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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면의 조개껍데기, 김초엽 소설집

선입견을 걷어낸 세상에서 마주할 수 있을 고민들

by 김주렁

김초엽 작가의 소설집 <양면의 조개껍데기>에는 관점과 처지, 대전제를 일상과는 약간 다른 각도에서 조망하는 작가의 흥미로운 시선을 엿볼 수 있는 7편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공상(空想)에서 출발하는 이야기들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가장 현실적인 고민들을 건드린다. 과학을 재료로 빚어낸 우화 같은 이야기들이 흥미로우면서도 날카로웠다. 아래에 각 작품에 대한 감상과 인상 깊었던 문장들을 남겨본다.

(각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 포함)



수브다니의 여름휴가

수브다니, 수안 최, 전-안드로이드, 남상아와 2인조 작업을 진행했던 작가. 이는 모두 한 객체를 지칭하는 표현들이다. 안드로이드로 만들어졌던 수브다니는 이후 인간화 과정을 거쳐 반(半) 인간이 되었지만, 이내 다시금 "녹슬고 싶어요"라는 말과 함께 금속 피부를 이식받고자 주인공인 "현이"가 일하고 있던 '솜솜 피부관리숍'을 찾아온다. 인간과 기계, 단백질 피부와 금속 등 여러 존재와 물성의 선후관계, 그리고 인과가 뒤섞인 이 작품은 존재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다양한 의문을 독자들에게 남겼고, 아래 문장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인간의 재료가 달라진다면 인간과 세계의 상호작용도 바뀌지 않을까?

하지만 돌고 돌아 결국 가장 중요했던 것은 목적이나 이유, 숨겨진 의도 같은 게 아니었다. 중요했던 것은 소망하는 바를 이루고자 했던 마음 그 자체였다. 남상아와 수브다니의 정신적 갈등, 그녀의 작품 파편을 들고 와서 본인의 몸에 이식한 수브다니의 행동, 그녀의 행동에 대한 대중들의 추측과 곡해. 그 모든 것이 무용하다고 말하려는 듯 수브다니는 유유자적하게도 바닷가에 다른 기계장치들과 손을 잡고 녹슬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자신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현이와 솜솜 피부관리숍의 사장님에게 보낸다. 작품의 제목이 '수브다니의 여름휴가'였던 이유 또한 그녀가 피부를 이식하고 바다로 떠난 이 순간이 어떤 대의를 이뤄내야만 하는 사명에 휩싸인 때가 아니라 온전히 자신이 소망하는 대로 움직였던 때임을 보여주기 위함은 아니었을지 사견을 남겨본다.


양면의 조개껍데기

작품에 등장하는 '샐리'라는 인물은 '셀븐인'으로, 심해로 다이빙을 하며 영상을 촬영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를 포함한 셀븐인들에겐 자신의 안에 또 다른 인격, '타자아'라고 불리는 여러 자아가 존재한다. 그들은 대체로 본인들의 의지에 따라 육체를 교대하면서 사용한다. 이야기는 샐리라는 셀븐인 안에 포함된 인격인 '라임'과 '레몬' (그들을 처음 봤을 때부터 완벽히 구분해 낸 '류경아'가 이름을 붙여주었다.)이 '뇌신경조절술'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분리해 내는 수술을 받고자 하는 부분에서 시작된다. 셀븐 행성이 아닌 지구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이 '타자아'라는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난 이후로 숱한 갈등을 겪으며 지내왔지만, 류경아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겪으며 서로의 존재에 대한 갈등이 깊어진다. 그렇게 결국 서로를 분리하여 각자의 순간에 간섭할 수 없도록 수술을 진행하려 했지만, 물속에서 라임과 류경아가 위급한 순간 무리하게(수술을 위해 복용하고 있던 약의 부작용을 온전히 받아내면서) 라임과 몸을 교대한 레몬은 그 둘을 구해내지만, 그 후로 레몬은 그들과 기약 없는 이별을 하게 된다. 이후 서로(레몬과 라임, 류경아)에 대해 생각하던 이들에게 레몬이 의식을 되찾고 돌아오게 되며, 결국 라임과 레몬은 서로를 분리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기로 하며 작품은 마무리된다.


자아와 타자아, 다중 인격이라는 현상을 심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가상의 과학적 현상(특정 행성에 살아가는 외계인에게서 발현되는 특성)으로 접근한 방식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본 작품을 읽으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생각은 라임과 레몬의 상황이 비단 인간관계를 맺는 사회 구성원들과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타인에게서 완벽한 독립 상태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인간관계란 서로의 영역을 어느 정도 침범하고, 이를 용인하면서 서로에게 필요한 물질적, 심리적 요소들을 주고받으면서 성립된다. 되레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면 이는 관계라고 부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본 작품에서는 라임과 레몬, 류경아 사이의 관계가 삼각형을 이루지만, 레몬과 라임의 관계만 놓고 보더라도 이는 연인이나 부부 관계와 매우 흡사하다. 생경한 세상에서 살아온 독립적 개체였던 두 사람이 만나 부부, 가족이라는 하나의 관계를 이뤄내는 과정에서 '부부, 가족'은 셀븐인이라는 물리적 결합의 심리적 형상과 일맥상통한다.


