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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영 Oct 04. 2015

#3-경상남도 남매의 여행 종착지, 카오산 로드

이국땅에서 친구 만나는 즐거움#3 - 카사자밀라 스터디 최성현

람부트리에 위치한 우탕 레스토랑 - 라이브 카페로 활기차다


최성현 군, 친누나인 최원주 양과 함께 오붓하게 남매 단 둘이서 동남아 여행을 왔다.

태국과 캄보디아가 그들의 목적지, 그 일정 가운데 내가 있었고, 짧은 시간 카오산로드에서 조우했다. 
그렇다. 난 카오산로드의 지킴이다.


대한민국 건아에 어울리는 이미지를 지닌 사람을 만나본적 있는가?

 20대 중반에 접어든 성현이의 얼굴상과 다부진 몸뚱이를 보고 있노라면, 또 그의 빠른 두뇌회전을 두 눈으로 수도 없이 목격했기에, 성현이를 겉과 속 모두 아주 찰 진 아이로 생각하고  있다.



사람의 인연은 참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이어진다. 


군 제대를 마친 2014년 1월, 경복궁역에 위치한 중동 아랍풍 카페의 카사자밀라에서 뜻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고 모여 000 공부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를 알게 됐다. 10~20대 때에는 진로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한다. 그리고 얼추 사회생활에 허덕이게 될 30대가 되면 본인도 예상하지 못했던 직업을 갖게 된 ‘자신’을 발견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내 몇몇 지인들이 그랬고 나도 그러고 있다. 본연의 희망과는 다른 그런 종류의 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 사람들.... 생각보다 많다. 


20대 전후 기간 동안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 적성에 맞는 것은 뭘까?’ 이런 저런 활동을 하면서 끊임없이 알아가는 시간을 보냈다. 



우리 가족은 방학 때가 되면 경상남도 울산으로 늘 향했다. 친척들을 만나 뵙기 위해 서울에서 먼 길을 달려간다. 그러고 보니 성현이도 경남 사람이다. 내 친가 대부분이 거주하는 부산, 그곳에서 나고 자란 성현이는 서울로 진학했다. 


누구는 지방으로, 또 누군가는 서울로,  이리저리 왕래하다 보면 살짝 마주치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성현이를 만나기 전에 이미 만났을 수도 있다. 생각보다도 땅덩어리가 비좁은 한국이니깐(조국 통일이 되어야 하는 이유 하나! 땅 넓히기).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 속에 갈  때마다 들려오는 질문. “니 장래희망이 머꼬?” “네, 할아버지, 전 향후 00가 될래요.” 검사부터 의사까지 어르신들 사이에 자주 등장하는 그 단어를 나도 입에 머금곤 했다. 


그 당시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르다. 단순한  한두 해 전의 내가 아니니깐. 

그래. 내 나이 벌써 32살이다.

하지만 10대는 배아줄기세포다. 본인을 이끌어 가는 방향대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대한민국은 분명 교육의 땅이다. 오로지 책상에 붙어 앉아 공부만으로 개천에서 용 된 케이스가 그래도 다른 나라(태국 등) 보다는 훨씬 많으니깐. 


그러니 10대에는 어떤 장래희망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Boys, be ambitious.



미국 고교 교환학생 시절, 쪼그마한 동양인의 등장에 학교가 들썩였다. 학교신문에 나의 인터뷰가 실렸는데 내 장래 목표를 lawyer라고 했나 보다. 

오려서 간직 중인 그 기사에 적혀있는 그 부끄러운 인터뷰 내용. 

화룡점정으로 그 당시 내가 사용하던 한 교재 맨 뒤에 학기가 마친 후 기념으로 ‘미래 한국 대통령’이라고 적었던 기억이 난다. 


풋. 10대 이야기니깐 크게 웃고 넘어가자.


제대 후 건곤일척 해야 하는 2014년 그 해, 성현이를 만났다. 

