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호와 기관사 (1)

우주선 에스메랄다호의 사람들

by 김주영

다음은 제가 준비하고 있는 SF 소설의 인물들에 대한 초안입니다.

많이 부족하고 조금 긴데, 여러분들께 꺼내 봅니다.




누구나 처음 본다면, 그녀를 앳된 소녀로 볼거다.

하얗고 살이 오른 볼은 귀엽기까지 했고, 맑은 눈동자는 아직 세상의 쓴맛을 겪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얼굴에는 오래된 상처 같은 시간이 숨어 있었다.

눈가에 자리한 미묘한 주름, 무심한 입매, 그리고 그 깊숙이 자리한 강한 기운.

오사카 이쿠노구, 코리안타운 골목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류 미츠호(柳美津穂)'라 불렸다.

이름은 한국식이었지만, 발음은 일본 억양에 길들여져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1940년대, 포항 청하면에서 오사카 센난 지역으로 수 천의 동포들과 함께 짐처럼 실려 왔다.

센난 지역. 하루 종일 하얀 석면 가루가 눈처럼 내려 쌓이는, 숨만 쉬어도 폐가 아픈 곳이었다.


류 미즈호는 어릴 적부터 거칠게 자랐다.

둥글고 하얀 순하게 생긴 얼굴에 크고 날씬했다.

사춘기가 갓 지났을 때 전신에 온 우주를 배경으로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는 석가모니를 그린 '이레즈미'를 새겼던 그녀는 이후 파랑색 스즈키 작업복을 주로 입고 다녔다.

오사카 사카우메구미의 조직원으로 이름을 올렸고, 도톤보리 뒷골목을 누볐다.

어느 날, 세 명이 함께 움직였지만 약속한 시간에 조장은 오지 않았다.

미즈호는 그날따라 이상하게 신경이 날카로웠다.

창고로 들어가는 순간, 반대파의 매복이 있었다.

총은 쏘지 않았다.

쇠파이프가 어깨를 내리쳤고, 머리에서는 피가 흘렀다.

두 명이 죽었고, 몇몇 젊은이들이 찌린내 나는 축축한 골목에 쓰러졌다.

이내 경찰이 들이닥쳤다.

그 사건 이후, 어머니는 단 한 번 구치소에 왔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미츠호야... 사람은… 너도 사람이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 말을 남겼다.

그날 이후로도 미츠호에겐 따뜻한 말을 던지거나 손을 내밀어 줄 사람이 없었다.


"이건… 정밀한 우주선의 엔진이다. 앞으로 이 기계가 너희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형무소 기계반장이 말했다.

미즈호는 단지 버튼 몇 개를 눌러 메인 엔진과 발전기를 구동시키던 날의 감각을 잊지 못했다. 뭔가 거대한 것이 도사리고 있는 무대의 웅장한 서막이 열리는 듯 했다.

기계는 뜨거웠고, 일정한 소리로 숨을 쉬었다.

"기계는 거짓말 안 해.

압력이 새면 쉿쉿 소리 내고, 밸브 막히면 꺽꺽거려.

사람보다 낫지."

그 말은 미즈호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그녀는 매일 손끝으로 진동을 느끼며 기계를 돌봤다.

기름냄새, 땀냄새, 철냄새. 그것들은 모두 진실했다.


삼십대 초반에 미즈호는 출소했다.

출소 후 옛 친구들을 피해 담당 형사 소개로 참치 공장에서 일했다.

어머니 유품은 거의 없었다.

빛 바랜 사진과 낡은 쪽지 하나가 하나 있었다.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청하면 ○○리’

그곳이 어머니가 말하지 않은 고향이었다.

아버지의 고향일 수도, 아니 할아버지의 고향일 수도 있었다.

어느 날 미즈호는 조용히 짐을 쌌다.

그는 이제 기계보다 사람이 두려운 남자가 되어 있었다.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부산에 도착한 후 고속기차로 같아 타 경주에 도착했다. 거기에서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도착한 청하면의 작은 물양장의 수리 중인 어선.

“자네, 오일러 일, 해 봤나?”

물양장에서 낡은 어선을 수리하고 있던 자상한 인상의 늙은 기술자가 말했다.

미즈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 배에 올라 작은 기계실을 들여다보았다.

기계는 노후했지만, 숨을 쉬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었다.

