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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의 모든 것, 백수린 소설집

삶이란 그 누구도 섣불리 예단할 수 없기에 우리는 세상을 지긋이 관망한다

by 김주렁

0. 들어가기에 앞서

<봄밤의 모든 것>은 2025년 2월에 출간된 '백수린' 작가의 소설집으로, 총 7편의 소설과 '박혜진' 문학평론가의 해설, 그리고 작가의 말이 수록되어 있다.


1. 먹먹한 내면의 읍소

작가가 빚어낸 세상 속 감정은 작열하는 태양보다는 은근한 구들장에 가깝다. 비탄이며 회한 같은 감정조차 일순간 타오르기보다는 고요하게 끓어올라 마음을 착실하게 데운다. 그렇게 끓어오른 감정은 어느덧 차치할 수 없을 정도로 타올라 마음을 옥죄어온다. 담담하고 차분한 이야기에 무거운 감정을 싣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백수린 작가는 먹먹하면서도 무거운 감정을 빚어내는데 능하다. 작가의 이전 작품인 소설집 <여름의 빌라>와 장편 <눈부신 안부>에서 느꼈던, 낮고 깊은 한숨을 내뱉게 하는 기분을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도 느낄 수 있었다.


2. 작품 별 감상

1) 아주 환한 날들

작품의 화자인 '옥미'는 틀에 박힌 삶을 6년째 살고 있던 노년의 여인이다. 그녀는 짜인 대로 살아가는 자신이 태연하다고 여기며 불만이 없다는 듯이 말했지만, 어느 한 편으로는 자신의 내면을 숨기기 위한 방어기제에서 기인한 생각들이 종종 엿보였다. 악착같았던 삶은 옥미의 내면을 스스로 숨기고, 또 감추도록 했다. 일과 시간에 맞추어 신청했던 수필 수업에서 어떤 글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옥미의 모습에서도 자신을 숨기려는 모습이 드러나기도 했다.


자신을 지키고자 세상을 향해 쌓아 올렸던 마음의 벽을 넘어온 존재가 바로 한 마리의 앵무새였다. 잠시동안만 맡아달라는 자식의 부탁을 거부하지 못했던 옥미는 앵무새를 맡아서 잠시 돌봐주기로 했고, 잘 짜여있던 옥미의 생활에는 한 마리 새로 인한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평온했던 자신의 삶에 찾아온 앵무새가 처음에는 탐탁지 않았지만, 어느샌가 앵무새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피어났고 이는 자연스레 어린 시절 닭을 키우던 자신의 딸 인서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이 생각은 자신과 딸이 틀어지게 되었던 미상의 순간으로 자연스레 연결되었다. 옥미는 '돌이켜보면 딸아이의 마음이 멀어질 만한 순간은 많았다.'라며 자조 섞인 후회를 내비치기도 하며, '어떻게 이런 것들을 까맣게 잊었을까'라고 말하며 세상과의 재회를 다시금 반갑게 맞이하기도 했다. 앵무새와 함께 천변으로 산책을 나선 옥미의 모습을 보면 마치 한 마리 파랑새가 그녀에게 찾아와 다시금 세상으로 그녀를 인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작품의 후반부에 결국 앵무새는 옥미를 떠나 자식들의 품으로 돌아간다. 그러고 나서 옥미는 이전에는 한 글자도 쓰지 못했던 빈 페이지에 '앵무새가 가버렸다'라는 문장을 쓴다.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는 것이 두려워 아무것도 쓰지 못했던 옥미였지만, 그녀는 어느새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계기가 얼마나 크고 작은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아주 자그마한 계기라도 마음이 다시금 열리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음에 대해 옥미의 일상을 바라보며 느낄 수 있었다.


