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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렁 Jul 03. 2022

[짧은 감상문] 그레이 박스 이후:수집에서 전시까지

긍정적 의미의 그레이 존을 위해 전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설명서

부산 다대포나 삼락 쪽으로 갈 때 종종 지나치며 언젠간 가봐야지 하던 부산 현대미술관에 다녀왔다. 공연, 영상에 비해서는 그림 쪽에 관심도가 떨어지는 편이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오늘 마침 할 일도 없고 해서 숙원사업을 해결하는 느낌으로 길을 나섰다.


현재 미술관에서는 아래의 4개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나는 이 중에서 두 번째, 세 번째 전시를 보고 왔다.



'거의 정보가 없는 전시'도 흥미로웠지만, 우선은 그레이 박스 전시에 대한 감상을 남겨보고자 한다.


그레이박스 전시의 리플렛. 은박의 회색이 겉을 감싸고 있는 심플한 디자인.

처음 전시장에 들어가기 전 읽었던 설명문이 인상 깊어서 전시장에 들어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술과 관점, 표현 방식에 따라 전시 공간을 규정하고 설명하는 단어가 다른 것이 흥미로웠다. 관련하여 아래 3개의 개념이 등장한다.

화이트 큐브

블랙박스

그레이 박스(그레이존, 스튜디오)

화이트 큐브는 전통적인 회화와 조각을 위한 공간, 블랙박스는 필름과 비디오 투사를 위해 조성된 어둡고 밀폐된 공간이라고 한다. 여기까지 설명을 읽고 나니 그레이 박스라는 단어의 의미와 포지션이 대강 그려졌다. 그 두 개의 개념이 중첩된 교집합의 영역을 그레이 박스로 규정하고 있었다. 거기에 추가로, 춤, 연극 등의 퍼포먼스 장르도 이 영역에 함께 포함된다고 한다.


기술의 발전과 예술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당대에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의 최정점을 활용하여 작가들은 새로운 인상과 경험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초기 시네마토그라피로 상영된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 움직임을 보여주는 시각장치이자 장난감인 '조이트로프(Zoetrope)' 등의 예시가 대표적으로 기술과 예술이 융화된 사례로 볼 수 있다.

사진 1) 기차의 도착, 사진2) 조이트로프

그런 의미에서 보면 디지털 시대에는 그 표현 방식과 소재가 나날이 확장되고 있다. 백남준 선생님의 비디오 아트가 효시 격이 되겠다. 지금은 단순한 영상을 넘어서서 VR, AR, 메타버스 등 다양한 표현 방식이 등장하고 있으며, 기술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던 그림에도 NFT 기술이 가미되어 예술과 기술의 경계선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전시가 인상 깊었던 것은 전시되어있는 작품들이 수려한 것도 있지만 전시에 대한 고민과 발상 그 자체에 있다. 전시장 안에는 다양한 포맷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영상물, 마우스로 직접 움직여볼 수 있는 3D 캐드 이미지, 3D 이미지 영상과 이를 실물로 전시해놓은 모형, VR 장비를 착용하고 보는 영상, 관람자가 선택하여 볼 수 있는 영상, 디지털 페인팅이라고 소개되어 있는 백그라운드 조명이 포함된 그림 등 실제로 그 형태와 방식이 다양하면서도 현대적인 방식들이었다.


전시전 입구에 쓰여있는 설명을 끝까지 읽어보면, 이런 다양한 구성의 이유를 알게 된다. 궁극적으로 이 전시를 통해 고민해보고자 했던 것은 이런 새로운 기술들이 포함된 예술 작품들을 어떻게 전시할까에 대한 것이었다. 이렇게나 다양한 표현 방식과 매체가 생겨나고 있는 현시점에 기존의 화이트 큐브 형태의 전시가 적합한지, 그렇다고 영상물만을 고려한 블랙박스 형태로 갔을 때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고민해보고자 실제 작품을 가지고 이리저리 배치해본 느낌이었다.


설명을 읽지 않고 단순히 나열된 작품들만 봤더라면 그 감상이 덜했을 것 같다. 그런데 전체적인 틀 관점에서 전시를 바라보니 느낌이 남달랐다. 전시장 중앙에는 VR 장비가 4대 있어서 사람들이 순차적으로 영상을 감상하며, 다른 공간에는 리클라이너 의자와 함께 3개의 TV가 영상을 보여준다. 그 옆 장소에서는 헤드폰을 끼고 마우스를 조작하여 원하는 영상을 감상하며, 뒤쪽 별도의 공간에는 블랙박스처럼 주변을 어둡게 해 놓고 영상을 상영하고 있다. 그 중간 동선에는 빛을 밝게 비추는 디지털 아트가 자리해 있으며, 또 다른 공간에는 3D 영상물로 나오고 있는 조형물이 실제로 전시되어 있다. 이 전시 자체가 그레이 박스에 대한 물음이자 나름의 답변이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동선의 바닥에 위와 같이 전시에 대한 실제 실행방안과 보완책을 써놓은 점이었다. 이 외에도 공간 사이의 거리를 고려하여 영상물의 볼륨을 설정해야 한다는 등 전시전 자체가 그레이 박스 전시 방식에 대한 매뉴얼이자 실례라는 느낌을 받은 것은 위와 같은 설명들도 한몫했다.


전통과 관행은 절대적이고 강압적인 명제여서는 안된다. 예술은 독립된 학문이 아니며, 비판과 평가를 통해 성장해나가야 한다. 아무리 잘 만든 예술품일지라도 결국에는 Delivery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전시는 전통적인 예술과 새로운 매체를 분리하고 각기 다른 전시 방식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그레이존을 만들어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분화가 아닌 융화를 향한 방향, 그레이존의 현명한 활용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이 전시를 보며 고민해보게 되었다. 꽤나 흥미로운 경험이었기에 이렇게 글로 짧은 감상을 남긴다.


강렬했던 이미지들이어서 함께 공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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