같은 꿈과 목표, 그리고 나라면(또 나이기에) 가능하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닌 사람끼리 잘 뭉쳐 공부했다. 물론 성현이는 아직 학부생이었고 게다가 공부 도중 스페인으로 6개월 교환학생을 떠났기에 그  다음해를 준비해야 했다.


뭐지 이 아이는?


허나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의 짧지만 강한 임팩트를 성현이는 남기고 떠났다, 같이 스터디를 하며 문제를 푸는데 수리추리와 상황판단에서 상당히 두각을 보였다. 그 외의 행동거지도 부산 사나이답게 진중하면서도 선이 굵었다. 카페의 데이츠라테에 꽂혀 그것만 줄곧 시키던 그 뚝심. 진심으로 반했다.


굳이 아쉬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000 시험 후, 교환학생 준비로 바쁜 터라 뒤풀이 MT에 한 번 참석 안 한(=못한) 정도. 다음 정기 모임 때는 참석할 수 있기를.



20대 들어 개인적인 방황의 시기가 몇 번 있었다. 

처음엔 뭘 해야 할지 망설이다 어르신들이 선호하던 그 하얀 가운 직업군으로 일단 방향을 설정했었다. 하지만 가슴이 뛰지 않는다. 학업 중의 주변 여건도(내가 스스로 저질러버린, 돌이킬 수 없는.) 내겐 호의적이지 않았다.


새로운 길을 모색할 겸 일본 나고야 대학교에 1년 교환학생을 떠나 2학년을 마치고 돌아왔다. 


일의 진척이 보이지 않을 때의 나의 선택은 무조건 떠나기. 새로운 환경에서 머리를 텅 비우고 새로 시작해본다. 이 고민 많은 시기에 코르티솔 호르몬 발현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는 해결책이 여행인 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이게 나만의 젊게 사는 비결이고, 그렇게 해서 장수를 꿈꿔본다.


카오산로드의 망고스틱키 라이스


그곳에서 차분히 내 스스로를 분석해본다. 다른 이들과는 다른 (적어도 내 생각에는) 나만의 경쟁력.

몇 개의 외국어, 

외국생활을 통해 양성된 애국심, 

꾸준히 운동하여 내면화시킨 전투본능, 

그리고 갖은 실패의 누적으로 ‘이거 아님 말고’와 같은 초 긍정 삶의 자세. 


가장 잘 어울릴만한 직업은 아무리 봐도 음지에서 양지를 지망하는 007이었다. 그렇다. 키는  좀 아담해도 은근 슈트 빨 잘 받는 빵야빵야를 꿈꿔봤다. 그런데 카사스터디에서 성현이를 포함해 당시 나보다 더 빵야빵야를 잘할 것 같은 동생들을 만나게 됐다. 


격세지감이다. 하하. 


지금 내가 성현이를 보며 감탄하는 것처럼 이 친구들도 10년 뒤쯤 아래서 치고 올라오는 기라성 같은 후배들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겠지. 나이가 들수록 아무런 준비 안 된 내가 설자리는 점점 사라져간다. 이런 얘기. 언젠가 한 선배들로부터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혼잣말이 조금씩 늘어가는 나이다. 


방문하는 지인들에게 꼭 소개하는 나의 은식처 - 마담 무슈

 

내 몇 안 되는 장점 가운데 하나는 무엇이든 마음먹으면 꾸준히 한다는 것. 

꽤 오랜 시간 그 시험 전형에 맞춰 준비했다. 심지어 군대도 오직 그것 하나를 고려하여 8007 특기를 지원하고 굳이 복무기간도 약 2배인 장교생활을 선택했으니깐.


