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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주연 Jan 09. 2022

애도 작업으로 본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결말 및 스포일러 포함


세 시간 가까운 러닝타임, 자동차라는 제한된 공간, 일본어 중국어 타갈로그어 한국어수어까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이뤄진 연극 대본 리딩 장면들, 그리고 감정을 절제하는 인물들... 지루해야 마땅한 요소들을 다 갖추었지만 불러일으키는 생각이 많아서였을까. 미장센과 대사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되었다.


갑작스런 죽음으로 아내를 잃은 남자(가후쿠)가 히로시마 연극제에서 연출을 맡는다는 가장 큰 줄기의 이야기 안에 아내 오토가 섹스 후면 지어내 들려주곤 하던 이야기, 연극제의 규정에 따라 고용된 운전수 미사키의 이야기, 가후쿠가 연출하는 연극 <바냐 아저씨>, 그리고 그 극에 출연하는 인물들의 사연까지 여러 이야기들이 중첩되어 있다.


가후쿠는 아내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들려준, 짝사랑하는 남자의 집에 들어가 흔적을 남기는 여고생 이야기가 자신이 들은 장면에서 끝이 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남자의 침대에서 자위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아내의 외도남이었던 타카츠키는 그 뒷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들어온 자는 또 다른 침입자였고 여고생은 자신을 강간하려는 그를 찔러 죽이고 도망치게 된다.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는데도 다음날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분명 방 안에서 시체를 발견했을 텐데 자신이 짝사랑했던 남자도 아무 일도 없었던 양 공을 차고 있다. 단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남자의 집 앞에 CCTV가 달렸다는 점이다. 의아함과 분노, 죄책감에 시달리던 여고생은 CCTV를 바라보며 고백한다: “내가 죽였어.”


이 뒷이야기를 기점으로 가후쿠의 태도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모두 달라진다.

아내도, 외도남도 자신들의 죄책감을 토로하고 싶었던 것이다.

가후쿠 또한 아내의 외도를 알고 있었지만 그걸 직면하고 싶지 않아 피하다가 아내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왔는데(아내가 퇴근 후 이야기 좀 하자고 한 날, 가후쿠는 그 대화를 피하려 거리를 배회하다 돌아와 쓰러진 아내를 발견한다) 그 사실을 고백하게 된다.


하지만 아내가 직면하고 싶었던 것은 죄책감뿐이었을까. 오토와 가후쿠 사이에는 4살 때 죽은 딸이 있다. 이미 십여 년이 지났지만 아이를 잃었다는 슬픔은 부부 관계에 깊은 그늘을 드리운다. 둘은 서로를 깊이 사랑하지만 둘 사이에는 심연이 놓여있는 것이다. 어쩌면 오토의 이야기 속 여고생의 의아함과 분노는 아이가 죽었는데도 변함없이 굴러가는 세상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반영한 것이 아니었을까. 남편 또한 아이를 깊이 사랑하고 죽음에 마음 아파하고 있겠지만,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둘은 상처를 봉합해야만 한다. 아이 이야기를 점점 줄여나가야 한다. 아이에 대한 사랑은 여전히 존재하는데 아이가 세상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상실감 때문에 아이와 전혀 상관이 없는 낯선 남자들과의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아닐까.


애도는 상실한 대상에 대한 리비도를 거둬들여 다른 대상을 향할 때 이뤄진다. 따라서 가후쿠가 자신의 죽은 아이가 살아있다면 23살이 될 거라고 한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아버지 없이 자란 운전수 미사키의 나이 또한 23살인 것이다. 둘 사이가 고용자와 피고용자라는 상하 관계에서 유사 부녀관계가 되는 순간이다. 가후쿠는 늘 앉던 뒷자리에서 앞좌석으로 자리를 옮겨 미사키와 대화를 시작한다. 미사키 또한 자신을 학대하던 어머니가 산사태로 죽은 것을 자신이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둘은 미사키의 고향 훗카이도에 함께 가면서 애도 작업을 시작한다.


애도를 수행하지 못한 멜랑콜리 주체는 외부와 단절되어 자폐성을 띠게 마련이다. 그러고 보면 사방이 막힌 자동차는 가후쿠에게 자폐적인 공간을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아내가 자신의 차를 운전하는 것도 몹시 꺼렸고, 연극제의 규정상 운전수를 고용해야 된다는 사실에도 자신의 사적 공간을 침범당한 것 같이 불쾌해한다. 하지만 끝으로 갈수록 미사키의 운전에 편안함을 느끼고 그녀와 소통을 시작하는 것은 물론, 히로시마의 출퇴근길을 벗어나 일본의 북단 훗카이도로 로드트립을 떠나기까지 하는 것이다. (끔찍이 아끼던 자동차 안에서의 흡연을 금지하다가 서로에게 마음을 연 뒤 선루프를 열고 나란히 담배를 피우던 장면도 아름다웠다.)


영화는 미사키가 히로시마도, 훗카이도 아닌 한국에서 가후쿠의 빨간색 빈티지 차를 몰고 있는 것으로 끝이 난다. 가후쿠가 자신의 애착에서 벗어났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고, 어머니의 죽음 후 한번도 본 적 없는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 고향을 떠나 히로시마에 온 미사키에게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이유가 없어졌다는 뜻이기도 할 테다. 가후쿠를 통해 아버지를 찾았으니 말이다. 그녀가 한국을 택한 이유는 아마 가후쿠와 함께 초대 받아 저녁을 먹은 한국인 부부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연극제의 코디네이터 윤수와 <바냐 아저씨>에서 소냐 역을 맡은 유나 부부가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서로의 언어를 배워 소통하는 모습(유나는 말을 하지 못하는 언어 장애인으로, 윤수가 수어를 배워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역해준다)에 감동을 받았을지 모르겠다.


앞서 말한대로 가후쿠는 <바냐 아저씨>를 다언어로 연출한다. 서로의 언어를 모르는 배우들은 책상을 침으로써 대사의 끝을 알릴 정도이다. 무대에 극을 올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몸을 움직이기는 커녕, 대본만 그것도 감정을 싣지 않고 반복해서 읽으라고 해서 배우들은 매우 지루해한다. 이건 영화의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가 실제 영화를 만드는 법이라고도 한다. 아마 그렇게 함으로써 배우들이 대사와 극 전체를 빠삭하게 기억하게 됨은 물론, 카메라 또는 관객 앞에서 연기할 때 최초로 감정을 싣게 되니깐 관성적인 연기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따라서 영화 후반부에 드디어 무대에 올라간 <바냐 아저씨>에서 소냐가 하는 다음 대사가 감동적으로 와 닿았다. 바냐 아저씨를 뒤에서 앉고 그의 눈앞에서 해보이는 수어를 나도 함께 넋을 놓고 지켜보았던 것이다.

“우리가 무얼 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우리는 살아가야만 해요. 그래요. 우린 살아야 해요. 우리 앞에는 길고 긴 밤과 낮으로 이어지는 여정이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는 운명이 우리에게 떠안긴 짐을 견뎌야 하죠. 쉼 없이 누군가를 위해 일해야만 할 거예요. 그렇게 우린 늙어갈 거예요. 마침내 우리의 마지막 시간이 왔을 때, 비로소 무덤 너머의 것과 겸손하게 마주하게 될 테지요. 우리는 지난 삶을 돌아보며, 충분히 고통스러웠고, 눈물을 흘렸으며,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말할 거예요. 그리고 신은 그런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겠죠.”


지난한 삶도, 애도 작업도 계속해서 살아가고 해나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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