2) 빛이 다가올 때

빛은 손에 쥘 수는 없을지라도 확실하게 아름다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작품의 제목은 그런 의미에서 정해진 것이리라 나름의 추측을 남겨본다.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인물은 '나', 그리고 자신보다 여덟 살 많은 사촌이었던 '인주 언니'이다. 작중 화자인 나는 인주 언니가 후광이 나는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공부를 잘하기도 했고 시력을 잃어가는 인주의 어머니였던 큰 이모를 착실하게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인주와 재회한 것은 뉴욕에서였다. 나는 한국에서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미국에서 간호사생활을 하고 있었고, 인주 언니는 교수 생활을 하다가 연구년이 되어 교환교수로 뉴욕에 와있었다. 나와 인주 언니의 재회 이후에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인주 언니는 좋든 싫든 일찍 철들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안 좋았던 어머니를 챙겨야만 했고, 교수가 된 이유도 엄마의 꿈이 교수였기 때문이었다. 언니와 얘기를 나누던 나는 자연스레 자신에 대해서, 과거에 대해서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건강이 좋지 않은 어머니와 살았지만 항상 후광이 난다고 생각했으며, 어느새 교수가 되어 마주하게 된 인주 언니를 바라보며 나는 세탁소를 하던 자신의 부모님을 떠올렸다. 과거의 나는 영어를 배우며 자신이 부모님을 앞서갔음에서 오는 '묘한 슬픔이 뒤섞인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었다. 서로의 관계와 처지가 뒤섞이면서 생겨나는 이 묘한 감정이 제법 기억에 남았었다.


그런 그들 사이에 카페 '룩스 Lux'에서 일하는 '개리'라는 대학생이 등장하게 된다. 함께 찾아가던 카페의 점원이었던 개리와 그녀들은 친하게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고, 이후에는 함께 놀러 다니는 사이로까지 발전했었다. 당시 나는 개리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던 것처럼 보였지만, 나이가 스무 살 정도는 차이가 나는 인주 언니가 개리를 단순한 친구관계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나는 뒤늦게 깨닫게 된다. 하지만 나의 머릿속 인주 언니는 후광이 나는, 성인(聖人) 같은 사람이었기에 사회 통념에서 벗어난 이 상황을 이성적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인주 언니는 개리에게 고백을 한 후에 차였다.


이야기는 이후 시간이 흘러 내가 인주 언니의 나이가 된 시점으로 연결된다. 다시 홀로 뉴욕을 찾아온 나는 인주 언니와 함께 했던 과거를 떠올린다. 과거에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어머니와 산책을 하던 순간이 축복이었다고 인주 언니는 말했다. 세상의 빛을 어머니에게 묘사해 주며, 그렇기에 엄마와 매일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그 순간에 대해서. 그리고 빛에 대한 회상은 인주 언니가 개리를 바라볼 때 빛나던 얼굴로 이어졌고, 이 생각은 다시금 나의 어린 시절 첫사랑에 대한 기억으로 이어졌다. 마치 한 줄기 빛이 내리쬐는 것처럼, 여러 생각이 하나의 줄기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빛이 다가올 때'라는 작품은 우리 모두에게 빛이, 사랑이, 마음이 다가오는 순간이 있었음을 유려한 모습으로 상기시켜 주는 작품이었다.


3) 봄밤의 우리

작품의 화자는 '보라'라는 인물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일본인 '유타'와 알게 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후에는 프랑스에서 둘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 보라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나서의 일상, 그보다 더 시간이 지난 후에 유타와 페이스북으로 연락이 닿은 후의 이야기가 순차적으로 제시된다.


