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 필링스』캐시 박 홍
코로나 전인 2019년 여름, 부모님과 함께 유럽여행을 할 때 나는 인종차별을 당할까 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열여덟 살 때 혼자 유럽 4개국을 여행한 것을 시작으로 스무 살부터는 유학을 하는 등 나는 수년 동안 독일과 이탈리아를 오가며 생활을 했다. 그중 불쾌한 경험을 한 것은 손꼽을 정도다. 그나마도 신체적 위협을 느낀 적은 없다. 누군가 물으면 유럽에는 인종차별이 "거의" 없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의식 중에는 인종차별을 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았나 보았다. "거의" 없는 건 아예 없다는 게 아니니깐.
그리고 그것을 나 혼자 마주하면 똥 밟았다 치고 툴툴 털고 지나갈 수 있겠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존엄을 잃는 것을 목격한다면 (또 내가 목격하는 것을 그 사람이 알게 된다면) 정말 가슴 아프고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것이다.
당시 나는 예방책이랍시고 부모님께 서양식 매너를 교육시켰다. 그리고 부모님이 눈에 띄게 행동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다. 부모님과 여행을 하면서 쾌적한 환경을 갖추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필요한지 알게 되었다. 숙소의 어느 한구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영어를 못하는 부모님 대신 내가) 호텔 프런트에 가서 시정을 요구해야 했고, 방 안에 당연히 있을 거라 기대했던 물품이 없으면 (오래 걸어 피곤한 부모님 대신 내가) 구하러 다녀야 했다. 혼자 지낼 때는 이런 조그만 불편함이야 감수하고 살았다. 그게 내가 무던해서라고, 부모님보다 젊어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이너 필링스』를 읽으면서 어쩌면 나의 무던함은 진짜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부딪힐 수 있는 더 큰 불편함-예를 들어 여기서는 원래 그런데 넌 왜 그렇게 까탈스럽니라는 시선, 내 요구가 무시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 등등-을 피하고자 그 욕구들을 억압한 결과가 아닐까 의심이 되기 시작했다.
책에서 가장 끔찍했던 장면은 데이비드 다오라는 베트남계 미국인 남성이 오버부킹 된 유나이티드 항공의 비행기에서 끌려 나오는 장면이었다. 2017년 나도 실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당시 항공사와 미국 언론은 이것을 인종적 문제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그리고 논점과 전혀 상관없는 그의 어두운 과거를 들췄지만) 나를 포함한 많은 아시아인들이 거기서 우리의 아버지를 보았을 것이다. 저자는 여기에 더해 언제든 쫓겨나기 쉬운 아시아인의 현실을 본다.
그의 외양은 나는 공간을 차지하는 사람도 아니고 소란을 피우는 사람도 아니오라고 말하고 있었다. (...) 트라우마를 겪고 이곳으로 이민 온 많은 이민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어떤 일이든 감수한다. 사람을 속인다. 아내를 구타한다. 노름을 한다. 그들은 생존자이고, 대다수의 생존자가 그렇듯, 지독한 부모가 된다. 나는 다오를 보면서, 당신의 아버지가 집에서 질질 끌려 나오는 모습을 목격하던 우리 아버지를 생각했다. 태어난 고향 집에서, 제2의 고향 집에서, 태어난 고국에서, 제2의 고국에서 쫓겨나고 내쳐지고, 퇴출, 퇴거, 추방되던 그들을 생각했다.
저자의 아버지도 미국으로 이민 와 튀지 않으려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런 그가 폭발하는 모습이 책에 딱 한 번 등장하는데 바로 그의 어머니, 즉 저자의 할머니가 10대 아이들에게 놀림과 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안 직후이다. 그는 이웃의 10대 여자애를 찾아내 손찌검을 하기까지 한다. 어린 저자는 아버지의 이런 사적 복수를 통쾌해하지 않는다. 다만 그 일로 가족들에게 곤란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조마조마해한다.
