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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부엉이 J Oct 01. 2018

2018년, 다시 한 번 ‘동물농장’을 펴봐야 할 때


 세상에 혐오가 가득 차고 있다. ‘나’와 다른 ‘남’에 대한 증오는 미국에서 트럼프의 당선을 불렀고, 유럽에서 반EU·반난민의 기치를 내건 극우주의를 퍼지게 했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기존의 세대 갈등, 이념 갈등, 계층 갈등을 넘어 성별 간 갈등, 난민과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갈등의 양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심화되어, 극단적인 대립의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자신은 옳고, 남은 틀리다. 모든 남성 혹은 여성을 일반화하여 적대하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1945년에 출간된 동물농장을 다시 한 번 펴봐야 한다.  


 왜 동물농장인가? 동물농장은 공산 혁명의 허구성을 비판한 소설이 아닌가? 물론 조지 오웰도 ‘동물농장이 주로 러시아 혁명에 대한 풍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에 덧붙여 ‘보다 널리 적용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썼다’고 응답했듯이, 동물농장의 의미는 그 이상이다. 그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욱 평등하다’에 있지 않다. 그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초판에 수록되지 않는 서문에서 인용한 볼트레의 명언 ‘나는 당신이 말하는 내용에 반대한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그것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내 목숨을 걸고 옹호할 것이다’에 함축되어 있다. 


 책에서 동물들은 압제자였던 존스를 내쫓고 농장을 장악하고, 장원의 이름을 동물농장이라고 붙인다. 동물농장은 처음에는 모든 동물을 위해 움직이지만 결국 돼지에 의한, 돼지를 위한, 돼지의 농장이 된다. 왜 순수했던 혁명이 그렇게 왜곡되었을까? 농장주인 존스에게 저항하던 동물들은 왜 돼지 나폴레옹에게는 저항하지 않았을까? 물론 동물들은 의문을 품었었다. 표면적으로는 동물을 위하는 정책이었지만, 아무리 봐도 돼지를 위한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동물들의 질문에 돼지 ‘스퀼러’는 항상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나쁜 일은 스노볼이 그랬고, 나폴레옹은 항상 옳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존스’가 돌아오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머지 동물들의 입은 다물어졌다. 인간이 농장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정의로운 목적’에 의해 그를 명분으로 실현되는 모든 수단이 정당화되었고, 모든 비판은 부정의하게 되었다. 동물농장 초반의 대화와 타협은 사라졌고, 당연히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하게 되었다. 그렇게 돼지는 동물을 착취했던 인간들과 같아졌고, 동물농장은 다시 장원농장으로 회귀한다. 


 소설 중간에 암말 ‘클로버’는 아무도 자기 생각을 말하지 못하며, 동물이 동물을 죽이는 동물농장이 모습을 보며 이것은 자신이 혁명을 꿈꾸며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공산주의라서 그럴까? 전체주의라서 그런 것일까? 표현의 자유가 없어서 그런 것일까? 그렇다. 모두가 맞다.  


 공산주의라는 절대적인 옳음을 향해 모든 수단이 정당화되며, 그에 따라 다른 사상은 부정의한 것이 된다. 개인보다는 전체를 강조하는 전체주의 하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전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손쉽게 무너진다. 자유롭게 다양한 의견을 표현할 자유가 없는 사회는 그렇게 탄생한다. 결국, 세 가지 요인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하나로 귀결된다. 


 즉 동물농장은 전체주의의 부당함을 폭로하는 것을 넘어 모든 발전사관·진보사관을 비판하며, 자명한 진리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는 ‘열린사회’의 정의로움을 역설한다. 그러므로 동물농장이 민주주의인 우리나라와는 전혀 관련 없고, 단지 북한과 같은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소설로 생각하면 안 된다. 동물농장의 메시지는 우리 바로 옆에서 가장 가까이에 존재하며, 우리에게 경고음을 준다. 


 민주주의 사회라고 ‘자명함’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은 ‘동물농장’을 출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 당시 영국에 팽배해있던 동맹국 러시아에 대한 옹호 분위기 때문이었다. 조지 오웰은 서론에서 그런 분위기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물론 결정적인 차이는 있었다. 영국은 자명함에 대해 비판을 하더라도 치명적인 위협을 느끼지 않으나, 소련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봤을 때 민주주의인 독일에서 나치즘이 등장했다. 그리고 민주주의로부터  탄생한 나치즘은 민주주의를 파괴했다. 즉 배타성을 가진 사상이 합법적인 절차로 사회 주류가 된다면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소련과 같은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즉 중요한 것은 어떤 체제이냐가 아니다. 물론 체제에 따라 배타성이 발현되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름을 포용하는 문화이다. 우리는 그 문화를 파괴하는 주장을, 움직임을 거부해야 한다. 


 역설적일 수 있다. 다양한 목소리가 자유롭게 표현되어야 한다. 그런데 비록 다양한 목소리를 거부하는 주장이라고 한들, 그 주장을 거부하면 마찬가지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닐까. 맞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단 그 주장이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며 강압적으로 전개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신의 절대성을 주장하며 종교전쟁을 일으켰던 가톨릭이 다른 종교와 평화롭게 공존하며 사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지킬 것은 개인성, 상대성, 다양성이다. 우리가 배척할 것은 전체성, 절대성, 획일성이다. 정의는 특정한 지점이 아니라 상태이다. 정의는 어떤 특정한 이념의 실현이 아니라, 수많은 이념이 자유자재로 토론하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정의는 고정되어있지 않고 사회가 처한 상황과 맥락에 따라 계속해서 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부정의는 틀을 깨는 것이다.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고, 자명한 진리에 대한 비판 가능성을 거부하고, 자기 생각의 절대성을 믿으며 다른 의견을 탄압할 것에 있다. 


 그러므로 현 한국사회의 흐름은 굉장히 우려스럽다. 타인에 대해 적대적이고, 다름을 틀림으로 보며, 자기만 잘살려고 하는 추세가 확산되고 있다. 다른 사람을 포용하는 여유는 이미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이러한 흐름을 초래한 ‘사회적 분노’의 원인을 파악하여 적절히 해결한다면 한국이 제 2의 도약을 할 수 있는 길이 된다. 하지만 사회의 혐오가 시스템을 넘어선다면, 제 2의 나치즘·파시즘이 나타날 수도 있다. 지금 한국사회는 역사적인 분기점에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2018년, 우리는 다시 한 번 1945년에 출판된 동물농장을 펴보며 그 메시지를 되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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