교실 내 자신을 제외하고는 유일한 동아시아인이었던 유타에게 보라가 도움을 요청하며 둘 사이의 관계는 시작된다. 보라는 회화에 능했고, 유타는 문법이나 읽기에 강했다. 하지만 유독 유타는 시간 표현, 시제에 대해서만큼은 약했다. 그리고 작가는 이 점을 유타라는 인물의 특성을 풀어내는데 잘 사용해 낸다. 남들보다 많은 나이에 대학 생활을 하던 유타는 그럼에도 초조해하거나 부담을 크게 느끼지는 않았고, 다만 고향에 계신 할머니가 건강이 더 안 좋아지시면 당장에라도 일본으로 돌아가 돌봐드릴 것이라고 말하는 인물이었다. 연극에 대해서도 일회적으로 사라지기 때문에 좋아하던 유타와 미래에도 영원히 남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보라의 생각은 상이했다. 보라는 유타에 대해서 '시간 개념이 희박했다'며 회상하기도 했다.


시제를 잘 틀린다는 특성이 시간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가치관이나 성향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여러 인물과 순간에 얽혀있는 생각과 이야기들을 잘 엮어내는 능력이 작가의 강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보라의 생각과는 조금 다르게 살아가는 유타를 보며 그녀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다는 점도 인간관계가 가져다주는 강점이자 특징을 단편적으로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보라는 바쁜 일상을 보내다가 우연히 길에 버려진 개를 데려와 키우게 된다. 그녀는 거기에서 큰 위안을 얻고 개를 소중히 대하지만, 세월은 야속하게도 흐르고 개도 하루가 다르게 유약해져 갔다. 그리고 그녀는 그때 할머니를 돌보던 유타를 떠올리기도 했다. "우리가 몇 번의 봄을 더 함께 볼 수 있을까?"라고 개에게 되뇌던 보라였지만, 사흘 뒤 개는 숨을 거두고 만다. 비록 한 줄의 문장이지만 그 안에서는 짙은 농도의 감정이 느껴졌다.


작품의 종반부에는 유타의 할머니가 돌아가시게 되고, 유타는 보라에게 전화를 걸어 목놓아 울음을 토한다. 유타가 걱정되었던 보라는 이후 유타와 매일 밤 통화를 하기도 했다. 그런 유타와 대화를 나누던 보라의 일상은 문득 과거 개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봄밤과 닮은 날을 마주하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 대해, 할머니를 떠나보내고 힘들어하던 유타에게 털어놓지 말자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유타에게 이 슬픔을 털어놓는다. 제멋대로 슬픔의 경중을 따지며 유타가 자신의 슬픔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라고 속단했던 보라의 생각과는 달리, 유타는 진심으로 보라의 슬픔을 위로해 주었다. 배려에서 나온 속단이 서글프면서도 일면 납득이 가기는 했지만, 이 모든 것을 포용하고 보라를 위로하는 유타의 초연한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4) 흰 눈과 개

작품의 주인공인 '나'가 외국인 사위와 결혼해 살고 있는 딸 '진아'를 찾아가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같은 상황을 둔 아버지와 딸이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음이 인상 깊었던 작품이었다. 나는 첫째인 아들보다 둘째 딸이었던 진아에게 물심양면으로 진심을 다하고 화도 잘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진아의 입장에서 본 아버지는 아들만 꾸짖고 아들에게만 관심을 보이며 자신에게는 기대가 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 멀어진 부녀 관계가 이국인 스위스에서 서로의 진의를 마주하는 과정이 본 작품의 주된 골자이다.


