각 인물들은 가차 없이 소모된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순간적으로 스쳐가는 줄만 알았던 샤디스 교관, 사샤가 살린 아이, 프록 등이 서사에 반복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중에서는 사샤-카야-가비로 이어지는 이야기, 그리고 프록 일대기가 기억에 남는다. 위기를 무릅쓰고 생면부지의 카야를 거인으로부터 구해낸 사샤, 그런 사샤를 죽인 가비, 그리고 위험에 처한 가비를 거두어준 사샤의 가족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살고 있던 카야. 생명을 구하고 앗아가는 행위, 구원과 증오가 얽히고설켜있었다. 기구하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을 비극이었지만, 인상 깊었던 것은 사샤의 부모님이 보여준 태도였다. 자신을 구해준 사샤의 원수가 가비임을 알게 된 니콜로는 가비를 죽이려다가 사샤의 부모님에게 자식의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넘기지만, 그들은 이내 가비를 죽이지 않고 증오의 사슬을 끊어낸다. 그 결단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자식을 죽인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이런 선택을 내릴 수 있었던 사샤의 부모님이 보여준 심지가 대단했다.


프록 폴스타는 조사병단 소속의 병사였으며, 월마리아 탈환 작전에 엘빈, 마를로를 포함한 인원들과 함께 전장에 있었다. 다만 이들은 짐승 거인을 죽이기 위한 미끼로 엘빈과 함께 생지옥에 내던져진다. 이런 상황에서 프록은 허망하게 죽게 될 자신들을 보며 절망에 빠지지만, 마를로는 엘빈의 연설을 듣고 기꺼이 앞으로 나아간다. 물론 프록도 결국엔 말을 타고 사지로 함께 향하지만, 결국 이 아수라장에서 살아남은 것은 이들을 이끈 엘빈도, 대의를 굳게 믿었던 마를로도 아닌 프록이었다. 우연이 만들어낸 상황이었겠으나, 그는 이를 기점으로 작품의 종장까지 살아남아 작품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그는 에르디아의 안위를 위해 예거파를 조직하여 아르민을 포함한 주연 일행에 맞선다. '심장을 바쳐라'라는 구호와 함께 미래에 희망을 걸고 자신들의 목숨을 기꺼이 내던진 조사병단의 동료들과 프록은 달랐지만, 결국 프록은 끝까지 살아남아 자신이 믿었던 길을 관철하다가 숨을 거둔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길이 마냥 틀렸다고는 볼 수 없었다. 에르디아와 파라디섬만을 생각했더라면 그의 선택과 생각 또한 어느 정도 합당했기 때문이다. 조사병단을 포함한 인류의 여정이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입장과 생각을 가진 이들끼리의 다툼이었음을,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완벽한 해답은 존재하지 않음을 프록의 일대기가 여실히 보여었다.


인물 배치와 서사의 발전 과정, 세세한 설정과 복선 회수 등 여러 면에서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었다. 이 정도의 규모와 완성도를 겸비한 작품이 또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한 번은 꼭 관람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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