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패셔니스타 May 31. 2024

대발이 아부지, 세웅 씨[2]

버럭 아빠의 환골탈태

박 여사의 난

 엄마는 내가 중학교에 다닐 즈음 요리학원에 다니셨다. 거기서 만난 분들과 친해지며 엄마는 집순이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에 눈뜨셨다.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고 운전을 배웠다. 아빠의 타박에도 꿋꿋하게 도로 연수를 받더니 차를 끌고 당당하게 밖으로 나갔다. 이동의 자유가 생기자 엄마는 목소리도 커졌는데 그때야 다른 집 아내들이 모두 엄마처럼 기죽어 지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신 것 같다.


 그날은 엄마의 생신이었다. 동생과 나는 용돈을 모아 엄마께 드릴 선물을 샀다. 등교 전 카드와 선물을 드렸을 때만 해도 엄마는 기분이 꽤 좋았다. 학교가 파하고 현관에 들어섰더니 집안 공기가 심상찮았다. 엄마는 주방에, 아빠는 안방에 계셨고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가만 보니 엄마가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계셨다. 엄마에게 무슨 일 있었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분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느그 아부지는 이 나이 되도록 내 생일에 빤쓰 한 장 사 준 적이 없다.”


 아직 어려서 분위기나 말 사이 맥락도 눈치도 없던 동생이 그 말에 다음 생신 때는 꼭 팬티를 사 드리자고 하는 바람에 우리는 그만 빵 터져서 엄마는 울다 웃는 표정이 되어 버렸다.




 사건의 자초지종은 이랬다. 엄마의 요리학원 친구들은 남편이 선물한 물건을 자주 자랑했다. 남편의 선물이라고는 받아본 적 없던 엄마는 달력에 동그라미를 크게 그려 표시해 두고 생일이 다가온다고 아빠에게 몇 주 전부터 각인시켰다. 그렇게 어필했는데도 생일날 미안한 기색도 없이 빈손으로 당당하게 들어오는 아빠를 보니 부아가 치민 모양이었다.


 사소한 꼬투리로 불씨가 댕겨진 두 분의 다툼은 생일 선물에서 그치지 않았다. 서운했던 역사적 사건을 하나둘 입에 올리더니 급기야 아빠의 성격까지 소환해 싸움이 점점 커졌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며칠 냉전을 치르다가도 지나가는 말 한마디로 끝나곤 하던 전쟁의 양상이 이번엔 달랐다. 엄마 아빠의 웬만한 다툼에는 콧방귀도 뀌지 않던 우리 자매조차 슬슬 걱정할 정도였다.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식음을 전폐하고 울기만 하는 엄마를 도저히 달랠 수 없자 아빠는 사과와 화해의 의미로 큰 떡밥을 던졌다. 엄마 친구들과 1박 2일 여행을 가도 좋다고 허락한 것이다. 앞뒤 꽉 막힌 독재자에게 ‘감히 여자가’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아빠로서는 경상도 남자의 자존심을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힘없이 방문을 열고 나온 엄마는 초췌하고 파리해 보였지만 실상은 승전 깃발을 쥔 셈이라 뒷모습은 신이 나 보였다.


 파업과 투쟁을 무르고 다시 일상으로 당당하게 복귀한 엄마는 내친김에 성조 아버지를 들먹이며 엄마가 없는 동안 나를 데리고 백화점에 가 옷을 사 주라는 임무를 협상 조건으로 하나 더 들이밀었다. 남자가 어떻게 백화점에 가냐며 펄펄 뛰던 아빠는 엄마가 다시 동생 방으로 들어갈 태세를 취하자 하는 수 없이 그러겠다고 했다. 두 분 싸움으로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나는 그날부터 아빠와 단둘이 외출할 생각에 닭살이 끼쳐 잠이 오지 않았다.     

      

의외로 우리 죽이 잘 맞네!

 엄마가 여행을 떠난 다음 날 아빠와 나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집을 나섰다. 집에서 백화점까지 겨우 20분 남짓 걸렸지만 두 시간도 넘게 느껴졌다. 아무 말 없이 뚝 떨어져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을 걷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자전거 한 대가 나타나 내 옆을 홱 지나갔다. 갑자기 아빠가 내 어깨를 확 끌어당겼고 너무 놀란 나머지 나도 얼떨결에 아빠의 팔을 두 손으로 덥석 잡았다.


 자전거는 지나갔지만, 이미 잡아 버린 팔을 다시 놓기도 뭣해서 나는 슬쩍 아빠와 팔짱을 꼈다. 아빠는 나에게 팔을 내어준 채 앞만 보고 말없이 걸었다. 눈앞을 응시했지만 온 신경은 손에 닿은 아빠의 팔에 조심스레 가 있었다. 오글거렸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느낌이 화사한 봄날 아지랑이처럼 주위에 피어올랐다.


 백화점에 도착해서도 서로 눈치를 보느라 여전히 팔짱을 끼고 다녔다. 아빠와 매장에 들어서는 기분은 생각보다 꽤 괜찮았다. 엄마가 그리던 아빠와 딸의 모습이 이런 건가 싶기도 했고 사람들이 우리만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따님 옷 사시게요?” 판매원이 반갑게 맞이했다. 아빠는 대꾸도 하지 않고 퉁명스럽게 뭐 살 거냐고 내게 물으셨다. 봄옷으로 가득 찬 매장을 둘러보았다. 남성 고객은 여성 고객만큼 구매 조건이 까다롭지 않은 데다 딸과 함께 매장에 왔겠다 판매원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이 옷 저 옷 꺼내놓으며 내 눈길을 끌어보려 애썼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판매원이 권해주는 옷을 보고 있던 그때 허리가 잘록한 연한 하늘색 플레어스커트가 눈에 띄었다. 포인트로 강조된 배꼽 부위 정중앙에 달린 하얀 엑스자 매듭이 사운드 오브 뮤직의 여주인공을 떠올리게 했다. 엄마와 함께였다면 눈길도 주지 않을 디자인이었다.


