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눈을 감고 할머니를 생각하면 선명하게 그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라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서의 할머니
할머니는 나를 무척 싫어했다. 엄마말을 빌리자면 잘 따르지 않아서, 엄마 닮아서, 그리고 재수가 없어서였다고 한다. 무서운 할머니를 따르지 않은 건 당연한 것이고 엄마를 닮아서 싫었다는 건 참 슬픈 일이다. 엄마는 내가 할머니를 닮아서 미워했는데, 할머니 역시 내가 엄마를 닮아서 미워했으니 핏줄이 닿았기 때문에 두 사람을 닮은 것인데, 아이러니이며 비극이다.
휜다리가 닮았다.
읍내에서 완구점을 하는 고모는 가끔 친정 나들이를 했다. 그날도 어린이날이었는지 우리 집에 와서 나와 여동생에게는 인형을 남동생에게는 레이저 총을 선물로 줬다. 할머니는 그런 고모에게
" 희수 거는 뭐 하러 갖고 와 "
라며 내 것도 챙긴 고모를 나무랐다.
나도 어린이인데, 아주 작은 아이인데, 어른들이 방 밖으로 나간 후, 그 인형을 던져 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소심한 반항이었다. 요즘 아이들 같으면
" 왜 할머니는 나만 미워해요?"
라고 당돌하게 따졌겠지만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고 받아줄 리 만무했으니까 그 정도로 표현하고 말았다. 그래서였을까? 반응이 없으니 나를 인지력이 떨어지는, 생각이 없는 아이로 치부했던 것 같다.
그날도 고모가 사촌동생을 데리고 우리 집에 왔다.
할머니는 내 바지를 훌러덩 올리며 신기한 것이라도 발견한 듯
" 얘 좀 봐봐, 지 에미랑 다리가 똑같지? 어쩜 이렇게 똑같냐? 뵈기 싫게 다리 휜 것 좀 봐"
그전까지는 내 다리가 휘었는지 몰랐다.
그 후, 치마를 입게 될 때마다 드러내놓지 말아야 할 것을 내놓은 양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한편 엄마는 내가 할머니를 닮았다 했는데, 어릴 땐 도대체 어디를 닮았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성장한 후, 살펴보니 엄마의 함몰유두를 여동생이닮은 반면 나는 그렇지않았다. 아마도젖꼭지가 할머니를 닮은 모양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확인하지 못했다. 또 작달막한 엄마의 키와 간신히 평균키에 근접하는 아빠의 키에 비해 평균 키를 웃도는 나의 키가 당시로서는 큰 키였던 할머니를 닮은 듯싶다.
어쨌든 엄마와 할머니는 서로서로경쟁이라도 하듯
" 지 에미 닮아 저 모양이지 "
" 넌 할머니 닮았어 나를 안 닮았어 "
라며 미워했다. 내가 예쁘고 귀엽게 생겼더라면 반대의 상황이 펼쳐졌을 텐데, 참 씁쓸하다.
재수없는 아이가 죽음을 말하다.
아빠는 내가 태어나 얼마 안 됐을 때 원양어선을 타기 위해 부산에 머물던 중 사고를 당했다. 할머니는 내가 밤낮없이 울어 불운이 찾아왔다고 나를 탓하며 원망했다고 한다. 계집애가 재수 없이 울어대서 지 아비에게 사고가 났다고... 엄마는 저 말을 내게 전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재수 없는'이라는 저주의 말이 살아가는 내내 수시로 파고들어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주범이었으니 말이다.
아빠는 그때 그 사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창의적으로 사건 사고를 일으켰다. 두 번의 교통사고와 카드 분실로 인한 손해, 보험사기 연루 등 참 다채롭게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니까 당시 사고는 내가 울어서가 아니라 아빠의 운명이고 팔자였던 것이다.
늦봄, 꽃들이 다 져 가고 산과 들이 초록빛으로 물들 무렵으로 기억한다. 엄마는 밭일을, 할머니는 집안일을 , 그리고 9살의 나는 2살 아기인 동생을 돌봤다. 한창 종이인형 놀이가여자 아이들 사이에서유행을할 때였다. 아랫집 써니와 유니언니가 종이인형을 사러 가자고 했다. 그것을 사오려면 족히 1시간을 걸어야 가능했는데 동생이 문제였다. 돌이 이제 막 지나 걸음마를 뗀 지 얼마 안 된 동생을 업고 가기에는 무리였다. 그러나 종이인형놀이가 너무나 하고 싶어9살의나는 2살 아기를 포대기도 없이 업고 1시간을 걸어 종이인형을 사 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녀와서 할머니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 이년아! 애 허리 꺾여 병신 되면 어쩌려고 거길 업고 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 숨어서 한참을 울었다. 그때는 1980년대로 아이가 아기를 돌보던 몽실언니 시대가 아니었다. 시골인 우리 동네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또래였던 유니언니나 써니는 그 집에서 귀히 여기는 외동딸로 나와 비교되어더욱더서러웠다.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죽음을 입에 담았다.
나무그늘 아래 돗자리를 펴고 종이인형놀이를 하고 있는 유니언니와 써니에게
" 나! 죽고 싶어"
라고 말했다. 9살짜리가 무슨 죽음을 알까? 드라마에서 봤거나 어른들 싸움에서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 의미, 000 2구 71번지 그곳에서, 그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다는 절규는 아니었을지...
내가 '죽음'을 입에 담아서였을까? 그 해 내가 아닌 할머니가 죽음을 맞이했다.
초겨울, 김장철이었다. 화장실에 다녀온 후, 할머니는 어지러움을 호소했고 곧 쓰러졌다. 두 번째 뇌출혈이었다. 가망이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할머니는 퇴원해 안방에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고 옆에서아빠가 울고 있었다. 얼마 후, 그토록 무섭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부엌에서 할아버지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것을 보았고, 막냇삼촌의 처연한 눈물에 나도 따라 울었다. 슬퍼서가 아니라 17살, 너무 이른 나이에 엄마를 잃은 막냇삼촌이 가여워서 울었다. 할머니는 손녀인 내겐 매몰찼지만 당신의 자식들에게는 더없이 다정한 엄마였다고 한다.
당시는 집에서 장례가 치러지던 때라 할머니의 시신은 염하기 전까지 안방 병풍 뒤에 그대로 있었다. 나는 그 병풍 앞에서 잠이 들었었다. 그런데 전혀 무섭지 않았다. 내게 살아있는 할머니가 죽은 할머니보다 더 두려운 존재였으니까...
염하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겨드랑이가 보랏빛을 띠고 있었는데, 사람의 몸이 죽으면 어떻게 변화하는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험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