기계는 그녀에게, 아주 작은 진동으로 인사를 건넸다.

"이런 아가씨였군. 뭐, 어쨌든, 그런데 제법이야. 엔진이 사람을 알아보는 거 같아.

어때 많은 걸 주지는 못하겠지만 같이 일하던 놈이 다쳐서 병원에 있는데, 나와 같이 일할 생각 없나?"


미즈호는 바닥에 앉아 낡은 카세트 플레이어를 꺼냈다.

어머니가 살아 생전에 눈물로 사랑했던 노래.

모리야마 료코가 부르는 '죽은 남자가 남긴 것'이라는 일본의 오래된 반전가요였다.

"죽은 남자가 남긴 것은 한 아내와 한 아이 그 밖에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묘석 하나 남겨두지 않았다.

죽은 역사가 남긴 것은 빛나는 오늘과 다시 오는 내일 그 밖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그 밖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한 줄, 두 줄.

가사보다 녹음기 소리,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딸깍—

윙—

딸깍—

기계는 거짓말 하지 않았다. 너무 오래 되었나 보다.

류는 모래 위에 등을 대고 누웠다.

멀리서 출어했다가 지친 몸을 끌고 오는 고깃배들의 신음이 들려왔다.

그녀는 그 소리를 들으며, 처음으로 자신이 뭔가의 푸근한 품에 안겨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포항 부두의 겨울은 늘 조금 늦게 온다.

한낮인데도 용접 불꽃 냄새 사이로 찬 바닷바람이 비죽비죽 들이치던 날이었다.

조선소 본동 쪽, 낡은 기계창고 뒤편.

새벽에 고기 잡으러 나갈 어선들이 여러 척 매달려 있었다.

그늘진 모퉁이에서 말없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삐적 마른 누군가 다가왔다.

얼룩이 깊게 밴 파란 스즈키 작업복 차림의 미즈호는, 바닥에 떨어진 용접봉 자투리를 발끝으로 굴리며

담뱃불을 붙이려는 삐쩍 마른 남자를 흘끗 쳐다 보았다.

“요즘 사람들은 연초를 잘 안피는데, 아저씨는 안 그렇네.”

옆에 선 남자는 마른 체구에 모자를 눌러쓴 채 잠시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연초가... 좀 더, 입에 익어서요.”

말투가 어딘가 어색했다.

단정하지만 맥없이 이어지는 말 끝, 그리고 눈치를 보며 피우는 손끝의 긴장감.

거친 엔지니어 바닥에서 어울리지 않는 말투와 공손함, 그리고 움츠려든 듯 작고 소심한 말투

제법 아는 건 많은 듯한데, 이상하게 어리숙한 느낌.

세상 물정에 한참 뒤처진 사람 같은 기색이 묻어 있었다.

“배 타던 양반이지?”

남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네. 지금은 육상 대기 중입니다.

잠깐 여기 수리선에 파견 왔어요. 넘버 2 발전기가 작동이 되지 않아서요”

미즈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특유의 ‘나를 설명해야 할 것 같은 어조’,

그건 오래전 자기가 조직에서 빠져나와 조선소에 발을 들였을 때

처음 몇 달간 늘 입에 달고 살았던 말버릇과 비슷했다.

“그럼, 대기 중이면... 눈치 좀 많이 보겠네.”

“예?” 기관사는 되묻는다.

“회사라는 데가, 그런 놈들한텐 딱이거든.

능력보단 센 놈 눈치 잘 보는 사람들이 잘 나가.”

말끝이 거칠었지만, 기관사는 별 반응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맞는 말이라는 듯, 아니면 그냥 반박할 의지조차 없다는 듯.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담배 한 개비가 다 타들어갈 즈음, 미즈호가 먼저 말을 이었다.

“일 끝나고 시간 되면, 선술집 하나 있어.

내가 거기서 가끔 트럼펫 부니까 심심하면 와.

술은... 내가 낼 테니.”

기관사는 머뭇거리며 웃었다.

“제가 가도 괜찮을까요?”

미즈호는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고는 고개를 돌렸다.

“여긴, 누가 괜찮고 말고 따질 데가 아녀요. 그냥, 와요.”

그리고 그녀는 말없이 작업장 쪽으로 걸어갔다.

기관사는, 그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주머니에서 새 담배를 하나 꺼냈다.

'좋은 사람처럼 보이는 아가씨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측두엽 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