서로를 힐난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더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과정에서 피어난 오해는 뼈아팠다. '청춘을 희생해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돈을 버는 것. 그것은 지독히도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가 사랑을 베푸는 방식이었다'라고 말하던 내가 딸에게 위선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딸과 함께 나선 스위스의 산책길에서 그는 눈보라 앞에서 나약해진 자신이 아니라 나약해졌기에 딸을 도울 수 없으리라는 점에 대해 두려워했다. 겉으로는 탐탁지 않아 하면서 딸과 화해할 기회를 잡지 못하던 그였지만 내면에서는 아직도 딸을 아끼고 염려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장면에서 잘 나타났다. 굳이 말로 전하지 않더라도 마음을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서로의 마음이 왜곡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작품에 등장하는 부녀지간도 서로를 무작정 싫어한다기보다는 마음을 채 헤아리지 못한 것에 가까웠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산책로의 휴게실에서 본 한 마리의 개였다. 스위스에서도 딸과 한바탕 다투고 난 후에 그는 홀로 산책길을 거닐었고, 그러던 중 매일 같은 시간에 노부부가 한 마리의 개를 데려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문득 딸을 불러 노부부와 개가 찾아오는 휴게실로 함께 향했다. 휴게실에 도착해 초조하게 그들을 기다리던 그의 앞에 이윽고 노부부와 개가 나타났다. 그곳에서는 다리가 한쪽 없는 검은 개가 신이 난 채로 눈밭을 뛰어놀고 있었다. 어느새 아버지와 딸은 같은 장면을 바라보며 서로의 생각을 헤아리고 있었다. 때로는 수백 마디의 말보다 일순간의 장면이 강렬하게 마음을 움직이기도 한다. 아버지는 자신도 왜 딸에게 이 장면을 보여주려고 했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했고, 함께 개를 바라보며 어떤 말을 건네 관계를 바로잡을지 고민하였지만 딸인 진아는 어느샌가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가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의미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진의에 비해 오해는 얼마나 얕은 개울인지,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은 얼마나 하잘것없는 핑계에 불과했는지 등의 서로를 오가던 생각들은 눈밭을 뛰놀던 검은 개의 모습에 눈 녹듯 씻겨 내려갔다.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은 말뿐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5) 호우

본 소설집의 마지막 세 작품인 '호우', '눈이 내리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는 동일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일종의 연작소설이다. 첫 작품인 호우에는 결혼한 이후 아파트에 입주한 소희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현실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을 동경해 왔던 소희는 동아리 선배의 결혼식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했고, 그 남자는 소희의 기대처럼 우직하게 한 직장에서 근무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는 생활력이 강하고 성실한 남편이었다. 소희의 동경은 아마 자신이 갖지 못한 것들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본 작품의 주된 소재는 소희가 살고 있는 아파트 옆동네에 위치한 아직 재개발이 진행되지 않은 주택가의 한 노인이다. 파란 대문 집에 살고 있는 노인은 대체로 집 앞 의자에 앉아있었고, 그곳엔 노인이 가꾼 여러 화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풍경을 바라보던 소희는 친해진 주변 이웃들에게 파란 대문 집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런 소희를 보면서 '참 감성적인 분'이라고 말한다. 감성적이라는 표현 자체가 부정적이지는 않지만, 현실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을 동경한다는 소희의 말과 겹쳐서 생각해 보면 그녀는 현실에서 조금 이격 된 자신의 삶을 썩 내켜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어린 시절 읽었던 '셰익스피어 4개 비극' 책 안쪽에 쓰여있던 '감정이 이성을 압도해 발생한 비극'이라는 표현은 책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내면에 대한 무의식적 표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작품의 중반부에는 아름답게만 바라보던 파란 대문 집에 살고 있는 노인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부분이 등장하는데, 멀리서 보면 희극이요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에 걸맞게 노인은 하루하루 힘든 삶을 견뎌내고 있었다. 비가 내려서 폐지를 모으러 갈 수 없던 노인은 하루하루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었고, 몸은 어느덧 성한 곳이 없었다. 이 현실의 고통이 소희의 현실에서 약간 동떨어진 관점을 재차 강조해 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소희가 작금의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바꾸려는 것은 아니었다. 동네 친구가 된 희경의 아들이 토끼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 트라우마에 생겨 학교에서 울음을 참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걱정하던 소희와는 달리 그녀의 남편은 그 상황을 공감하고 함께 걱정해주지는 못했다. 토끼를 다시 사주면 되는 거 아닌지, 애당초 왜 일찍 죽는 토끼를 데려온 것인지 남편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질문을 소희에게 건넸다. 이에 대해 소희가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답을 했는지에 대해서 작품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자신의 동경과 현실 사이에서 괴리와 방향성의 상실을 조금은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소희는 파란 대문 집 앞에 노인도 없고 화분도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노인은 현관문 앞에서 죽은 채로 몇 주만에 발견되었었다고 한다. 그녀는 매번 먼발치에서 노인의 집을 바라보았을 뿐, 대화 한 번 나눈 적이 없었지만 왠지 그녀는 머릿속에서 노인의 죽음을 되뇌고 있었다. 그녀는 노인의 죽음에 대해 심란해하면서도 이전에 남편이 토끼에 대해 반응했던 것을 떠올리며 자신의 괴로움에 대해 고하지 않았다. 크게 연관이 없어 보이던 토끼의 죽음, 소희가 몇 차례 시도했지만 죽어버린 화분들, 그리고 노인의 죽음은 자연스레 연결되어 소희와 독자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 생각의 타래는 생명과 죽음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 한때 존재했던 생이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없다니. 그건 대체 무슨 말이지?', '존재했던 삶의 부재가 마음속에 그려놓는 드라마를 조용히 응시했다'와 같은 소희 내면의 독백이 그녀 내면의 갈등을 잘 드러내주었다. 생사에 대하여, 삶의 가치관에 대하여 다양한 방향으로 고민하지만 쉽사리 답을 내리지 못하는 소희의 모습에 개인적으로는 꽤 몰입할 수 있었다.


