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 부품이 장착된 사이보그는 되고 싶지 않아
아침 8시. 온 가족이 바쁜 시간이다. 방학이지만 수업을 가야 하는 딸도, 5분만 더 5분만 더 하다가 준비가 늦어진 남편도, 이른 아침부터 병원 투어가 예정된 어머님도, 딸아이를 데려다주고 곧바로 출근하려니 마음이 급해진 나도, 모두가 바쁘다. 거실 욕실은 어머님과 딸아이가, 안방 욕실은 나와 남편이 나누어 차지하고도 서로 빨리 나오라고 성화다. 5분 만에 씻고 나오겠다던 남편이 10분 만에 나오자 나는 흰자위가 드러난 눈꼬리가 눈썹 위까지 올라간 채 욕실에 들어가 머리를 감았다. 이제 남은 시간은 30분. 30분 안에 머리를 말리고 화장품을 찍어 바른 뒤 아이를 데리고 나서야 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드라이기가 먹통이었다. 분명히 어젯밤까지도 딸아이가 머리 말리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상하다. 아무리 콘센트에 뺐다 다시 꽂아도 드라이기가 되살아나질 않았다.
다른 콘센트에 드라이기를 연결해 보아도 의식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드라이기를 심폐 소생하려 씨름하다 보니 15분이 금방 흘렀다. 벌써 준비를 끝낸 딸이 방으로 들어와 어서 가자며 재촉했다. 하는 수 없이 화장은 하는 둥 마는 둥 옷만 대충 걸치고 집을 나섰다. 생각지도 못한 드라이기 고장으로 하루를 시작했더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머리카락이 엉키고 정수리에 기름이 낀 것 같았다. 괜히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헤집고는 정수리를 꾹꾹 눌러서 냄새를 맡아보기도 했다. 덜 마른 머리에 찬바람을 맞았더니 하루 종일 으슬으슬 춥고 몸이 아팠다. 저녁 무렵이 되자 열이 펄펄 끓으며 목이 칼칼해졌고 침조차 삼킬 수 없었다. 독감에 걸린 게 아닌가 걱정되었다.
새벽에 열이 올라 이리저리 뒤척이다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깼다. 늘 하던 대로 침대 아래로 왼쪽 다리를 내리려는 순간 허리에서 무릎으로 퍼지는 아득한 통증 때문에 악 소리가 났다. 좀 있으니 왼쪽 발목까지 저렸다.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어 다시 천천히 자리에 누웠다. 남편을 깨워 전기장판 온도를 5단으로 올려 달라고 했다. 한참 허리를 대고 지지고 있었더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고통이라 덜컥 겁이 났다. 불현듯 친정엄마가 생각났다.
20년 넘게 식당을 운영하며 삼 남매를 뒷바라지하신 엄마에게 10년 전 드디어 노년의 휴식이 허락되었다. 365일 식당 문 여느라 여행 한 번 제대로 못 다니신 엄마는 이제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가 생겼다며 좋아하셨다. 식당 정리 후 며칠이 지난 아침이었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다며 흐느끼는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엄마를 모시고 병원 세 군데를 돌았다. 허리 디스크도 모자라 무릎 연골이 모두 닳아 너덜너덜하다고 했다. 오랫동안 방치된 허리와 무릎이 본색을 드러냈다. 아침이 되면 습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던 엄마의 리츄얼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엄마는 수술 전부터 깊은 우울감에 빠졌다.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 한 치의 의심도 하지 못한 이동의 자유에 제동이 걸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결국 엄마는 양쪽 무릎에 인공 관절 수술을 받으셨다. 연골이 모두 닳아버린 관절뼈를 제거하고 인공 관절을 끼워 넣는 수술이었다. 양쪽 무릎을 한 번에 수술하게 되어 회복도 오래 걸렸고 수술 후유증도 심했다. 드라이기에 전원이 들어오지 않으면 새것으로 교체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한번 고장 난 인간의 몸은 새것으로 바꿀 수도 없거니와 부품을 교체해도 계속 말썽이었다. 수술 후에도 계속 통증을 호소하며 병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시는 엄마에게 의사들은 늘 같은 대답을 했다.
“수술은 잘 되었습니다.”
늘 활력이 넘쳤던 엄마가 답답해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게 힘들었고, 그 고통을 함께할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그런데 엄마가 움직일 수 없다며 망연자실해 전화하셨던 그 일이 나에게도 일어났다.
불안한 마음에 다리를 절뚝거리며 먼저 집 근처 병원에 갔다. 검사해 보니 다행히 독감은 아니었다. 주사를 맞고 약을 처방받은 뒤 물리치료실을 찾았다. 다리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가 싶어 하얗게 질린 내게 원장님은 꾸부정한 자세로 하루 종일 앉아서 일을 하니 허리에 무리가 갔고 그 여파로 무릎까지 아팠던 거라고 말씀하셨다. 30분 물리치료를 받고 주사를 한 대 맞고 나니 좀 살 만했다. 안도감에 끝을 모르고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집에 돌아오며 올리브영에 들러 드라이기 두 개를 샀다. 머리카락이 치렁치렁한 두 모녀가 그 가엾은 걸 아침저녁으로 얼마나 볶아댔던가. 머리를 감고 나면 습관적으로 드라이기를 꺼내 번갈아 가며 쉴 틈 없이 틀어댔다. 언제나 코드를 꽂고 전원을 켜 레버만 움직이면 따뜻한 바람을 뿜어주었던 오랜 친구가 아무리 레버를 딸깍거려도 침묵이 해제되지 않았을 때의 그 황당함이란.
게다가 약간의 허풍을 더하자면 드라이기 때문에 애꿎은 하반신 물리치료까지 다녀오지 않았던가! 드라이기 코드를 뽑아 염을 하듯 몸통 전체를 돌돌 말아서 품에 꼭 쥐고 밖으로 나왔다. 소형 가전제품 수거함 속 깊숙이 장렬히 전사한 내 오랜 동행자를 묻어주고 나오며 오랜만에 아파트 산책로를 한 바퀴 돌았다. 삐걱거리는 몸이 레버를 딸깍여도 움직이지 않아 새로운 부품에 대체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