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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격의 시간

-반란-

by 희수 Feb 0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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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이 글귀가 나를 향한 메시지 같았다. 늘 가방에 이 책을  넣어 가지고 다녔다. 중2 때였다.




중 2병

나도 이 무시무시한 병을 앓았다. 사실 엄밀히  따지나에게 중2병은 한 때 잠깐 지나가는 사춘기의 증상이 아니라 우울증의 발현이라고 보는 게 맞다.

이때 난 엄마에게 혹한기 눈보라처럼 덤벼들기 시작했다. 엄마가 설거지라도 시키면 남동생을 가리키며

" 왜 나만 시켜! 도 시켜! 내가 여자라고 나만 시키는 거야? 그런 게 어딨어? 헌법에 나와 있어?"

라고 한다든지, 밭에서 일하는 엄마를 위해  물도 안 가져왔다고 핀잔하면

" 엄마가 산꼭대기 밭에서 일하는지, 수면밭에서 일하는지, 어떻게 알고 물을 갖다 줘, 말이 돼?"

라며 어린 시절과 달리 대거리를 하곤 했다.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불쑥불쑥 예고도 없이 툭 튀어나오는 통에 엄마가 적지 않게 당황스러워했다. 그때 자주 들었던 말이

"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였다.  성격에 문제가 많다고 여긴 것이다. 어릴 땐 욕심 없고 순하기만 하다고

" 계집애가 야무지지 못해 어디다 써먹어 "

라고 했었는데, 사춘기가 되자 순한 아이가 예민하고 못된 아이가 돼 버렸으니, 큰 일이라고도 했다.


몇 살 때인지, 아마 단어를 하나 둘 익혀 언어가 확장되던 시기였던 것 같다.

" 그 건 식은 당 먹기지 "

라고 내가 말하자, 엄마는

" 뭐? 다시 말해봐 "

라고 채근하며 한심하게 바라봤었다

이처럼 갑과 을의 관계였던 모녀관계가 중2 즈음부터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식은 죽'을 '식은 당'이라고 했던 나의 언어 수준, 어휘력이 이 시기를 기점으로 엄마를 앞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전엔 감히 상상도 못 했던 발칙한 계산도 하고 있었다.

 

엄마는 아빠와 싸운 후 걸핏하면 집을 나갔다. 어렸을 땐 그 게 싫었는데 중2 때부터는 부모님이 이혼하기를, 기도까지 하며 소원했다. 이유는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였다.

첫째 부모님의 싸움을 안 볼 수 있다.

둘째 할아버지 주사를 안 들을 수 있다.

부모님 싸움은 말할 것도 없고 할아버지 역시 안 보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즉 부모님이 이혼하면 4명의 삼촌 중 1명이 할아버지를 모셔갈 , 삼촌들이 중학생인 나에게 할아버지를 모시게   것 같진 않았다. 그러나 나의 이런 계산과 달리 엄마는 어김없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역전

고등학교 유학은 집안 형편을 생각하언감생심이었지만 아빠의 교육열이 워낙 대단했기에 가능했다. 군 단위 시골에서 도시로 그렇게 유학을 갔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까지의 삶 중 부모님께 가장 고마운 일이다. 집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하며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 훨씬 밝아진 모습으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집 생각은 거의 나지 않았으나, 가끔 막내 여동생이 보고 싶었다. 여동생은 엄마에게 차별을 받을 때, 나와 비교대상이었으니 미워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나이차이가 많이 나기도 했고, 암흑 같았던 집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줄 수 있었던 사람이었기에  무척 예뻐했다.


오랜만에 집에 가는 날이었다. 역 근처 좌판에서 아동복을 팔고 있길래  남은 용돈으로 여동생 옷을 샀다. 집에 도착해 입혀 보니 작았다. 엄마는 내가 대역죄라도 지은 양 온갖 욕을 퍼부었다. 물론 어려운 가정형편을 생각하면 쓸데없는 짓을 했다 여겨 꾸짖을 수 있다. 그러나 정도가 문제였. 끝이 안나는 돌림노래, 무한반복이었다. 사촌동생인 다은이나 지연이를 주면 되지 않냐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 에 이 씨~ 쌍놈의 집구석 다신 오나 봐 "

나는 집에 2시간도 채 머물지 않고 그 밤, 밤기차를 타고 자취방으로 돌아와 버렸다. 다음날 엄마가 자취방에 찾아왔고 그 후, 다시는 내게 험한 욕을 하지 않았다. 이렇듯 엄마와 나의 관계가 점점 변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시점, 힘의 무게 추가 완전히 내쪽으로 기울어졌다.


엄마와의 관계에 또 다른 전환점을 맞은 건  24살이 되던 해였다.  아직 겨울이 끝나기 전이었다. 그날은 내가 평생 잊을 수 없는 날로, 실연당한 날이면서 엄마에게 어린 시절에 대한 사과를 받은 날이었다.

집에서 과일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이미 끝난 관계인 줄도 모르고 엄마가 만나는 남자에 대해 물었다.

말머리를 돌릴 생각으로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 어릴 때 엄마가 내 엄마 같지 않았어, 내 엄마 같을 때는 체했을 때, 흰 죽 끓여주고 배 마사지 해줄 때 그때뿐이었어, 왜 그렇게 윽박지르고 욕하고, 그랬어? "

" 사는 게 힘들었어, 그리고 다 어려운 시집식구들 속에 네가 제일 만만해서 너한테 그랬. 미안하다."


그날 분명 엄마가 사과를 했다. 나도 울고 엄마도 울었던 것 같다. 엄마의 여자로서의 삶도 가여웠다. 우리 모두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사과도 받았겠다, 그동안 고팠던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 어리석게도  엄마의 호위무사를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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