(그 기간 동안 “너 모하고 싶노?” 라는 질문에 가족을 제외하곤 주변 지인들에게 속내를 쉽사리 밝힐 수 없었다. 덕분에 이런저런 거짓말을 조금 했다. 빵야빵야가 되겠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기엔 음지를 지향하는 그 직업군은 진중하고 신중해야 했다 - 물론 완전히 포기한 지금은 상관없다)


내 10대는 자타공인 철부지였고, 20대에 나름 목표를 세웠는데, 30대가 되니 그 목표 자체도 바뀌어버렸다. 이번 태국 카오산로드에서 오랜만에 만난 성현이 역시 20대 초반에 막연히 갖고 있던 그 꿈이 그간 겪은 다채로운 경험과 맞물리면서 희석되어 다른 방향으로 선회한 것 같다.


서양사람들이 가족단위로도 많이 방문할 만큼 아늑한 마담 무슈


예수님을 믿는 입장에서, 난 그동안 신이 원하시지 않는 옷을 애써 입으려고 한 것 같다. 

이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에, 그 시스템에 대한 과정과 결과를 거쳐 가며 ‘그래  그동안 수고했어. 주영아’. 그 간의 짐을 순수히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1년 뒤 그 똑같은 과정을 겪은 성현이 얘기도 들어봤다. 참으로 황당하면서 안타까운 에피소드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다 된 밥에 스스로 밥상을 뒤집은 셈. 종교 없는 성현이는 그리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런 어처구니없는 결과물은 오히려 신의 적극적인 개입하이 아닐 런지. 


우리가 흔히 농담 삼아 얘기하듯, 빌 게이츠, 스티븐 잡스가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그들이 갖고 있는 능력은 미국 땅 이어야지만 그 만한 성과가 나올 수 있었고, 또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내가 지닌 (하지만 계속 까먹고 있는) 능력은 어디를 가야 충분히 발현될 수 있을까? 적어도 이 조직은 아니라는 것이 내가 (원치 않게) 내린 결론이다.



성현이와 같이 오붓하게 남매여행을 통해 카오산에 방문한 원주씨도 다니던 직장을 그만 뒀다고 한다. 그리고 늘 이런 시기의 청춘이 선택하는 것은 ‘여행 중’이라는 팻말이다. 그 선택이 일시적인 정답이긴 하지만, 우리 대한민국 청춘들, 이리저리 치이며 사는 친구들이 많은  듯하다.


하지만 새로운 목표를 찾아 여정을 시작하는 것도 나이를 떠나 무조건 괜찮다.

다시 밑바닥에서 시작하는 것은 한 인간에게 ‘살아 있다는’ 생기를 불어넣어 주니깐.


20대 중반의 성현이 역시도, 그리고 원주씨도 (진짜 신이 계획하고 있는) 그곳에서 본인이 지닌 어마어마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를 기도해본다. 성현이는 워낙 건실한 친구인 만큼 어떻게 어디로 뻗어나갈지 늘 궁금하긴 하다.



하지만 여기서 달지만은 않은 소리 하나 첨가. 

그 카오산을 누비던 등산복 패션센스에 대해서는 조물주의 엄청난 개입이 필요하다. 난 아시아 촌놈이 아이언맨 코스프레 하는 줄로만 알았다. 아름다운 누나를 옆에 두고  그동안 얼마나 허송세월을 보낸 건지. 수시로 조언을 들으면서 채찍을 맞아가며 개선해야 고칠 수 있을 것 같다. 누나 둔 ‘동생’ 종족들 가운데 누나 프리미엄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을 보면 안타깝다. 


패션은 원시시대 때의 의식주 가운데 ‘의’와 같은 그 성질의 것이 더는 아니다. 우리 인류가 향유할 수 있는 또 다른 고결한 가치이자 놀이거리다. 



성현이를 태국에서 만나 그 감상을 쓰는데 기묘하게 절 반 이상이 내 얘기다. 

‘네 멋대로 해라’와 같은 류의 슬픈 영화/드라마를 보지 않는 이상 이렇게까지 감성적이 되지는 않는데, 오래간만에 손이 오그라든다. 

각설하고 그간 억누르던 이런 얘기도 조금씩 꺼낼 수 있게 해 준, 내 과거를 오랜만에 돌이킬 수 있게 해 준 성현이와 원주씨에게 감사하며. 


코쿤 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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