인종주의의 한 가지 특징은 아동을 성인처럼 취급하고 성인을 아동처럼 취급한다는 점이다. 부모가 아이처럼 굴욕 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깊은 수치심을 유발한다. (...) 미국에서 아시아인으로 자란다는 것은 권위 있는 사람이어야 할 부모의 굴욕을 목격한다는 것, 그리고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는 것을 뜻한다. 부모가 아이를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민 1.5세대 또는 2세대 들이 영어가 서툰 부모님과 미국 사회를 이어주기 위해 통역을 하고 문서 처리를 대신하면서 조숙하게 자란다는 것은 이전부터 들어왔다. 부모가 겪은 모멸과 고생을 알기에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직업을 얻는다. 그렇게 획득한 경제적 부와 모델 마이너리티라는 명예는 아시아인과 인종차별을 멀리 떨어뜨려 놓는 것 같다. 실제로 인종 문제라고 했을 때 우리는 흑인을 먼저 떠올린다. 심지어 같이 핍박받는 인종으로서 연대하기는커녕 서로를 "게으르고 못 배운 (그래서 여전히 가난한) 흑인", "악착같은 (백인에게 빌붙어 사는) 동양인"이라는 편견으로 바라보며 반목하고 있지 않나. 그게 큰 비극으로 번진 것이 1992년 LA 폭동일 것이다.
저자도 정체성 정치는 낡은 것이 아니냐며 예술을 위한 예술에 집중을 하지만(저자인 캐시 박 홍은 시인이다.) 시를 쓰면 쓸수록, 그리고 독자 앞에 자신을 드러내면 낼수록 자신의 정체성을 의식하게 된다. 예술을 둘러싼 제도도 인종적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시아인으로서의 경험과 감정을 담으면 정치적이고 촌스럽다는 비판을 받지만, 그건 백인의 시선을 디폴트로 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주장일 것이다.
예술가는 예술작품을 숙달된 기교라는 규칙에서 해방하고, 그런 다음 내용 면에서 해방하고, 그런 다음에는 마르틴 하이데거가 말한 그 자체의 사물성으로부터 해방하여 예술작품이 삶 자체에 감싸이도록 한다. 예술작품을 박탈당한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예술가의 행위뿐이다. 문제는 예술가의 규칙 위반을 역사가 "예술"로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점이며, 이것은 그 예술가가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여성 예술가는 좀처럼 "교묘히 넘어가"지 못한다. 흑인 예술가는 좀처럼 "교묘히" 넘어가지 못한다. 뺑소니치고도 교묘히 넘어가는 사립학교 부잣집 아이처럼, 교묘히 넘어간다는 것은 그 사람이 무법자라는 뜻이 아니라 법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악동 예술가가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신분 때문이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마이너 필링스, 즉 소수적 감정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소수적 감정은 저자가 만든 단어로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소수적 감정은 일상에서 겪는 인종적 체험의 앙금이 쌓이고 내가 인식하는 현실이 끊임없이 의심받거나 무시당하는 것에 자극받아 생긴 부정적이고, 불쾌하고, 따라서 보기에도 안 좋은 일련의 인종화된 감정을 가리킨다.
그리고 저자는 자신이 느꼈던 감정들을 더 이상 예민하거나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세세하게 명명하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흑인 인권 운동의 역사와 아시아계 여성 예술가들의 계보를 끌어안는다.
아시아인은 흑인과 앞서 언급한 대로 미묘한 관계를 가져왔다. 거기다 요즘 블랙피싱 등 주류 문화가 소수 민족의 문화를 차용해 쓰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당사자 운동이 대두되다 보니 다른 소수자들과의 연대를 말하기가 조심스러운 점이 있다. 저자는 여기에 대한 대안으로 영화감독 트린 T. 민하의 "근처에서 말하기(speak nearby)"를 내세운다. 흔히 쓰는 "관해 말하기(speak about)"에 반해 “근처에서 말하기”는 내 체험 밖에 있는 문화를 "대표하거나, 대신하거나, 그 위에 군림하여 발언하지" 않는다. 특히 서로 사이의 간격을 인정한다는 표현이 인상 깊었는데 그 과정에서 상대가 내 멋대로 정의 내려지지 않고 공간 안에서 여러 의미들이 부딪히고 어우러지면서 자유롭게 형성될 수 있는 것일 테다.
