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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리 Oct 22. 2024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만성 ‘위식도 역류질환’으로 인한 변화


내가 느끼는 불안들을 수다스럽게 늘어놓다가 멈춘 지 어언 2년. 그간 바쁘다는 핑계, 그리고 내 경험과 마음을 너무 주책없이 떠벌린 것은 아닌가 하는 부끄러움과 주춤거림으로 인해 브런치를 내팽개쳤다. 그러나 이곳에 발 길을 끊었다는 것 외에 내 삶은 여전히 흘러가기를 멈추지 않았다. 새로운 곳에서의 직장생활, 숱한 여행, 원하던 시험 합격 등 언뜻 보면 꽤나 잔잔하고 그럴듯한 사건들이 삶의 자리를 차지했고, 자리자리마다 불안, 우울, 환희, 평화가 함께 했다.


상술한 대로만 삶이 평탄히 흘러갔다면 아마 내가 이곳에 돌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다시 펜을 든 건, 아니 키보드에 손을 얹은 건 내 불안이 끝끝내 수험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토해 낸 ‘역류성 식도염’때문이다.

*정확한 질환명은 ‘위식도 역류질환’이나, 본 글에서는 ‘역류성 식도염’, 또는 ‘식도염’이라고 표현하겠다.


여름이었다. 시험 준비가 절정에 이르며 불안함과 악몽을 겨우 견딘 시기이다. 나를 꽤나 자주 괴롭혔으나 그리 큰 영향력은 없었던, 불안하고 예민한 사람이라면 흔히 겪어 봤을 식도염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한 채로 불쑥 나타났다. 이번엔 내 삶을 기필코 망가뜨리겠다는 결심이라도 한 듯이 거칠고 선명하게. 원래는 적당한 관리와 치료가 있으면 한두 달 만에 사라지던 사소한 불청객이었는데, 작년에 재발한 그날 이후로 떠날 줄을 모르고 나를 망쳐 버리고 있다.


나름 덤덤히 내 병을 글로 풀어내기까지는 정말 많은 과정들이 있었다. 삶의 한 켠에 만성질환의 자리를 내어준다는 것은, 이전 삶에 대한 이별과 애도의 과정이자 새로운 삶에 대한 치열한 적응이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실제로 나는 재발 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직면할 때마다 만나던 연인과 헤어졌을 때 느꼈던 감정들을 엇비슷하게 느꼈다. 겪어보기 전엔 ‘겨우 이별, 겨우 만성 위장병 따위‘ 였고, 겪고 나서는 ’ 사람의 모든 행복과 생기를 앗아갈 수 있는 것, 이별. 그리고 식도염‘이 되었다. 이를 몇 줄로 표현하기엔 너무 서운하여, 나중에 좀 더 긴 문장들로 촘촘히 써내려 가고자 한다.


그런 과정들을 지나면서 나에게는 다양한 변화들이 생겨났다. 식도염이 없었다면 절대로 변하지 않았을 것이리라. 하는 수 없이 변해가는 내 모습이 일편 낯설고 서글프다. 병이 주는 고통 까짓 거 잠과 술에 잔뜩 취해 순간 잊으면 그뿐인데, 젠장. 변화를 느끼는 마디마디마다 나를 괴롭히는 못된 생각들이 불쑥 고개를 든다. 하지만 변화를 멈출 수는 없다. 나는 만성질환을 언도받은 새 삶에 적응해야만 하는 새내기이다.


체감하는 변화 중 가장 빈번히 느끼는 것은 식습관이다. 나는 졸지에 스스로에게 고용당한 영양사가 되었다. 매운 음식은 최대한 지양하기. 끼니에는 반드시 채소를 포함시키기. 차가운 물과 탄산음료 마시지 않기. 영양사가 세워 준 원칙들을 바탕으로 슬기로운 식사생활을 하는 중이다. 하루 세끼 다 라면으로 때울 수 있었던, 엽떡은 보통맛부터 시작이라는 철칙을 내세웠던, 식사 끝에는 반드시 탄산음료의 청량한 따끔거림으로 입을 가득 적셨던 과거의 나는 자취를 감췄다. 덕분에 이제는 고춧가루만 들어가도 입 안이 화끈거리니, 영양사의 업무 성과는 썩 나쁘지 않다.