가공의 상황과 과학적 가정이 현실의 모습과 중첩되는 이 순간이 김초엽 작가의 SF 소설이 가진 매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아래 샐리의 말은 셀븐인으로서의 자각의 순간과 실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이 사회적 동물임을 인지하는 순간 모두에 중첩된다.

내가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진동새와 손편지

본 작품은 집단 네트워크를 이룬 지성체가 조난된 우주선 안에 남아있던 미지의 생물(후에 이들이 '진동새'라고 명명한 존재)을 마주하며 겪었던 순간에 대한 기록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동새는 작품 내에서 Z라고 칭하는 시각 정보 대신 진동을 문자로 사용하던 문명이 정보를 기록하기 위해 사용한 일종의 문자였고, Z문명과 진동새는 일종의 공생 관계를 이룩하고 있었다. 미지의 존재가 반드시 시각 정보를 사용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깨뜨리며 시작되는 이야기 자체도 흥미로웠고, 한편으로는 인류가 미지의 우주로 쏘아 올린 글과 소리로 이루어진 '골든 레코드'가 떠오르기도 했다.

작품의 물질적 소재가 진동 언어였다면, 주된 내적 갈등은 화자이자 주동 인물인 집단 네트워크가 이 비효율적인 언어체계를 마주하며 겪게 되는 의문점들이다. 모든 개별 개체가 연결되어 즉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이들 입장에서 본 언어는 비효율적인 매개체였다. 작성하고 읽는 순간에 각각 발생하는 정보의 손실과 왜곡, 불완전한 정보 전달에 대해 이들은 아래와 같이 평하기도 했다.

게다가 기록이라는 것의 그 놀라운 비효율성이란.

어찌 보면 전지적인 존재라고도 할 수 있을 이들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언어에 대한 자평이 참신하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전지적이고 모두가 연결된 세상을 살고 있지 않은 우리의 입장에서도 언어를 바라보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상반된 생각 또한 동시에 들었다. 집단 네트워크는 있는 그대로의 정보를 왜곡 없이 공평하게 전달하지만, 이는 개별 객체의 독립성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방식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독립된 개별 객체가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상호 간에 정보를 전달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렇기에 각 객체는 완전무결한 정보가 아닌 불완전하고 추상적인 가늠을 기반으로 하여 생존을 이어나간다. 이런 세상이기에 각 객체는 자신에 대한 몰이해 혹은 본인의 의도에 의해 정보를 추상적인 언어에 실어 상대방에게 전한다.


인류의 언어란 이렇게나 모호하고 심오한 매개체라는 사실을 가공의 외계 인류를 통해 보여준 작가의 방식이 흥미로웠다. 이해할 수 없음에 대해 아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조차도 알 수 없는 본의를 어떻게 빚어서 전해야 하는지, 어떤 모양의 그림자를 통해 이데아를 전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 과정에는 어떤 의미가 파생되는지에 대한 다양한 고민을 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더 기다릴 수가 없었어요. 지금 당신을 만나러 와야 했어요."

우주선 내 책상에는 수많은 진동새가 같은 진동(말)을 품은 채 쌓여있었고, 필시 Z문명의 존재가 남긴 중요한 정보일 거라 생각했던 집단 네트워크는 진동의 해석 결과를 보고 허탈해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지만 개별 객체인 우리는 그 마음을 가늠해 볼 수 있다. 피상적인 문자 위에 호흡과 떨림이 덧입혀지며 이내 마음이 된다. 애틋함과 그리움, 다급함이 뒤섞인 사랑이라는 감정이 남긴 잔향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마음이란 이성과 논리만으로는 좀체 헤아릴 수 없는 추상적인 존재이기에, 이 어려움을 뛰어넘고 끝내 상대방에게 전해진 마음은 그토록 숭고하고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리라.


덧. 위와 같은 집단 네트워크의 개념이 작가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게 반가우면서도 흥미롭다. <늪지의 소년>이나 <인지공간> 같은 작품에도 전체가 연결된 존재들과 개별 객체 사이의 고민과 갈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소금물 주파수

기억을 잃고 망망대해에서 눈을 뜬 로봇 돌고래가 본 작품의 주연이며, 잃어버린 기억이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질감의 정체를 밝혀내고자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이야기를 전반적으로 이끌어나간다. 순차적으로 제시되는 단서나 복선을 통해 정체를 고민해 보는 과정도 흥미로웠고, 가공의 존재인 돌고래가 풀어내는 존재에 대한 고민을 통해 인류와 생명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고민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는 것 또한 인상 깊었다.


