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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주연 Oct 31. 2020

그림책 안에서 하룻밤

[북스테이] 바게트호텔, 부산 / 『바게트호텔』 키미앤일이

2020 부산비엔날레를 관람하기 위해 부산을 찾았다.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어서 숙소 선정은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됐다. 바로 '바게트호텔'이다.



나는 호텔이라는 모티프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첫 연인과의 이별을 겪으면서 어떻게 나의 모든 걸 나눈 사람과 한순간에 남남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사실을 알고도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하고 괴롭고 헛헛했던 적이 있다. 그때 우연히 마주친 불교 구절을 읽고 위로를 받았던 것이다.


부모와 처자의 인연으로 모인 것은,
마치 여관에서 밤을 지낸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 바로 떠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라는 것도 허상이라고 말하는 불교인데 부모와 배우자, 자식이라고 해서 다를 게 있겠는가. 그리고 가족도 여관에서 만난 동료 여행자에 불과하다연인과의 관계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집착에서 놓여나는 한편, 이제껏 내가 만났고 앞으로 만날, 길고 짧은 여러 인연들이 모두 소중하게 느껴졌다. 각기 다른 인생을 살다 한 숙소에 든 인연이 신기하고, 또 다른 여행길을 떠나기 전에 함께 하는 그 찰나를 귀하게 여겨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인생이라는 긴 여행 동안 다양한 곳을 다니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기에 호텔만큼 좋은 곳이 없을 것이다.


몇 년 전 독립서점에서 발견한 『바게트호텔』을 유심히 살펴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가상의 마을에 있는 호텔과 투숙객, 스태프의 일상을 그린 그림책이었다. 그림체와 색감이 특이하여 이미지에 무지한 나도 나중에 같은 작가(키미앤일이)의 작품을 바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원색의 어찌 보면 투박한 그림, 허무 개그처럼 끝나는 이야기가 각기 다른 개성과 사연을 가진 인물들을 판단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었다. 덕분에 자신에게 침잠하면서 조용히 서로를 존중하는 호텔 전체 분위기가 따듯하게 전해졌다. 그리고 그 그림책을 그대로 옮긴 호텔이 부산에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꼭 그곳에 묵어보고 싶었다.


비엔날레 관람을 마치고 저녁까지 먹으니 벌써 날이 어둑어둑했다. 지도는 나를 해수욕장 뒤편 모텔촌으로 안내했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간판에 대비되는 걷는 이 몇 없이 조용한 골목이 수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름 있는 호텔에 갈 걸, 역시 책 하나만 믿고 온 것은 어리석었나 할 즈음 주소가 가리키는 건물이 나타났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내리는 순간...



책 속 로비를 그대로 가져온 리셉션이 펼쳐졌다.


호텔이 위치하고 있는 4층을 따 401호라고 불리지만 이곳은 방이 하나밖에 없고 무인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문자로 안내받은 우편함에서 열쇠를 찾아 방 문을 열었다. 리셉션에서부터 알아채긴 했지만 방 또한 책의 색감과 디테일을 충실히 옮겨 놓았다. 동화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라운지 공간보다 한 단 위에 놓인 침대방이 인상 깊었다. 나무문을 닫아 방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라운지 공간에 쳐져있는 커튼과 함께 이곳을 현실과 분리해주었다. 바깥 세계는 잊고 환상 속으로 더욱 빠져들 수 있었다.



방 안에는 친절하게도 『바게트호텔』 책이 놓여 있었다. 그새 속편인『바게트호텔2』도 나왔다. 바게트호텔에서 책을 읽고 있으려니 등장인물들이 옆 방에 묵고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꿈을 책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 공간으로 구현해낸 작가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관람한 비엔날레도 부산을 모티프로 쓰인 소설과 시를 시각 예술과 사운드로 표현한 전시였다. 공간과 예술, 텍스트와 다른 예술 장르들이 서로 영감을 주고받는 광경을 목격하는 것이 재밌었다. 여기에서의 경험은 나에게 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까.


책에는 매일 아침 짐을 싸가지고 나왔다가 체크아웃을 하지 못하고 계속 하룻밤을 연장하는 201호 남자가 등장한다. 그 남자처럼 나도 이곳이 생각 나 또 찾게 될 것 같다.


*바게트호텔 북스테이 유튜브 보러 가기:

https://youtu.be/cMDv6QU2p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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