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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패셔니스타 Jun 05. 2024

내 멋대로 해라

초보 여행자의 여행법

 일 년에 네 번 중간, 기말고사가 끝나면 나는 나에게 특별한 자유를 선물한다. 주말 없이 월화수목금금금 일하고 마지막 학교 시험까지 마무리되면 금요일 하루는 반드시 나 홀로 여행을 떠난다. 한 달 동안 주말까지 학원에 나왔으니 금 토 일 딱 사흘, 시험을 마친 아이들도 나도 자유를 누릴 자격은 충분하다. 수업 없는 금요일 아침은 이상하게 평소보다 눈이 빨리 떠진다. 딸아이와 남편을 학교와 사무실로 챙겨 보내면 나도 여행 준비에 바빠진다. 여행 채비라야 시험 기간 동안 못 읽고 쟁여 놨던 책 몇 권과 무선 키보드, 편안한 옷 한 벌이 전부다. 사흘도 길다. 이틀이면 충분하다. 조용하다는 후기를 참고해 숙소를 예약하고 곧바로 출발한다. 운전을 오래 하는 것도 힘들다. 한두 시간 운전으로 여행 기분 내면서 지치지 않게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좋다. 그러다 보니 여행 목적지는 대구 근교나 경주, 통영, 부산 정도다. 이동 중 휴게소에 들러 식사를 대충 해결하고 숙소에 도착하면 드디어 나만의 휴식이 시작된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다 책 읽다 글 쓰는 시간이 너무 좋다.

 가장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모로 누워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읽다 재미없으면 또 다른 책을 펼쳐 놓고 읽었다. 30분 정도 정적 속에서 책을 읽다 보면 잠이 쏟아진다. 그러면 거부하지 않고 책을 내려놓고 잠에 빠져들었다. 자다 깨다 반복하다 배가 고프면 그제야 슬슬 일어난다. 숙소 주위 눈에 띄는 식당 아무 곳이나 들어가 저녁 요기를 하고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산책했다. 조용한 카페가 보이면 차 한 잔 앞에 두고 멍 때렸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숙소로 들어와 시체 놀이를 이어갔다.


 여행을 떠나면 모름지기 새로운 곳에 가 새로운 체험을 하고 새로운 음식을 먹어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친구 경자는 내 여행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어이없어한다.

 “그럴 거면 차라리 그냥 집에 있어.” 돈과 시간이 아깝다는 그녀의 말이었다.      

작년 기말시험 후, 숙소 들어가기 전 들른 조용한 카페


2% 부족할 때

 2019년 여름이었다. 기말고사가 끝난 바로 다음 날인 금요일, 2박 3일 일정으로 부산 해운대로 떠났다. 경자와 함께였다. 때 이른 비치룩에 모자와 선글라스까지 쓰고 만난 우리는 너무나 들떠 얼굴을 보자마자 재잘거렸다. 초행길인 데다 대구와 달리 도로가 얼기설기 복잡하게 얽힌 부산에서는 내비게이션도 무용지물이었다. 두 번이나 우회해 나갈 도로를 놓치자 운전대를 잡았던 경자는 부쩍 말수가 줄었고, 나는 괜히 신경이 날카로워져 시계만 보고 있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7시쯤 숙소에 도착해 해운대 해변을 거닐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내비게이션을 보니 아직 40분도 더 달려야 했다. 한참을 헤매다 겨우 숙소에 들어서니 벌써 8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부산 가는 고속도로, 이때만 해도 신났다.

 시작부터 피곤했던 여행은 2박 3일 내내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우리는 마음 맞는 여행 파트너가 못되었다. 아침형 인간인 경자는 새벽에 일어나 해변을 한 바퀴 돌고 조식을 먹으며 그날 뭘 할지 신이 나서 내게 브리핑했다. 반면 야행성인 나는 조식보다는 늦잠을 자고 싶었다. 식사를 마치고 해운대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걸으며 사진 찍고 바닷물에 들어가 몸을 담그며 놀자는 그녀와 달리 나는 밥만 먹으면 에어컨 빵빵한 숙소 침대에 기어 올라가 내려올 줄 몰랐다. 점심 먹고 카페에서 수다 떨며 만난 게 전부였던지라 나는 함께 여행 오기 전까지 그녀가 그렇게 활동적인 줄 꿈에도 몰랐다.

이미지 출처 Unsplash

 다음 날 저녁이었다. 새벽부터 해운대 이곳저곳을 누비며 등짝이 홀라당 벗겨질 정도로 바다에서 신나게 놀던 경자는 초저녁 무렵 침대 위에 널브러져 곯아떨어졌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나는 혼자 밖으로 나와 어슬렁거리다 스타벅스를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주문하고 멍하니 앉아 있자니 우습게도 해방감이 들었다. 내 모습이 비친 희미한 창 너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옆 사람에게 반응하거나 신경 쓸 필요 없는 고요한 시간, 그제야 해운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친구와의 여행도 좋았다. 들이치는 파도를 폴짝폴짝 뛰어넘으며 우리는 아이처럼 신나게 놀았고, 시원한 바람맞으며 동백섬을 매일 한 바퀴 돌았으며, 반주 삼아 이른 저녁을 먹은 뒤 얼큰하게 취한 채 해운대 거리 공연을 보다 음악에 맞춰 둠칫둠칫 몸을 들썩였다. 숙소 조명을 모두 끄고 창가에 앉아 달빛 어스름한 바다를 보며 늦은 밤까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기억을 떠올리자면 모든 순간이 더없이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만약 누군가 내게 해운대 여행을 떠올리게 한다면 나는 카페에서 홀로 보냈던 그 고즈넉한 시간이 맨 먼저 생각난다.