'HM-3102'라는 코드명의 로봇 돌고래 '해몽이'는 자신이 돌고래라고 생각하면서도 주변의 다른 존재와 자신을 빗대어보며 이질감을 느꼈다. 먹이를 먹지 않아도 되었고, 태양빛만 있으면 움직일 수 있었으며, 플라스틱이나 주파수 같은 정체 모를 용어들을 알고 있기도 했다. 그런 이질감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고, 이전에 자신과 유사했던 고래를 찾아 여정을 떠났지만 이내 다시금 연구원에게 회수되고 그제야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자신을 만들고 가르쳤던 '모아'의 할머니 '임영선 박사'에 대해서도 떠올리게 된다.


한 번은 돌아와야 한다. 알겠지? 그래야 다시 나아갈 수도 있다.

치매에 걸려 병원에 입원해 있던 할머니는 모아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 당시 모아는 이 말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다시금 이 말에 이끌려 울산으로 돌아왔고 이윽고 할머니의 뒤를 이어 해몽이와 마주하게 된다. 그제야 모아는 할머니의 말이 자신과 해몽이 둘 다에게 건넸던 말임을 넌지시 이해하게 된다. 인간이었던 할머니는 로봇 돌고래를 자신이 정말 돌고래라고 믿을 정도로 완벽하게 키워냈고, 자신의 손녀에게는 '모아'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기계와 인간, 돌고래와 사람이라는 점을 빼면 우리는 해몽이와 모아를 완벽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절차나 물성이 다를 뿐 하나의 존재로 빚어지는 과정 자체는 동일한 것이 아닐까? 작품을 읽고 나서 이 질문이 가장 진하게 머릿속에 남았다. 아직도 명확하게 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고민 자체만으로도 존재에 대한 다양한 각도의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고요와 소란

작품은 어느 날 사물로부터 소리를 듣게 되었다가 또 어느 날 홀연히 그 소리를 잃어버린 인류를 배경으로 한다.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인물은 목소리 기록관을 운영하는 '서해겸'과 그녀를 찾아온 '서영'이라는 인물이다. 작가는 이전에도 물질화된 감정, 호흡으로 대화하는 사람들, 시각이 차단된 인물 등을 보여주며 감각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가정과 해석을 제시했었는데, 본 작품의 시작점은 소리와 청각이었다.


주된 소재가 소리라면, 서사적 특징은 당연시할 만한 대전제와 관점을 자연스럽게 뒤트는 데에서 출발한다. 작품에서 사람들은 사물에서 왜 소리가 나는지에 대한 원인을 궁금해하면서 동시에 사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인류를 중심으로 하여 세상의 이치를 파악하려 하는,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고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연스레 사물에 영혼이 있다거나 신이 이를 부여했다거나 하는 가공의 원인을 도출해 내고자 애쓴다. 하지만 이는 출발점부터 잘못된 생각이었다. 일찍이 이에 대해 알아차린 이들은 사람들이 '거미줄'이라 부르는 특정 존재를 지나치며 사물의 소리를 듣게 되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됨을 가정하고, 이 거미줄을 만들어내는 '거미'라는 존재에 대해 탐구하게 되지만 이는 사람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학술적 배경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건 인간이 원하는 신의 모습이 아니니까요.

때로는 진실의 눈을 가리는 의도적 맹신과 곡해도 있는 법이니 말이다.


어린 시절 소리를 들을 수 없던 서영은 위 거미줄에 걸렸었지만, 소리를 들을 수 없던 탓에 더 예민해진 다른 감각 탓인지 어렴풋이 거미의 존재에 대해 알아차리게 된다. 일찍이 이에 대해 조사를 하다가 사회의 반대를 이기지 못했던 해겸은 이 이야기를 들으며 서영에게 자신의 가설을 설명한다. 거미줄을 치는 존재, 거미는 우주의 소리 수집가이며 인간을 특수 지향성 마이크로 사용했고, 사람들이 들었던 목소리는 그 현상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인간들의 주관적인 해석이었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이 부분이 본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었다. 너무도 자연스레 인류의 시선에서 출발했던 가정이 잘못되었다는 상황 자체가 논리적으로 납득은 갔지만 왜 그전까지는 이 방향으로 생각해보지 못했는가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기 때문이다. 당연시하는 개념이 뒤집힐 때의 감정이 흥미로웠다.


