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 2구 71번지는 내가 태어난 집의 옛 주소다.
누군가에게는 편안한 안식처이자 추억의 공간이었겠지만 내게 이곳은 서럽고 부끄러웠던 절망의 공간이었다.
나는 7남매 장남인 아빠의 첫째 딸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났을 때 우리 집은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 고모, 삼촌 넷, 이렇게 대가족이었다.
다섯 살 무렵부터 어렴풋하게 기억이 나는데, 주로 생각나는 것은 부모님의 싸움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했던 기억은 엄마가 아빠와 싸운 후, 내게 눈을 흘기며
" 다 너 때문이야"
라고 했던 말이다. 그것이 엄마에 대한 첫 기억이다. 그 후 쭉 나로 인해 엄마가 불행하다고 여기며 살았다.
20대가 돼서야 왜 '나' 때문이라 했는지 물었더니
"네가 너무 일찍 생겨서"
라는 다소 어처구니없는 답이 돌아왔다. 내가 낳아달라고 했던 것도 아닌데, 왜 어리고 어린 내 탓을 했을까?
"너를 낳았는데 하나도 안 예쁘더라, 결혼 전 조카가 생겼을 때는 너무 예뻐서 조카도 이렇게 예쁜데 내가 낳은 내 새끼는 얼마나 예쁠까 기대했었는데 안 예쁘더라고..."
이 말도 빼놓지 않았다. 주로 엄마의 신세를 한탄할 때 읊조리던 넋두리였다.
하지만 동생들에게는 달랐다. 남동생에게는 조선팔도를 다 얻은 것 같이 기뻤다고 했고, 막내 여동생에게는
" 내가 너를 안 낳았으면 무슨 재미로 살았을까?"
라며 귀여워했다.
다 같은 자식인데 왜 유독 나만 엄마의 족쇄가 됐을까?
이러한 차별은 어린 시절 내내 겪었고 성인이 된 후까지 지속되었다.
차별
엄마는 목욕할 공간이 없었던 시골집 부엌에서 가마솥에 물을 펄펄 끓여가며 우리 삼 남매 목욕을 시키곤 했다. 동생들을 먼저 씻기고 마지막이 나였다. 2차 성징이 막 시작될 즈음이었다. 이젠 아이가 아닌 내 몸을 바라보던 그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혐오와 짜증 섞인 그 눈을, 사납게 쏘아보던 그 눈빛을,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견뎠었다.
인간이 처한 스트레스 상황 중 가장 그 지수가 높다는 차별은 내게 익숙해지고 당연시 돼 동생들에게 질투의 감정조차 못 느꼈었다. 그것이 비정상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넌 아이 같지 않았어, 시무룩하고 말수도 없고"
성인이 됐을 때 엄마는 내 어린 시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철이 일찍 들었다고도 했다.
전형적인 눈칫밥 먹는 아이의 모습인데, 엄마가 무서워 표현을 못했을 뿐인데, 그것을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하지 않았다.
가끔 '일부러 나를 괴롭히려고'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해 안 될 때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이웃집 내 또래들에게 삼촌의 학사모 쓴 졸업 사진을 보여 주며 자랑할 때였다.
" 우리 희수는 이미 글렀고, 난영아! 너는 나중에 이렇게 똑똑한 사람한테 시집가라"
라고 했다. 나를 무시하고 조롱하고 싶었을까?
학창 시절 엄마는 단 한 번도 비 오는 날 나를 위해 우산을 들고 마중 나온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였다. 타 지역으로 진학했기 때문에 한 달 만에 집에 돌아오는 날이었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버스 시간을 미리 알렸으니 분명 집에서 누군가 마중 나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두리번거리며 찾아봐도 없었다. 가족 그 누구도...
비를 쫄딱 맞고 1시간 거리를 걸어 도착해 보니 가족 모두 집에 있었다.
너무너무 화가 났다. 그땐 속수무책으로 엄마에게 당하던 어린아이가 아니었으므로 따져 물었다.
" 어떻게 전부 집에 있으면서 아무도 안 나올 수가 있어?"
