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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Y Jul 17. 2022

휴가와 일상의 경계

일상이 휴가이고 휴가가 일상이다.

첫 직장은 로펌이었다.

밤낮없이 일했고 몸은 지쳤고 마음은 메말랐다.

그 시절에 얼마나 여유가 없었는가 하면 1년차 때가 꽃다운 27세(지금 생각해보면 개어림ㅠㅠ)였는데 남자를 만날 시간이 없었다!

새벽까지 일을 하고 다음날 출근할 때면 지하철에서 사람 숨소리만 들어도 화가 나고 옷깃만 스쳐도 욕이 나왔다. 어쩌다 한여름날 해가 남아 있을 때 퇴근하여 동네 슈퍼라도 들러  먹거리를 사서 집에 들어가는 날에는 세상을 얻은 기분이었다.

그때의 일상은 힘들고, 만족스럽지 않으며, 도망가야할 무엇이었고, 휴가는 그 보상이고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며 이상적인 무엇이었다.

휴가를 기다리며 일했고, 휴가가 삶의 의미인 줄 알았다.


여름 철 주말을 앞뒤로 붙인 약 열흘간의 휴가.


휴가는 일상으로부터의 회피였기에 일상을 잊을 수 있는 낯선 것이기를 바랬다.

유럽이든 아름다운 섬나라이든 외국으로 가고 싶었다.

일하는 중에 틈틈이 외국 여행지를 검색하고, 비행기표를 사고, 호텔을 예약했다.

비행기를 타기 직전까지 일하다가 드디어 비행기에 오를 때의 그 쾌감이란.

그러나 휴가란 언제나 그렇듯 긴장이 풀어지고 이제 일을 잊을만할 때쯤 끝나고 만다.


그렇게 허무한 휴가를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의 회복.

출근하고 일하고 자고, 출근하고 일하고 자고...

그리고 다시 오매불망 다음 휴가를 기다린다.


10년 로펌의 시간을 지나, 한동안은 가정주부로 살며 아이들을 키웠다.

밤과 주말을 잊고 일하며 쳇바퀴 돌듯 살던 로펌 시절, 휴가는 일상으로부터의 도피였고, 때로 삶의 목적인 것도 같았다.

로펌을 그만두고 아이들을 키우며 살  때는 돈은 없었지만 시간은 있었다.

일에 짓눌려 생각할 겨를도 없었던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는 일상의 화두가 되었다. 밥 먹고, 아이 똥치우고, 밥 먹이는 일상은 힘들기도 했지만 나와 꽤 잘 맞아서 소소하게 행복하고 즐거웠다.  하루의 아침, 점심, 저녁을, 일년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느끼고 즐겼다. 여행에 대한 갈증은 크지 않았고,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는 우리나라 산이나 바다를 보러 훌쩍 떠나는 것으로 충분했다.  길이도 삼박사일이나 길어야 일주일이면 족했다.


그 때서야 알았다.

일상이 만족스러우면 휴가나 여행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외국여행은 일상을 살아내기 위한 필수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로펌시절엔 휴가로 국내여행을 가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소름 돋는 오만까지 떨었었다.

정작 불쌍한 것은 일과 스트레스에 찌들어 일주일 간의 외국여행으로 일상을 피하고 싶었던 나 자신이었던 것을.



지금은 가정주부의 생활을 벗어나 수도권에서 작은 법률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가정주부일 때보다는 바쁘지만 그래도 밤낮과 주말이 없을 정도는 아니다.

2년 전에는 땅을 사서 오랫동안 꿈꾸었던 집을 지었다.

산 속의 집이라 매일 아침 산에 오르고, 퇴근해서는  야외데크에 나와 서늘한 바람과 하얀 달빛, 밤하늘의 별을 보며 쉰다. 주말에는 파라솔 아래 선체어에 앉아 일광욕을 하며 책을 읽고 낮잠도 잔다.  

매일이 일상이고 휴가다.

진정 일상과 여행, 일상과 휴가의 경계가 허물어진 삶이다.

일상은 더이상 피하거나 잊고 싶은 것이 아니다.

휴가와 여행에 목마르지 않은 일상이 감사하고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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