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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주연 Apr 05. 2022

세기말의 공포와 희망

《엔젤스 인 아메리카》

지지난 주 토요일 보려고 예매해놓은 공연이 공연 관계자의 코로나 감염으로 취소되었다.

총 8시간으로 4시간씩 2부로 나뉘어 진행되는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작년 말에 한국에서 초연했다는 1부는 놓쳤지만 2부 공연을 보고 온 지인의 추천으로 부랴부랴 예매를 했다.

예습 삼아 1부 <밀레니엄이 다가온다>는 TV 드라마로 보고

몰입감에 2부도 이어서 보려다가 줄거리를 미리 알면 재미없을 것 같아 연극으로 봐야지 하고 참고 있었는데;;


하는 수 없이 2부 <페레스트로이카>도 TV로 마저 보게 되었다.

1991년작 연극을 2003년 TV 시리즈로 만든 것으로 알 파치노, 메릴 스트립, 엠마 톰슨 등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한다.

원작자인 토니 쿠슈너는 연극에서나 영상 각색에서나 자신의 극본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연출.연기할 것을 요구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연극을 보고 온 지인이 두 작품 모두 배우의 동선 등 디테일까지 똑같다고 했다. 연극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조금은 가셨다.


1980년대 뉴욕의 게이 커뮤니티를 배경으로

에이즈에 감염된 프라이어,

두려움에 그런 그를 두고 떠나는 애인 루이스,

모르몬교 출신으로 부인도 있지만 직장에서 만난 루이스에게 끌리는 변호사 조,

(미쳐가는 부인 하퍼와 부부를 찾아온 어머니 한나)

조의 상사이자 유대인 동성애자로 에이즈에 걸렸으나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로이 콘,

그가 간첩 혐의로 사형시킨 에델 로젠버그의 유령,

로이 콘을 혐오하면서도 정성껏 간호해주는 벨리즈 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천사!

애인에게 버려졌다는 충격 때문인지 병으로 끙끙 앓고 있던 어느 밤, 프라이어가 자신에게 메시지를 들고 찾아온 천사를 보는 것이다.

천사는 오랜 역사를 가진 WASP 가문 출신의 프라이어를 예언자로 임명하고, 인류가 끊임없이 이주하고 섞이는 바람에 지금의 혼란이 생겼다며 그만 움직이라고 말한다.


1980년대 미국은 레이건 집권기로 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가 극대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이즈가 창궐하면서 게이 커뮤니티에 대한 편견과 공포가 만연했다.

프라이어가 들은 천사의 예언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비난을 내면화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병이나 천사가 정해놓은 운명에 굴복하지 않기로 한다.

천사를 따라 천국에 올라가 예언서를 돌려주고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끌어안고 개척해나가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프라이어는 자신의 전 애인 루이스가 새로 사귄 애인 조의 어머니 한나의 도움을 받는다. 한나는 독실한 모르몬교로서 성경을 꿰고 있어 천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조언을 해줄 수 있었던 것이다. 조를 미행하다 한나 앞에서 쓰러져 병원에 실려오게 되는데, 얼핏 어울리지 않는 게이 남자와 독실한 모르몬교 중년 여성은 서로의 편견을 마주하고는 각자 "나를 쉽게 판단하지 말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스테레오타입을 뛰어넘어 상대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인 1990년 1월 여전히 투병 중인 프라이어와 그를 응원하는 인물들의 연대로 극은 끝이 난다.

프라이어의 생일을 맞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인 센트럴 파크의 베데스다 천사 동상 앞에서 모인 것이다.

베데스다는 예루살렘에 강림한 천사로, 그가 강림한 자리에 흐르기 시작한 샘에 몸을 적시면 몸과 마음이 다 치유된다고 한다. 로마가 예루살렘을 침략했을 때 샘은 말라버렸으나 새천년이 오면 다시 흐를 거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리고 한나는 새천년이 오면 프라이어를 그곳으로 데려가겠다고 약속한다.


매카시즘을 대표하는 인물 로이 콘이 죽고 소련이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시행하면서 냉전의 종식이 보이기 시작한다.

냉전의 공포와 그것을 이용하던 권력지향적 극우 정치인들, 정체성 부정의 시대는 가고

와해된 커뮤니티와 민주주의, 정의를 회복할 차례인 것이다.


일견 너무 이상적인 엔딩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세기말의 어둡고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희망을 본 것은 그것대로 용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어쩌면 제목에서 말하는 천사는 프라이어에게 나타난 메신저가 아니라 서로를 끌어안는 등장인물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래서 제목 속 천사가 단수 angel이 아닌 복수 angels일 것이다.


천사 전에 프라이어에게 나타난 그의 조상들은 13세기와 17세기에 각각 그 당시 역병에 의해 죽었으며 20세기에도 또 다른 역병=에이즈가 있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그 장면을 코로나 시대에 보고 있노라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 초기에 많은 나라들이 국경을 닫고 중국인 또는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내보였다.

장기화되면서 돌봄 노동에 대한 문제점이 드러나고 이런 팍팍한 상황으로 인해 혐오를 이용한 정치가 다시 성행하고 있다.

얽히고설킨 문제들과 "코로나 이전은 없다"는 경고 속에서 희망을 말하는 건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이 와중에도 우리 주변의 작은 영웅들이 불러일으키는 기적의 소식들을 보면 인류는 여기서도 끝끝내 희망을 찾을 것 같다.

그 비전을 담은 작품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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