6) 눈이 내리네

본 작품의 주인공인 다혜는 20살이 되어 모과나무가 자라던 이모할머니댁에서 하숙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성인이 되었다는 설렘과 어린 시절이 끝나버렸음에서 오는 아쉬움, 그리고 이모할머니 댁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약간은 불편한 마음이 뒤섞인 채로 이야기는 막이 오른다. 그리고 이 기조는 작품에 지속적으로 유지되는데, 다혜는 매 상황에서 양가적 감정이나 상대방과 자신을 비교하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자신도 어느 정도 실력에 자신이 있으면서도 자신보다 우월한 동급생들이 있음을 보며 자부심과 열등감을 번갈아 느끼기도 하고, 이제는 노쇠한 이모할머니를 보며 자신의 젊음에 대한 우월감을 느끼기도 한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하면서도 동시에 커져가는 불안에 몸서리치기도 하며, 친구인 규희가 좋아했던 준우가 자신과 연인이 된 것을 보면서 자존감을 채우기도 했다. 이런 복합적인 인물상을 여러 사례와 다혜의 독백을 통해 잘 보여주었다.


이모할머니와 비교하며 자신의 젊음에 대한 우월감을 확인하던 다혜였지만, 그녀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젊음이 언젠가는 사라질 것임을 알고 있었고 이를 두려워했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준우와 헤어지고, 그 이후에도 시간은 계속 흘렀다. 어느새 연로해진 이모할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그 이후 대학교 동기 중 한 명도 부고를 보냈다. 그렇게 지나가버린 젊음과 죽음에 대해 반복적으로 떠올리던 다혜는 모과나무집에 찾아가 마지막으로 이모할머니를 마주했던 20대 후반의 과거를 회상했다. 당시 스물여덟 살이었던 다혜는 20살 때의 패기를 어느새 잃어버린 후였고, 더 이상 자신에게 무한한 가능성이 없다고 자조적인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그런 다혜를 앞에 둔 이모할머니는 어떻게 지내셨냐는 그녀의 질문에 눈을 반짝이며 한글을 배우고 있다고 답했다. 지금까지와는 정 반대의 상황이 펼쳐졌다. 언제나 새로운 것을 배우고 나아가던 젊음을 누리던 다혜는 더 이상 없었고, 인생의 황혼기에 건강이 좋지 않아 언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이모할머니는 그 순간에도 새롭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앞에서 착실하게 쌓아 올렸던 감정의 비교가 이 장면에서 정확하게 반대로 사용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다혜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한글을 배우는 이모할머니의 행동을 부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렴풋이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작품의 마지막 순간, 결국 자신은 아직도 세상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음을 고한다. '주제넘은 오만. 어리석은 소리. 다혜는 아무것도 몰랐다. 여전히, 지금도'라는 문장과 함께 작품은 마무리되지만, 다혜의 고민은 아마 생이 다할 때까지 치열하게 계속되었을 것이다.