라고 묻자 중학생이었던 남동생이
" 나가려고 했는데 엄마가 가지 말랬어"
라고 말했다. 그 말에 더 화가 나 엄마에게 대들자
" 너 하나만 고생하면 될 걸 왜 다른 사람까지 고생해야 되냐"
라고 엄마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분명 내 엄마가 맞는데 그렇게 말했다.
이러한 엄마의 마음, 그러니까 편애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여러 매체들을 통해 사건, 사고를 접하면서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와 같은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소외감 느낄 정도로 차별받는 아들 딸들이...
엄마는 지금도 내게
" 할머니 닮았다."
" 고모 닮았다."
" 아빠 닮았다."
라고 하는데, 아마도 나를 미운 시집식구들의 현신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시집살이나 부부갈등을 나를 통해 해소했던 것이다. 실제
"가장 만만한 사람이 너였기 때문에 너한테 그랬다."
라고 내가 성인이 된 후, 솔직하게 인정했었다. 어린 시절 들었던 무수한 악다구니와 서늘하고 저주스러운 눈빛에 내가 시들어 가고 있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
이러한 모녀 사이는 애틋할 수 없다. 그런데도 난 효녀인 척했다. 중학생 무렵부터 부모님 생신 선물을 챙기는 착한 맏딸 노릇을 했다. 동생들 생일만 기억하고 내 생일은 매번 잊고 지나치는 데도 불구하고 꼭꼭 챙겨드렸다. 내 이러한 행위 역시 이유가 있었음을 나중에 정신과 의사를 통해 듣게 되었다.
혈투
이처럼 나를, 엄마를 불행으로 이끈 아빠는 뿌리 깊은 유교관념에 길들여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부모형제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는지 늙어가는 할아버지를 대신하려 들었다. 즉 당신의 못 배운 한을 동생들에게 겪게 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부지런히 일을 벌이고 거기에 엄마까지 강압적으로 동참시켰다. 그것이 부부싸움의 원인이 되었다. 엄마는 독립투사처럼 치열하게 부당하다고 항의했으나 번번이 묵살당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주로 혈투가 벌어졌는데, 아빠의 힘에 맞서기 위해 엄마는 맨주먹으로 유리창을 깨부수거나 농약병을 들고 죽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이러한 혈투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정말 창피했다. 작은 동네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웠다. 얼마나 싸움이 컸던지 이웃 아줌마들이 쫓아와 말리곤 했다. 또한 친척들 사이에서도 워낙 유명해서 오랜만에 먼 친척 할머니를 만나기라도 하면
" 야! 니 에미 애비 아직도 그렇게 싸우냐?"
라고 물어 대답하기 곤혹스러운 적도 있었다.
언젠가 엄마가 이혼하지 않고 살았으니 고마워해야 한다는 말을 했을 때 기가 막혔다. 자식들에게 보이지 말아야 할 모습을 그토록 오랫동안 보인 것에 대한 미안함은 없었다.
" 차라리 이혼을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어차피 우리 삼 남매만을 위해 일한 것도 아니고, 우리 때문에 싸운 것도 아니고 깔끔하게 이혼했으면 싸우는 모습은 안 보고 자랐을 거 아냐?"
라고 악을 썼다.
그랬더라면 난 덜 불안했을 텐데, 하늘과 땅이 딱 맞붙는 그런 악몽은 덜 꾸었을 텐데,
어쩌면 나는 태생부터 슬픈 아이지 않았나 싶다. 내가 태어난 날 동네에 세 집이나 초상이 났으니 말이다. 이승을 떠나 저승을 향해 가던 귀신들이 들러붙어 아기가 밤낮으로 울어댄다고 했다 한다. 그런 나를 업고 쫓겨나 몇 번을 죽으려 했다는 엄마의 이야기는 서러운 시집살이가 한스러워 되뇌고 되뇐 것이겠지만 그때마다 내 가슴엔 차곡차곡 부정적 자아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내 울보 스토리는 결국 아빠의 사고로까지 이어지며 날 재수 없는 아이로 낙인찍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