흥겹고 분주한 바깥 세상과 나만의 고요한 세상 사이에서                   나는 늘 줄타기한다.

 특별할 것 하나 없었다. 조용한 재즈 음악에 정겨운 리듬이 되던 사람들의 나지막한 이야기 소리, 오후 햇살에 눈이 부셔 잔뜩 찡그린 채 한쪽 눈으로 비스듬히 바라보던 창밖의 해수욕장,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김영하 작가의 책 <여행의 이유>. 남는 건 사진뿐이라며 휴대전화 용량이 넘치도록 사진도 찍고, 평소에는 입 댈 일 없는 지역 음식도 맛보고, 남들 하는 체험도 다 따라 해 보았다. 여행을 다녀온 뒤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관계도 더 돈독해졌다. 그래도 왠지 모를 이 2% 부족한 기분은 뭘까?      




지금 여기서 행복하기

 마중물 첫 제주도 여행 후 정성이 듬뿍 담긴 포토 북 선물을 받았다. 책을 펼칠 때마다 그날의 이야기, 그날의 오감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책장을 넘기다 유독 한 페이지에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 제주도에서 각자의 자유 시간을 가졌던 일요일 아침, 혼자 찍은 사진이었다. 함덕 해변을 거닐다 커피가 한잔 마시고 싶어 들어간 카페 창가. 굽이치는 파도 위로 넘실거리는 갈매기 떼를 배경으로 김민철 작가의 <모든 요일의 여행> 한 페이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누군가와 즐겁게 보내는 시간도 좋지만 나에게 기억에 남는 여행이란 나 자신을 마주하는 시간이라는 걸.


 김민철 작가는 <모든 요일의 여행>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전 책에 ‘여기서 행복할 것’이라는 말을 써두었더니 누군가 나에게 일러주었다. ‘여기서 행복할 것’의 줄임말이 ‘여행’이라고. 」 김영하 작가도 그의 책 <여행의 이유>에서 「‘성’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다니지 말고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 이 순간은 유일하며 다시 오지 않는다.」라고 했다.

제주도 여행 중 홀로 만끽한 자유 시간

 여행을 떠나본 적이 별로 없었던 나는 여행에 대한 로망을 가슴속 깊이 품고 있었다. 일상을 떠난 여행지에서 견문을 넓히고 돌아오면 내 삶도 여행을 떠나기 전과 확연하게 달라져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촘촘히 세운 계획을 따르다 보면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가 있었다. 차는 밀리지 않을지, 음식은 맛있을지, 주차할 데는 있을지 걱정이 들어찼다. 여행지에서 머리를 식히겠다는 원래 생각과는 달리 마음은 일상에서보다 더 바빴다.




 작년 가을 거제도로 당일 관광버스 여행을 다녀왔다. 목적지인 매미섬에 내려 구경한 뒤 정해진 시간에 다시 버스에 올라타면 되었다. 이름난 관광지라 여행객들이 정말 많았다. 사람들의 물결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같은 곳에서 사진을 찍고 블로그에서 봤던 유명한 맛집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사람 많은 곳을 질색하는 친구와 나는 얼른 사진만 찍고 인파에서 빠져나왔다. 이동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근처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관광지에서 걸어서 겨우 10분 거리인데도 고요와 여유가 골목 가득 스며들어 있었다. 동네 어귀에 수호신처럼 떡 버티고 선 거대한 팽나무에 감탄하고 나지막한 지붕의 버섯 모양 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찬 골목을 걷고 있으려니 여행의 묘미가 잔잔하게 느껴졌다. 예쁜 벽화가 그려진 담장을 따라가 나지막한 언덕에 올랐다. 탁 트인 바다가 두 눈 가득 들어왔다. 바다를 보겠다고 거제도까지 와서 나는 왜 사람들의 뒤통수만 보고 있었을까? 그제야 가슴 벅찬 행복감이 뿜어져 나왔다.

거제도 복잡한 관광지 매미성에서 조금만 벗어나니 이런 멋진 곳이

 이름난 관광지가 아니면 어떤가.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봐야 한다는 절경을 보지 않으면 어떤가. 네티즌들의 극찬을 받은 음식을 먹어보지 않으면, 멋진 배경으로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지 않으면 어떤가. 어디서든 바로 그곳에서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게 여행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숙소 침대 위에 널브러져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만끽하다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청승맞게 혼자 뭐 하는 짓이야?” 꿈에서도 경자의 잔소리가 들렸다.

잠 오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놀고 싶으면 노는 홀로 여행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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