7)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유를 알 수 없는 무기력증에 시달리던 '나'의 시점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오랜만에 만난 대학교 동아리 친구였던 네 명(나, 소희, 다혜, 주미)은 40대의 끝자락에 리조트로 여행을 떠난다. 오랜만의 재회에 회포를 풀며 이들은 과거를 회상하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데, 주미는 문득 길가에서 까마귀를 보고 화들짝 놀란다. 그리고 이후 밤이 되어 과거의 추억들을 나누던 이들의 대화 주제는 나이가 나이인지라 질병과 죽음, 건강, 생명으로 연결되는데 여기에서 이전 작품에 등장한 소희와 다혜가 겪었던 과거들도 조금은 언급된다.


그러던 중 소희는 문득 숙소의 옷장 안에서 오르골을 발견한다. 그 앞에 앉아 즐거워하며 음악을 듣던 이들에게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주미는 자신이 과거에 새를 무서워하게 되었던 일화를 소개한다. 작품의 제목인 '그것은 무엇이었을까?'는 주미가 과거에 겪었던 사건에서 기인한다. 첫 아이를 갑작스럽게 잃었던 주미 부부는 12년 전 과거에 독일의 한 소도시에서 머물게 되는데, '파바바밧. 타타탓.' 하는 소리가 벽난로에서 들려왔다고 한다. 한참을 고민하던 주미와 남편은 비둘기가 굴뚝으로 떨어져 탈출하기 위해 내는 소리라고 추론했지만, 당장은 해결할 방법이 없었기에 다른 방에서 잠든 후 집주인에게 이 상황을 해결해 달라고 연락했다. 하지만 소통에 오류가 있어 관리인이 해결을 아직 하지 않은 채로 주미 부부는 다시 그 집으로 돌아왔고, 여전히 벽난로에서는 그 소리가 났더랬다. 그런데 며칠 후에 관리인이 찾아와 열어본 벽난로에는 비둘기는커녕 새의 깃털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의아한 채로 넘어가야 했지만, 이후 그 집을 빌려줬던 친구가 같은 상황을 겪은 뒤에 벽난로를 열어보니 비둘기가 튀어나왔다는 말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제야 주미는 과거에 자신이 머물렀던 집에도 비둘기가 있었던 것이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주미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최악을 상상하며 얼마나 쓸데없이 인생을 낭비하며 살고 있는지 마침내 깨달았다'라고 덧붙인다. 주미가 살던 집 굴뚝에 빠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둘기는 결국에 자신의 힘으로 기적같이 굴뚝에서 탈출했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의 주미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섣불리 삶의 가능성을 예단하고 최악의 상황에 매몰될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아는 것과 실천할 수 있는 것은 명확하게 다르다. 삶의 고해(苦海)에 매몰되어 무기력에 잠겨있던 나에게 굴뚝을 빠져나간 비둘기는 한 줄기 가능성처럼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를 마친 주미와 나는 아침 하늘에 퍼져나가는 빛을 바라보며, 이후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다만 한 줄기의 빛으로도 생을 이어나갈 수 있음에 감사하며.


3. 마무리하며

삶이란 이토록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존재이며, 한 면만 바라본 채 쉽사리 예단하는 오만을 저지를 수는 없음을 백수린 작가의 작품들을 읽는 동안 떠올릴 수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차분한 마음으로 작가가 빚어낸 세상을 바라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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