일상에서 눕는 시간이 거의 사라진 것도 꽤나 급격한 변화이다. 전 국민의 의학 상식인 ‘먹고 바로 누우면 역류성 식도염이 심해진다.’는 진리를 나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재발한 이후 아주 아플 때를 빼고는 숟가락을 완전히 내려놓은 후 3시간 이내에 절대 눕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눕지 않고 할 수 있는 소활동들을 자주 하게 되었다. 가볍게 산책하기, 외출할 일이 있으면 못 눕는 김에 그냥 다녀오기, 이렇게 앉아서 글을 쓰기. 누워 있었다면 포슬포슬한 이불이 내 등을 절대로 놓아주지 않았을 텐데, 눕지를 못하니 의외의 부지런함이 내게 머쓱한 인사를 건넨다.


가장 달라진 것은 음주습관이다. 알코올 중독은 아니었지만(자가진단도 해 봤다. 정말 아니다), 친구들과 약속이 있을 때나 주말에 가족들과 맛있는 것을 먹을 때 꼭 술을 곁들이는 애주가였다. 횟수로 따지면 평균 주 2~3회 정도. 더 마실 수 있고, 더 마시고 싶지만 혹시 중독이 되지 않을까 싶어 나름 조절한 횟수이다. 식도염 환자에겐 당연히 이 정도의 음주도 허용되지 않는다. 사실은 절음하는 것이 맞지만, 그렇게 되면 스트레스 때문에 더 증상이 심해질 거라는 허울 좋은 핑계로 월 2회 정도의 음주를 하고 있다.


이런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현실에 처음에는 심리적 거부반응이 너무 심했다. 먹는 것, 눕는 것, 마시는 것을 인생의 삼락으로 알고 살아왔는데, 그런 즐거움들이 금지된 이후로 알록달록했던 삶에서 채도가 사라졌다. 쾌락을 즐기는 이에게 무료함은 무료함 이상의 재앙이다. 채도 낮은 단조로움 속에서 생기를 찾아야 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과제는 지금도 수행 중이다. 완수율은 그닥이다.


그러나 나를 망가뜨리러 매서운 얼굴을 하고 찾아온 식도염을 상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변화한 내 삶이, 모순적이게 희망적이고 기특하다. 건강을 위해서는 진즉 도모해야 했던 변화인데, 몸에 좋지 않은 습관들을 너무 오랫동안 벗삼았다. 아마 식도염이 아니었다면 나는 불안한 삶에 쾌락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어리석은 선택을 끊어내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토록 단호하고 무서운 계기로만 변화하는 내 의지가 개탄스럽지만, 나는 아팠다가, 아픔으로 인해 다시 건강에 가까워지는 중이다. 나를 망치러 온 식도염이, 나의 건강을 구원하고 있다.


여러 변화로 인해 처음 재발했을 때보다 현재는 많이 호전이 된 상태이나, 완치는 아니기에 계속해서 변화에 순응하고 있다. 희망적인 척하며 글을 써내려 갔지만 솔직하게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얕은 잠을 잘 때가 많다. 평생 식도염과 끔찍한 동행을 해야 할까 봐 두렵고, 어떻게 하면 나아질 수 있을지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늘 부산스럽다. 그러나,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대도 나는 괜찮을 수 있다. 괜찮아야만 한다. 식도염이 구해다 준 나의 건강이, 앓느라 흘려보낸 세월을 물어내리라 믿는다. 합리화라고 해도 좋다. 정신승리도, 승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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