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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대

-불친절-

by 희수 Jan 2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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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족을 비롯한 타인과 마주했을 때,  그들은 대부분 불친절했다. 그들과 어울려 살았던 가정이, 그리고 학교가 그러했다.




공포

초등(국민) 학교에 입학할 당시, 엄마는 만삭의 산모였기 때문에 할아버지와 입학식에 참석했다. 1학년 2반, 가슴에 손수건을  달고 운동장에서 입학식을 치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많던 사람들이 운동장에서 흩어지는가 싶더니 덩그러니 나만 홀로 남겨졌다. 식이 끝나고 다들 엄마 손을 잡고 배정받은 교실로 들어갔지만 나는 함께 왔던 할아버지가 중간에 가버려 그렇게 홀로 운동장에 서 있었다. 그날의 공포는 오래갔다. 낯섦과 설움고된 학창 시절의 시작이었다.


결국 뒤늦게 교실로 들어갔기 때문에 준비물에 문제가 생겼다. 가로로 넘기는 연습장을 세로로 넘기는 연습장으로,  빨간 색연필을 검은 색연필로 준비했던 것이다. 요즘 같으면 다시 구입했겠지만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상 그냥 사용했다. 교과서 들어가기 전 ㄱ,ㄴ,ㄷ,ㄹ 부터 배우던 시절이라 그 연습장과 색연필을 한 달 넘게 가지고 다녔던 것 같다. 이렇듯  달랐기에 짓궂은 아이들의 놀림감이  됐다. 사실 별 일도 아닌데,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역시 다름을 전염병처럼 터부시 했다. 이후, 놀림받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며 학교에 다녔. 그런데  또... 1학년 1학기 소풍 때였다.


60명씩 한 반을 이루던 때라 담임 선생님 1명이 갓 입학한 코흘리개들을  인솔하기 버거웠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가 소풍에 함께  것은 당연했다. 지금처럼 맞벌이가 흔치 않던 시절이었으니 학교는 집에 있는 엄마들의 도움을 받은 듯하다. 그러나 난 입학식처럼 또 혼자였다. 홀로 서 있던 운동장의 악몽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다들 엄마 손을 잡고 소풍가방을 메고  지어 야트막한 산을 오르는데  나만 혼자 올랐다.  쓸쓸함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차라리 안 보내면 될 것을, 그냥 집에 있게 하면 될 것을, 왜 꾸역꾸역 보냈을까? 어른들은 '개근'을 통해 내게 성실함을 가르치고 싶었을까?  마음이 다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걸까?


" 희수! 넌 엄마 없니?"

급기야 담임 선생님이 팩트 폭격을 날렸다. 내겐 있어도 없는 것 같은 엄마였기에 숨기고 싶은 진실을 들킨 것처럼 수치심을 느꼈다. 아마 담임선생님은  입학식 때도, 소풍 때도 엄마를 본 적이 없으니 궁금해서 무심코 던진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난 무심코 던진 말, 아니 돌에 맞아 크나큰 상처를 입었다.

 '다름'을 발견한 반 아이들의 눈도 무서웠다. 엄마는 운동회를 제외하고  한번 학교에 왔다. 초등(국민) 학교 졸업식!!! 그때뿐이었다. 참 일관성 있게 내게 무관심했다. 남자아이가 괴롭힌다고 말했을 때도 엄마는 외면했다. 물론 여동생이 나와 같은 일을 당했을 땐 득달같이 학교로 달려갔다.




폭력

당시는 선생님들의 체벌이 묵인되던 시대였다. 아니 장려되던 시대였다.

'몽둥이가 약이다, 매 앞에 장사 없다. 미친개는 몽둥이가 답이다.' 등

말 안 듣는 학생에겐 매로써, 체벌로써, 처벌하던 잔혹했던 시절이었다. 엉덩이나 손바닥은 예사로 맞았다. 지각해도 맞고, 청소가 불량해도 맞고, 떠들어도, 숙제를 안 해와도 맞았다. 그리고 선생님 심사가 뒤틀릴 때는 별 이유 없이 반 전체 학생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 때리기도 했다.


난 먼지와 같은 아이였다. 눈에 잘 띄지 않으나 왠지 뭔가 이상하고 불편할 때 자세히 보면 보이는 공기에 끼인 먼지, 그랬기에 단체로 맞는 일을 제외하고는 선생님들에게 크게 혼난 적이 없었다. 학생수가 많아  웬만하면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그런데 나를 알아보는 아이가 있었다. 자세히 봐야만 보이는 그 끼인 먼지 같은 나를,  6학년 때였다. 서울에서 전학 온 남학생, 일단 서울에서 전학 왔다고 하면 키 크고 얼굴 하얗고 세련됨을 상상하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건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일일뿐 현실은 정반대였다. 서울 전학생은 키가 우리 반에서 제일 작았고 얼굴도 별로였다. 목소리도 앵앵거리는 모기 같아 별명이 모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말 관심 밖의 꼬꼬마였는데, 그 녀석이 순둥순둥하고 만만한 나를 알아본 것이다. 주로 '메주'라든가, '뚱땡이'라 놀렸다. 6학년 때 내 모습은 실제로 뚱뚱했고 못생겼었다. 대부분 쌍꺼풀이 있는 사람들은 태어날 때 갖고 태어나는데, 난 22살에 지고 풀리고, 지고 풀리고를 반복하더니 그제야 완전히 생겨버렸다. 좀 일찍 생겼더라면 조금은 덜 미웠을 텐데, 고달픈 유년시절을 보내게 하려고 운명이 장난을 친 지...

녀석에게 몇 번을 하지 말라고 경고도 하고 선생님께 이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저히 못 참겠어서 녀석에게 말했다.


" 너! 수업 끝나고 남아."

설마 실제 남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그런데 녀석이 남았다. 교실 청소를 하고 있는데 쫓아다니며 도발했다. 어쩔 수 없이 맞짱을 뜨게 됐다. 그 조그마한 녀석은 갖은 태권도 기술로 나를 공격했다. 그러나 다리가 짧아 발차기를 해도 최대치가 내 가슴 정도였다. 반면  밀치기만 해도 녀석이 뒤로 뻥뻥 나가떨어졌다. 그런데 싸움 구경을 하기 위해 옆반 아이들까지 몰려들기 시작하자, 설움이 복받쳤다. 내 사정을 귓등으로도 안 듣던 엄마에 대한 야속함에 더해 그 작은 아이와 싸우고 있는 내 모습이 치욕스럽게 느껴졌다. 난 주저앉아 울어버렸다. 울면 지는 데, 속절없이 펑펑 울었다. 녀석은 다시 전학을 갔는데, 전학 가기 직전까지 나를 괴롭혔다.


투견 같았던 어른들, 쌈닭 같았던 아이들

참 어수선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당시를 '정'이 있었던  좋은 시절로 추억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 그때가 좋았다고'  

물론 난 아니다. 투박함 속에 순수함이 존재했으나 겉으로 표현되는 그것이 거칠 무례했기에 난 지금, 여기 보다 그때, 거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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