 어릴 때부터 엄마는 레이스나 리본 달린 옷이나 화려한 색상의 옷은 절대 사 주지 않았다. 옷은 무조건 빨래하기 쉽고 때가 타지 않아야 했다. 하늘색 플레어스커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는 걸 본 아빠는 마음에 드냐며 서둘러 지갑을 여셨다.

 “다른 것도 좀 둘러볼….” 하며 아빠를 보았지만, 이미 아빠는 재빠르게 계산을 마친 후였다.


 엄마와 쇼핑할 때는 백화점 지하부터 꼭대기까지 모든 매장을 다 훑었다. 피곤한 기색도 없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홍길동 엄마를 헉헉거리며 쫓아다니다 보면 안내 데스크에서 매장 안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대체 우리 집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를 물건을 살 것처럼 뒤적거리다 끝내 사지도 않고 그냥 나오는 일이 다반사였다. 아무리 봐도 별 차이가 없는 물건 중 더 나은 걸 고르느라 층층을 누비다 보면 직원 눈치가 보였고 때를 거르니 배가 고프고 짜증도 치밀어 올라 들고 있던 쇼핑백을 던져 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에 반해 아빠의 쇼핑 방법은 만족스러울 정도로 합리적이었다. 딸의 옷을 사겠다는 목표를 설정한 뒤 백화점까지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직진했다. 그 어떤 유혹에도 절대 옆길로 새는 법이 없었다. 입구 표지판을 눈으로 스캔해 목표물이 있는 층을 찾아낸 후 엘리베이터를 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보지 않아도 될 물건까지 구경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기 십상이란 걸 아빠는 잘 알고 계셨다. 마지막으로 목표물이 있는 곳에 정확히 내려 가장 밝은 미소로 환대하는 직원이 있는 매장에 들어가 눈길이 가장 오래 머무는 목표물을 획득하면 되었다. 다른 매장에는 발조차 들이지 않으니 물건을 비교하느라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었다. 백화점까지 20분, 매장 찾아 물건 사는 데 걸린 시간 15분, 그리고 집까지 20분,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우리는 다시 스위트 홈에 돌아와 있었으니 이 얼마나 합리적인가!


 처음으로 마음에 쏙 드는 옷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히죽거리는 나를 보고 아빠가 뜬금없이 물었다.

 “그 치마 왜 니 마음에 들었는지 아빠는 알겠다. 중간에 하얀 매듭 때문에 그라재?”

 나는 말없이 미소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몰랐던 옷 취향을 아빠가 알아주니 기분이 좋았다. 아니나 다를까 여행에서 돌아온 엄마는 우리가 사 온 치마가 마음에 들지 않아 눈을 세모로 뜨고 흠을 잡기 시작했다.

 “니가 입을 거가? 지 마음에 든다는데 왜 또 난리고?” 울상이 되려는 참에 아빠가 버럭거리며 거들어 준 덕분에 나는 옷을 사수할 수 있었고 일요일 약속에 사운드 오브 뮤직 주제곡을 흥얼거리며 외출했다. 아빠의 선물을 입지 않는 날은 다리미로 싹 다려서 옷장에 귀한 보물인 양 걸어두었다.


 이제 빤쓰 한 장 따위의 서운함은 하늘 위로 훨훨 날려 보낸 엄마는 우리 남편이 딸아이를 데리고 백화점에 가 아이 마음에 쏙 드는 옷을 사 줬다며 얄미운 친구들 앞에서 실컷 자랑했다. 이후 두 분이 언성 높이는 날이면 나는 은근슬쩍 아빠 편을 들게 되었다.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야

 한밤중에 갑자기 아플 때마다 혼비백산하여 딸을 둘러업고 병원으로 향하던 아빠의 넓은 등, 신부 입장 후 사위에게 큰딸의 손을 건네며 잘 부탁한다고 말하던 떨리는 목소리, 잠 안 자고 애 먹이는 갓난쟁이 손주 보듬어 안고 밤새 자장가 불러주던 아빠의 뒷모습은 이제 더 이상 모두가 겁을 먹던 독재자가 아니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길러보니 아빠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아빠도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는 걸. 엄마 역할은 처음이라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아이를 도대체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몰라 아직도 우왕좌왕하는 나처럼 아빠도 세 아이의 아빠 역할은 처음이었으니 당연히 서툴렀을 것이다. 자식에게 안전한 울타리가 되려면 험한 세상 매사에 최선을 다해 고집스럽고 억척스럽게 사셔야 했을 것이다.


 아빠처럼 재미없는 남자 절대 만나지 말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노래 부르던 엄마의 뜻을 거스르고 우리 자매는 세상 재미없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며칠 전 아빠 생신 때 거실에 모여 앉은 말수 없는 세 남자가 서로 소 닭 보듯 하며 멀뚱멀뚱 TV를 보는 익숙한 풍경에 세 여자는 크게 한숨 쉬었다. 그맘때면 항상 등장하는 엄마의 레퍼토리가 이어졌다.

 “큰집 사위들은….”

 그러자 아빠를 쏙 빼닮은 우리 자매가 버럭거렸다.

 “아, 좀!”

 “그만 좀 하라고!”

 머리가 하얗게 세어 체구가 나보다 작아진 아빠가 우리를 보며 씩 웃었다.


아빠는 츤데레다. 무심한 척 해도 자상한 아빠가 이제야 보인다.
두 분의 넘치는 사랑 덕분에 우리는 참 잘 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