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수-
촌수란 친족 간의 거리로, 아빠와 나는 1촌, 아빠와 삼촌들은 2촌 사이이다. 엄마는 아빠와 혈연관계가 아니니 0촌, 즉 무촌이다. 이렇게 확실하게 수치로 규정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이 경계가 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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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24살, 방위 복무 중 맞선을 통해 1살 많은 엄마를 만났다. 경제력 없는 7남매 장남인 아빠의 상대녀였던 엄마는 달력 1장만 넘기면 26살로 당시로서는 금은동 중 동값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조건 나쁜 아빠를 선택했다. 나의 근본, 나의 뿌리인 부모님은 이렇듯 최악의 조건끼리 결혼했다.
아빠는 경제적 무능력함을 타개할 목적으로 원양어선을 탔고, 병아리, 오골계, 돼지도 길렀으며 자갈 땅도 개간하며 치열하게 살았다. 또한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직장생활도 했다. 그러나 늘 가난했다. 하는 일마다 대부분 실패했고 사건사고를 많이 겪었으며 또한 딸린 식구들도 많았다.
딸린 식구들이 많았던 것은 처자식은 물론이고 늙은 아버지를 비롯 원가족까지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동생들인 삼촌들은 많이 어렸다. 나보다 막냇삼촌이 8살이 많았고, 그 위 삼촌들이 나보다 각각 11살, 14살, 17살이 많았으니 가르쳐야 할 어린 동생들이 많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농사일을 도울 일꾼으로 알토란 같은 아들들을 다섯이나 낳았겠으나 아빠는 생각이 달랐다. 학력을 성공의 척도로 여겼기에 동생들은 자신과 달리 모두 대학을 나와야 된다고 생각했다. 만약 할아버지 재산이 많았다거나 아빠의 능력이 출중해 맏형으로서 동생들을 책임졌다면 칭찬받아 마땅할 일이다. 그러나 재산은 말할 것도 없고 앞서 밝혔듯 능력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였기 때문에 엄마와 늘 삐걱거렸다.
비록 없는 사람끼리, 부족한 사람끼리 만났더라도 자식들 낳고 열심히 살았으니 여느 가정처럼 우리 집도 평범했어야 맞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부부가 각기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일단 아빠는 동생들을 자식처럼 챙겼는데, 엄마는 거기에 대해 분하고 억울해했다.
또한 아빠의 넘치는 의욕이 문제였다. 감당 못할 여러 가지 일들을 ' 벌이고 실패하고'를 반복해 엄마는 아빠를 가족이 아닌 세상에 둘도 없는 원수 대하듯 했다.
" 소리 안나는 총 있으면 쏴 죽여 버리고 싶어"
라고 말할 땐 엄마의 그 매서운 눈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굳이 소리 안나는 총이 필요했던 건 그 와중에도 완전 범죄를 꿈꾸지 않았나 싶다. 아무튼 극과 극의 이분들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한 채 여전히 약점을 들추고 욕하고 탓하며 50년 넘게 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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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내가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삼촌들에 비해 특별히 잘해주는 것 없이 대했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삼촌들보다 공부 못했던 나를 엄마 닮아 그렇다며 선 밖으로 밀어내는 듯했다.
" 내 동생들은 공부 잘했는데..."
라며 성적표를 보게 될 때라든가 내게 뭔가 못마땅하다 느낄 때 이렇게 말했다.
난 치아가 무척 약하다. 어린 시절 치아가 다 썩어 문드러지고 잇몸에서 고름이 나올 만큼 아팠음에도 치과에 가지 못했다. 다 썩어 손에 집히지도 않는 유치를 빼겠다고 다그치며 신경질 냈던 아빠는 이 역시 엄마 닮아 치아가 약하다고 탓했을 뿐 치과에 데려가 주지 않았다. 삼촌들의 문제집 비용이, 삼촌들의 등록금이 더 중요하다 여겼던 것 같다. 그렇게 20살이 훌쩍 넘을 때까지 치과에 가지 못했다. 그래서 사는 내내 치아가 말썽이었고, 결국 이른 나이에 임플란트를 해야 했다.
막냇삼촌의 아픈 아이를 내 방에서 죽어가게 했던 일은 아빠가 얼마나 자식인 나에 대한 배려가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일화다. 그 아기는 막내숙모 품에서 떠났어야 맞는데 아빠는 막냇삼촌 부부를 위해 그 아기를 맡았다. 그리고 내 방에서 아기가 죽어갔다. 뒤늦게 막냇삼촌이 미안함을 느꼈는지 아기를 데려갔다.
그것도 아빠의 의지는 아니었다.
반면, 내 아이가 장애 진단을 받았을 때는
" 희수가 그 걸 어떻게 혼자 감당해, 시집에서 도와줘야 할 텐데."
라고 엄마에게 말했다고 한다. 즉 나를 출가외인으로 생각했으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막냇삼촌의 아기는 아빠가 도와줄 일이었고 딸인 내 일은 아니었다는 얘기가 된다.
깊은 우울에 빠져 하루를 힘겹게 견뎌내고 있을 때 엄마는 아침에 전화로 생사확인만 할 뿐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아빠는 전화조차 없었다. 20년 가까이 우울증 약을 먹는 딸인데...
소아우울증, 즉 엄마와의 애착관계를 비롯하여 자라온 환경에 문제가 있었다는 의사의 진단에도 우울증을 병이라 인정 안 하는 나의 아버지!
그분에게 난 딸이 아닌 많고 많았던 딸린 식구 중 하나이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