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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기억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 2-

by 희수 Jan 13. 2025

젊은 시절 할아버지는 꽤 괜찮은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가득 담긴 삼촌의 글을 보면 그렇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60,70대의 주사(酒邪) 심한 노인이었다.




주사(酒邪)

 일단 술을 마시면 주사로 밤을 새우고 새벽녘에 잠이 들었는데, 가족들의 고통은 이루다 말할 수가 없었다. 특히 할아버지 옆방이 바로 내 방이었기 때문에 고스란히 그 끊임없는 이야기를 모두 들어야 했다. 주사는 과거 이야기이거나  욕이 대부분이었다.

지긋지긋했던 주사 중에도 꽤 흥미로웠던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연애시절 일화였다.


10살이나 많은 오빠의 친구였던 할아버지,

그리고 그 할아버지를 짝사랑했던 할머니,


사랑을 표현하려 연애편지를 썼으나 결국 할머니 부모님께 발각이 되어 매파를 통해 혼인을 타진했다는 이야기.

"그 여자가 그렇게까지 나를 좋아한다면이야....."

 이렇게 할아버지는  선심 쓰듯 할머니와 결혼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할머니의 적극성에 감탄하여

 ' 할머니도 나름대로 신여성이었네'

라고 생각하며 잠깐이지만 할머니가 달리 보이기도 했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 중 그 어디에도 할머니에 대한 마음이 어떠했는지는 없었다. 물론 마음에 들었으니 결혼을 했겠지만 당시 할아버지는 20대 후반으로 나이 꽉 찬 노총각이었으니 그다지 선택의 여지는 없었던 듯싶다.


한편, 좋아하는 남자와 결혼을 했기 때문인지 할머니는 더없이 할아버지에게 잘했다고 한다. 내 기억에도 할아버지가 밤늦게 술에 취해 귀가했을 때, 삼촌들을 비롯하여 어린 나까지 쭈욱  일렬횡대로 마루에 서서 '잘 다녀오셨냐'는 인사를 했었다. 이렇게 아내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던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11년을 사시며 주사의 끝판왕을 보여주었다.


 주사 중에서도 정말 듣기 괴롭고 힘들었던 건 엄마에 대한  욕이었다.  시작은 "섬 년" 엄마의 고향이 '섬'이었기에 이렇게 부르며 욕을 했다. 다른 집에 비해 유교사상을 최고의 가치로 신봉했던 우리 집에서는 딸은 출가외인, 며느리야 말로  진정한 가족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딸처럼 생각해서 며느리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했던 것인지, 아니면 평생을 술을 벗 삼아 살아오다 술에 져버려 이성까지 날려버린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어쨌든 언젠가부터 엄마는 욕하는 할아버지를 피해 밤마실을 다니기 시작했다.  아빠 역시 할아버지 주사를 피하기 위해 늦게 퇴근하는 일이 잦았다.




횡포(橫暴)

눈이 오던 겨울밤이었다. 여느 날처럼  엄마는 밤마실을 나갔고, 아빠는 퇴근이 늦었다. 우리 삼 남매는 할아버지 주사에서 조금이라도 빗겨있을 요량으로 사랑방에서 텔레비전 볼륨을 높이고 민화투를 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술을 사 오라고 나를 불렀다.

" 희수야! 2홉 들이 소주 한 병 사와라!"

" 그만 드세요! 많이 드셨잖아요"

매일밤 나와 할아버지가 나누는 대화이자 실랑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별 고민 없이 무시하고 텔레비전 볼륨을  높였다.


 그런데 그때 '퍽' 인지 '꽝'인지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할아버지가 눈 치우는 넉가래로 우리들이 있던 사랑방 문을 부순 것이다. 나는 순간 너무 놀라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내게 달려들어 때리기 시작했다. 이미 패닉상태였기 때문에 그냥 그 매를 맞고 있었다.  곧 동생들이  달려들어 할아버지를 내게서 떼어냈다. 정말 공포스러운 밤이었는데, 그보다 더 끔찍했던 건 엄마의 말이었다.

 " 병신 같은 년, 어린 동생들보다 못한 년, 왜 그냥 맞고 있냐? 으이구! 병신 같은 년! 으이구"

그 밤의 기막힌 서사를 동생들에게  전해 들은 엄마는 문짝대신 임시로 걸쳐 놓은 담요를 노려나를 타박했다. 잡도리할 대상이 필요했을 것이고 늘 그랬듯 내가 타깃이었다. 내가 할아버지에게 맞아 속상했다기보다 동생들처럼 왜 대들지 못했냐가 엄마의 화를 더 돋워 놓은 듯했다.


제 엄마는 여동생의 사나움을 흡족해했다.

" 희영이 유치원 선생님이 희영이 보통이 아니라더라 애들이 꼼짝 못 한대, 사나워서"

 이렇듯  엄마 닮아 사나운 여동생을 마음에 들어 했다.  내게는 가끔

" 지 손에 틀켜쥔 것도 뺏기는 애"

라고 했으니 여동생의 앙칼진 모습과 달리 엄마 눈에 흐릿해 보이는 내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나는 이후에 그날 일을 생각하면 할아버지가 문짝을 때려 부순 것보다 그 뒤 엄마의 반응이 더 아프게 기억됐다. ' 얼마나 놀랬냐? 너희끼리만 있게 해서 미안하다.' 라고 했어야 옳다. 그때 내 나이는 10살을 갓 넘겼었다. 여전히 어린아이였다. 지금 같은 시대였다면 할아버지는 가정폭력으로 구속됐을 것이고, 엄마와 아빠는 아동에 대한 정서적 학대와 방임으로 자식들과 분리 조치 됐을 것이다.


이러한 날들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타 지역으로 고등학교에 갈 때까지 이어졌다. 술 안 사 온다고 숭늉을 내 머리에 쏟아붓기도 했고, 엄마가 부재중일 때는 욕이 내게 향하기도 했다.

" 지에미랑 똑같은 년"

그 무렵 가끔 우리 집 사람들이 텔레비전에 9시 뉴스에 나오면 어쩌나 걱정도 했었다.


' 60대 노인, 술 안 사 온다고 손녀딸 죽임'

' 욕하는 시아버지 미워!!! 며느리, 시아버지 밥에 농약 타"


이처럼 할아버지와 엄마는 서로를 죽일 듯 미워했으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러니까 내 나이가 20살이 될 때까지 이분들은 함께 살았다.

그것이 '효'라 여기며, '인간의 도리'라 착각하며 그렇게 불행하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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