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패셔니스타 Jun 26. 2024

대화의 유(有)희열[1]

터놓고 말하면 보이는 것들

 “도와주세요!”


 겁에 질린 아이의 우는 소리가 단잠을 깨웠다. 시험이 끝나고 여행 겸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 예약해 둔 대구 근교의 숙소에서였다.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 느릿느릿 일어나 뜨이지 않는 눈꺼풀을 겨우 끌어올렸다.


 사위가 고요한 밤의 정적을 깨뜨리는 소란의 진원지는 객실 복도였다. 싸움이 벌어진 것 같았다. 직원이 오겠지 싶어 무시하고 다시 눈을 붙여 보려 했지만, 아이의 연이은 도와달라는 울음소리에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어 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1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덩치가 산만 한 남자가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계단 쪽으로 질질 끌고 가고 있었고 여자는 산발이 된 머리를 남자의 우악스러운 손아귀에서 빼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술을 많이 마셨는지 발음도 불분명한 남자의 고함과 거기에 대드는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더해져 밖은 아수라장이었다.

이미지 출처 Unsplash

 한밤의 난데없는 싸움에 구경꾼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지만, 선뜻 나서서 말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들인 듯 보이는 작은 남자아이가 문 앞에서 토끼 인형을 끌어안고 제발 좀 도와달라며 울고 있었다.


 부모의 싸움만큼 어린아이에게 무서운 일이 또 있을까? 나는 눈치를 보며 다가가 벌벌 떠는 아이를 품에 끌어안았다. 얼마나 용을 써서 울었던지 땀으로 축축한 옷이 등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등을 토닥거리며 아이를 다독이는 사이 옆에 있던 키 큰 남자 투숙객 두 명이 달려들어 폭력을 행사하려는 듯 팔을 높이 치켜든 남편을 아내에게서 겨우 떼어 놓았다. 가까스로 머리가 풀려난 여자는 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악다구니를 쓰며 도로 남자에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이미지 출처 Unsplash

 숙소 프런트 직원이 숨을 헐떡이며 계단을 올라왔다. 남자 직원이 가세하여 남편을 저만치 끌어내는 동안 나이 지긋한 여자 직원은 정신 나간 듯 울부짖는 여자를 1층으로 데리고 내려갔다.


 “많이 취했나 보네.”


 상황이 종료되자 모여 있던 사람들은 한 마디씩 하며 각자의 숙소로 들어갔다. 아직도 어깨를 들썩거리며 울음을 그치지 못한 아이를 어찌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목석같이 서 있던 내게 남자가 직원의 팔을 뿌리치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큰 덩치에 위압감이 느껴져 한순간 덜덜 떨렸다.


 내 앞에서 체크인하던 화목한 가족이 기억났다. 그땐 다들 해맑게 웃고 있었는데. 남자는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아무 말 없이 아이를 데리고 문을 쾅 닫고 사라졌다. 울음을 뚝 그치고 아빠 손을 잡고 숙소로 들어가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불과 몇 시간 전 저녁 산책길에서도 그 가족을 만났다. 야외 바비큐를 즐기는 행복한 모습이었다. 하루 조용히 묵을 요량으로 주전부리 하나 없이 몸 하나 덜렁 싣고 온 나로서는 그들의 만찬이 부럽기만 했다. 육즙 가득 머금은 고기가 지글거리는 소리와 냄새에 침만 꼴깍 삼키고 있을 때만 해도 지극히 평화로워 보였던 세 사람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미지 출처 Unsplash

 

두 남자와 직원들에게 끌려 나가던 흥분한 남편이 말본새가 그따위냐며 고래고래 고함지르자 너나 말 똑바로 하라며 맞불을 놓던 아내의 격한 외침으로 보아 사건의 발단은 어떤 말에서 시작된 듯했다.


 한잔 술에 마음을 너무 놓아 버린 걸까. 거나하게 취한 상태에서 부부 중 한 명의 역린을 건드린 말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다 며칠 전 서운하고 답답한 감정에 치달아 나도 모르게 남편에게 버럭 소리 질렀던 일이 떠올랐다.      


매거진의 이전글 흥하는 공부, 망하는 공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