시인으로서 저자가 언어를 다루는 방법, 특히 영어에 대한 태도도 흥미로웠다. 미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학교에 가서야 영어를 제대로 배운 바이링구얼로서의 콤플렉스를 역으로 이용하여 학교, 사회, 제국의 언어인 영어를 전유하고 비틀어 사용하는 것이다.
서투른 영어는 나의 유산이다. 나는 완벽한 영어에서 일부러 멀어질 것을 외치는 작가들과—영어를 탈취해 도망자의 언어로 비틂으로써 영어를 어지럽히고, 뒤흔들고, 난도질하고, 괴랄하게 만들고, 타자화하는 작가들과—문화적 계보를 공유한다. 영어를 타자화하는 것은 듣는 사람이 그 언어에 박힌 제국주의 권력을 알아차리도록 하는 것이며, 영어를 절개하여 그 어두운 역사가 비어져 나오게 하는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의 한 챕터를 할애하는 스탠드업코메디와 내가 좋아하는 랩의 방식과도 맞닿아있다.
이런 유산을 계승하면서 자신이 빚진 상대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아니라 이들 운동가와 예술가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특히 "I am here because you were there."라는 문구에 희열이 느껴졌다. 백인들은 미국에서 나고 자란 아시아인에게조차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듯 "Where are you from?"를 끊임없이 외치고, 출신 국가의 전쟁과 역사적 비극에서 벗어나 아메리칸드림을 누릴 수 있는 호혜를 베푼 것처럼 군다. 하지만 아시아계(또는 다른 피식민인)가 미국(또는 다른 서구 국가)에 있는 이유는 미국인이(또는 다른 제국주의자가) 먼저 거기에 갔기 때문이다. 고향을 뺏고 착취를 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게 책은 틱 재발을 의심하고, 우울증을 앓고 있는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을 했다가 백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글로벌 다수로서의 "우리"를 소집하며 끝이 난다.
이 책을 읽은 많은 한국인들의 감상이 어쨌거나 나에게는 내 나라가 있어 다행이다로 귀결이 되는 것 같다. (사실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인종 문제보다는 여성으로서 느꼈던 차별과 부정적 감정을 대입해 더 공감했다. 그래서 "여성에게 조국은 없다"라고 하나?!? 하지만 이 문제는 너무 길어질 듯하니 다음에 다루는 것으로 하자.)
단일민족국가라는 허상은 많이 깨진 것 같지만, 아직 한국에는 2020년 BLM에 대한 무관심이나 2018년 예멘 난민 혐오 등에서 드러나듯 세계시민의식이나 인종차별에 대한 의식은 부족한 것 같다. "나 먹고 살기도 힘든데"에서부터 이질적인 문화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까지.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를 침략한 역사가 없고 스스로 전쟁 폐허에서 경제 성장을 일구어냈다며 책임을 회피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이 자랑하는 한강의 기적은 지정학적인 이유로 서구의 원조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 이라크 파병 등도 감은 눈을 할 수는 없는 문제이다.
번스틴에 따르면 인종적 순수란 단순히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아는 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상태"로서 "음, 나는 인종이 문제라고 보지 않는데"와 같은 언급 속에 엉켜 있으며, 여기서 '나'는 보는 일을 가로막고 있다. 순수는 하나의 특권이자 인지 장애, 잘 보호된 무지의 상태이며, 일단 이것이 성인기까지 오래 이어지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로 굳어진다.
인종차별은 옛날 일이라며 현실을 외면하는 백인들의 순진함을 꼬집는 장면이다. 언제든 내가 다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폭력을 저지르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소수로서 억압받고 무시받았던 감정들을 세세히 끄집어내 살피고 목소리를 냄으로써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