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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공간

-고향-

by 희수 Jan 06. 2025

000 2구 71번지는 내가 태어난 집의 옛 주소다.

누군가에게는 편안한 안식처이자 추억의 공간이었겠지만 내게 이곳은 서럽고 부끄러웠던 절망의 공간이었다.



차별

7남매의 맏며느리였던 엄마는 고된 시집살이의 한을 풀어낼 때 빠뜨리지 않고 던 말이 있었다.

"너를 낳았는데 안 예쁘더라, 결혼 전 조카가 너무 예뻐서 조카도 이렇게 예쁜데 내가 낳은 내 새끼는 얼마나 예쁠까 기대했었는데 안 예쁘더라고."

이 말과 함께 길고 긴 한숨을 토해내곤 했다. 반면 남동생과 막내 여동생은 나와 너무 달랐다.  

조선 팔도를 다 얻은 듯 기뻤던 아들 탄생 스토리는 감격 그 자체였고 막내 여동생은

" 내가 너를 안 낳았으면 무슨 재미로 살았을까?"

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러한 1차원적인 유치한 차별을 어린 시절 내내 겪었다. 성인이 된 이후엔 난 듬직하고 기댈 수 있는 자식이 돼 버렸고, 동생들은 여전히 안쓰럽고 애틋한 자식으로 남아있다.  

 

학창 시절  엄마는 단 한 번도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마중 나온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타 지역에서 다녔기 때문에 한 달 만에 집에 돌아오는 날이었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버스 시간을 미리 알렸으니 집에서 누군가 마중 나와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그 비를 다 맞으며 1시간을 걸어 도착해 보니 가족 모두 집에 있었다. 너무너무 화가 났다. 그땐 속수무책으로 엄마에게  당하던 어린아이가 아니었으므로 따져 물었더니

중학생이었던  남동생이

" 나가려고 했는데 엄마가 가지 말랬어"

그 말에 더 화가 나 엄마에게 대들자

" 너 하나만 고생하면 될 걸 왜 다른 사람까지 고생해야 되냐"

라고 엄마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분명 내 엄마가 맞는데 그렇게 말했다.  


인간이 처한 스트레스 상황 가장 지수가 높다는 차별은 내게 익숙해지고 당연시 동생들에게 질투의 감정조차 느끼고 자랐다. 그것이 비정상이라는 것을 나중에 정신과 의사를 통해 듣게 되었다.

" 넌 아이 같지 않았어, 시무룩하고 말수도 적고"

엄마는 내 어린 시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철이 일찍 들었다고도 했다. 전형적인 눈칫밥 먹는 아이의 모습인데, 어른들이 무서워 표현을 못했을 뿐인데, 그것을 알지 못했다. 엄마가 행하는 무수한 악다구니와 서늘하고 저주스러운 눈빛에 내가 시들어 가고 있다는 것 역시 몰랐을 것이다.




혈투

다섯 살 무렵 부모님의 싸움 장면이 내게 있어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비교적 또렷하게 생각나는 것은 엄마가 아빠와 싸운 후, 내게 눈을 흘기며

" 다 너 때문이야"

라고 했던 말이다. 그 후 한참 동안 엄마와 아빠의 싸움이  탓이라 생각했다. 세월이 흐른 후, 왜 '나' 때문이라고 했는지 물었더니

" 이혼하고 싶었는데, 네가 너무 일찍 생기는 바람에...."

어이가  없었다. 나야말로 이 끔찍한  세상에 왜 날 낳았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이처럼 나를, 엄마를 불행으로 이끈 아빠는 뿌리 깊은 유교관념에 길들여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부모형제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는지 늙어가는 할아버지를 대신하려 들었다. 즉 신의 못 배운 한을 동생들에게 겪게 하지 않겠다는 념으로 부지런히 일을 벌이고 거기에 엄마까지 강압적으로 동참시켰다. 그것이 부부싸움의 원인이 되었다. 엄마는 독립투사처럼 치열하게 부당하다고 항의했으나 번번이 묵살당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주로 혈투가  벌어졌는데, 아빠의 힘에 맞서기 위해 엄마는 맨주먹으로 유리창을 깨부수거나 농약병을 들고 죽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이러한 혈투는 빈번하게 일어났다. 작은 동네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웠다. 얼마나 싸움이 컸던지 이웃 아줌마들이 쫓아와 말리곤 했다. 또한 친척들 사이에서도 워낙 유명해서 오랜만에 먼 친척 할머니라도 만나면

" 야! 니 에미 애 아직도 그렇게 싸우냐?"

라고 물어 대답하기 곤혹스러운 적도 있었다.


언젠가 엄마가 이혼하지 않고 살았으니 고마워해야 한다는 말을 했을 때 기가 막혔다. 자식들에게 보이지 말아야 할 모습을 그토록 오랫동안 보인 것에 대한 미안함은 없었다.

차라리 이혼을 했더라면 그 무시무시한 혈투는 덜 봤을 것이고, 엄마를  그리워하며 자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랬더라면 하늘과 땅이 딱 맞붙는 그런 악몽도 조금은 덜 꾸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태생부터 슬픈 아이지 않았나 싶다. 내가 태어난 날  동네에 집이나 초상이 났으니 말이다. 이승을 떠나 저승을 향해 가던 귀신들이 들러붙어 아기가 밤낮으로 울어댄다고 했다 한다. 그런 나를 업고  쫓겨나 몇 번을 죽으려 했다는  엄마의 이야기는 서러운 시집살이가 한스러워 되뇌고 되뇐 것이겠지만 그때마다 내 가슴엔 차곡차곡  부정적 자아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내 울보 스토리는 결국  아빠의 사고로까지 이어지며  날 재수 없는 아이로 낙인찍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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