달고 미지근한 슬픔

읽으면서 머리가 가장 긍정적으로 지끈거렸던 작품이었다. 양봉가 '백단하'와 그녀를 찾아온 연구자 '이규은'의 대화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세상의 근간 자체를 뒤흔드는 규모로 점차 확장되며, 종국에는 다시금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민으로 수렴한다.


왜 모든 것이 거짓에 불과한 세상에서,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느낄까?

규은이 적은 이 문장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였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동일한 배경이라고 생각했던 작품 내 세상은 가상의 시뮬레이션 공간이었고, 물질세계에서 양자 큐비트의 데이터 세계로 이주한 인류는 점차 살아있다는 감각, '현존감'을 느끼지 못했고 집단 자살과 대규모 재생성 끝에 의도적으로 이 세상에 '몰두'하도록 학습되었다. 더 이상 이 세상의 진실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실제 세상인양 살아가도록 자신을 끊임없이 세뇌하는 것이다. 이런 세상에 몰두하지 못한 규은은 그럼에도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연구를 이어나가고 있었고, 벌을 관찰하고 싶다는 핑계로 단하를 찾아와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런 규은을 밀어내던 단하도 결국엔 규은과 함께 세상의 진실과 현존감에 대해 탐구하며 자신과 비슷한 이들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한 세상에 속한 이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온전히 관찰할 수 없다. 단하는 존재하지만 그 존재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슬픔을 달고 미지근한 슬픔이라고 표현한다. 아래 문장을 끝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하지만 그 슬픔에서는 여전히 달콤한 맛이 났다. 탐구할 가치가 충분한 슬픔이었다.


여기에까지 이르고 나면 단하와 규은이 처한 상황과 우리가 처한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진실이며 현실이라고 믿지만, 정작 우리 또한 어느 세상에 속한 시뮬레이션이 아니라는 증거를 도출해 낼 수 없다. 그들은 물질과 육신이 아닌 양자 큐비트에 의한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 고민했지만, 정작 우리도 단백질과 유기물로 이루어진 우리의 육신에 대해 아직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순간과 시간이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하늘에서 돌이 떨어질 것이 무서워 먼저 죽음을 택하는 닭이 될 수는 없다. 유한한 시간이,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고 이렇게 글을 쓰는 지금도 그 사실이 몸서리치게 두렵다. 하지만 살아가야만 한다. 달콤한 슬픔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겠다. 그런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비구름을 따라서

이야기는 '최이연'이라는 사람의 추도식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룸메이트 '보민', 이연이 즐겨했던 보드게임 '노바 파우치'를 만든 '정찬현', 함께 아르바이트를 했고 또 다른 세계에서 온 물건들을 함께 찾아다녔던 '강승희'가 만나 이연의 추도식 초대장에 대한 의문을 풀어나가는 과정이 작품을 전반적으로 이끌어나간다. 노바 파우치라는 보드게임이 이야기의 큰 흐름을 대표적으로 설명해 준다. 이 보드게임은 물건과 속성을 각기 다른 파우치에서 뽑아서 조합하고, 이 물건이 있을법한 세상을 말로 설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연은 이 보드게임을 하고 싶어서 보드게임 동호회에 왔다가 보민과 만나게 된다. 얼핏 보면 시간 때우기 용의 게임 같지만, 이연은 이를 통해 다른 세계에서 온 물건들을 떠올리는 일종의 연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무맹랑한 이연의 이야기를 반쯤 흘려듣던 보민이었지만, 종국에는 이연이 정말로 다른 세계에서 반투막을 통과해 넘어온 물건들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실제로 그들이 모인 장소에는 이연과 승희가 모았던 다른 세계의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이연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유하며, 존재할지도 모르는 다른 세상을 찾아 헤매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소한 존재가 아님을 깨닫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작품에서는 물질이 넘어오는 과정을 삼투압과 반투막을 통해 설명하는데, 설탕물에서 입자가 큰 설탕은 넘어올 수 없고 입자가 작은 물만이 이동하여 농도를 맞추는 과정에 빗대어 사소한 물건이나 존재만 반투막을 통해 다른 세상으로 넘어간다는 설명을 내놓는다.

이상한 일이지만…… 우리가 반투막을 통과할 수 없다는 건, 우리가 이 세계에 책임이 있다는 뜻인지도 몰라

다른 세상에서 넘어온 존재를 바라보고, 이를 통해 가보지 못한 세상을 상상하는 과정 자체보다는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민을 해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세상에 남아있고, 다른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의 존재가 사소하지만은 않다는 방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부정의 문장으로 긍정과 희망을 담아낸 아래 문장도 기억에 남는다.

돌멩이처럼 사소해지면 건너갈 수 있는 게 아니라, 애초에 돌멩이가 될 수 없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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