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경계에 선 사람들

by 김주영

나는 두 개의 이름을 가졌다.

일본 이름은 기록에 있었고, 조선 이름은 입속에만 있었다.

조선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그저 '태어났다'는 사실은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1945년 광복 이후, 우리는 일본에서 밀려나듯 쫓겨왔다.

조선 땅에서도 내 어머니의 언어는 침묵이어야 했고,

나는 ‘왜놈 새끼’라는 말에 입을 닫는 법부터 배웠다.

말을 몇 개 할 줄 안다는 이유로 미군정 아래 통신·문서 정리병으로 일했다.

일본어로 된 군수 기록이나 작전 보고서를 해석하는 일,

누군가의 명령을 '우리말'로 바꾸는 일.


미군정이 해체된 뒤, 그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은 국방경비대에 배속되어 1948년 가을, 제주로 갔다.

작전명은 ‘4.3 좌익 무장 세력 소탕’.

상관인 대대장은 구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고, 그는 나를 ‘말귀 잘 알아듣는’ 부속품으로 다루었다.

작전 문서의 일부는 여전히 영어 또는 일본어 형태로 전달되었다.

나는 그런 것들을 번역해 주었다.

그 때의 제주에서, 내 존재는 군인들에게도, 제주 사람들에게도 필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무관심에 나는 오히려 안도했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편했다.


그날은 흐렸다.

우리 중대는 세화리 산자락 아래 움막에서 한 가족을 체포했다. 늙은이 둘, 어린 계집아이 둘을 포함해 열 명 남짓이었다.

나는 늘 하던 대로 연대 본부와 교신하며 명령을 전달했다.

“은신자. 협조 거부 시 즉각 사살하라.”

옆에 있던 하사 하나가 작게 속삭였다.

“중위님, 어린 아이가 둘 있습니다.”

나는 침묵했다.

그건 내 판단이 아니라고, 내 역할이 아니라고 마음속에서 되뇌었다. 그저 시끄러운 일이 없기를 바랬다.

잠시 후 여자들과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제발… 우린 그냥 여기서 화전하는 사람들일 뿐이에요…”라고 절규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그 여자의 팔에는 아이가 매달려 있었다.


군인 하나가 아이의 손목을 묶으려 할 때, 나는 입을 열었다.

“그, 그만하라고!”

대대장이 놀라면서 돌아봤다.

“뭐라 했나, 중위?”

나는 다시 말했다.

“그만두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내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내 생각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연대에서 ‘골 때리는 고문관’이 되었다.

명령을 늦게 전달했고, 영어나 일본어로 된 회람지를 일부러 잘못 번역하기도 했다.

작전이 시작되기 전, 전깃줄을 일부러 빼기도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아무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날 아이 하나가 살아남은 것으로

나는 충분하다고 믿으려 했다.


몇 주 뒤, 나는 연대본부로 회수되었다.

‘정신 이상 증세’,

‘지시 불이행’,

‘의사소통 오류 다발’.

나는 그렇게 군에서 버려졌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나는

다시 누구의 이름도 부르지 않고, 누구에게도 불리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지금 나는 어느 어촌 마을에 살고 있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말보단 손짓으로 더 많은 걸 전한다.

누군가 내게 묻는다.

“선생님은 어떤 사람이었어요?”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언제부터인가 나는 말하고 싶어하지 않았으니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는 조율되지 않은 피아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