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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빛이 된 아버지와 아들 - Part 2 (완결)

오에 겐자부로와 히카리 이야기

by 김주영

'리틀 보이'는 지상 500미터에서 폭발하여 폭심지 반경 12킬로미터 내의 군인 아닌 사람들을 무더기로 죽였다. 8월 6일 당일에만 8만 명이 녹거나 증발하거나 날라갔다. 상체는 어디론가로 가고 발만 땅에 붙어있는 시신도 몇 있었다. 1945년 12월 말까지 모두 14만 명이 사망했다. 히로시마 인구 34만 명이었을 때의 일이다. 그리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많이 아팠다. 실명, 얼굴의 변형, 켈로이드, 백혈병, 검고 텅 빈 마음,...

하지만 폭탄이 떨어진 직후부터 몇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수의 히로시마 사람들은 비록 너무 나쁜 운이었지만 세상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 절박하고 비참함 속에서 많은 수의 사람들은 제 나름의 위엄을 지키려고 했다.

함께 피폭당한 히로시마의 의사들은 어느날 갑자기 사람들에게서 백혈구 수가 너무 작아지거나 너무 많아지는 것을 발견했다.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그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시간이 흘러 결국 히로시마 의사들 말이 맞았다. 간호사, 치과의사, 약사를 포함하여 살아남은 200여 명의 히로시마 의료진은 10만 명의 부상자를 돌보았다. 하지만 피폭당한 많은 사람들이 심각한 백혈병이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어 갔다.

흐루시초프가 핵실험을 재개한다고 발표했을 때 피폭당한 어느 노인은 할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그는 이후 엄청난 자기 수치심에 시달렸다.

'분하고 수치스러워!'

어느 한국인 소년은 상처입어 누워있는 일본인 소녀를 구해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곤겐 산에 구호서가 만들어졌대, 같이 갈래?' 어눌한 발음은 분명 일본인의 것이 아니었다.

소년은 소녀를 업어 구호소로 데려다 주고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네 살때 피폭당한 어느 청년은 마지막 2년을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사회적인 존재이고자 했다. 그는 취직을 했고, 2년이 지나 심각한 구토증에 시달리다 재입원했고, 최악의 고통 끝에 사망했다. 그의 사망 앳된 약혼녀가 병원에 찾아와 고맙다고 의료진들에게 도자기 선물을 남기고 갔다. 그녀는 다음 날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 전후에 태어난 그녀의 나이 스물이었다.


나는 그동안 남들 앞에서 온갖 잘난 척, 대담한 척, 용기있는 척, 선량한 척을 해 왔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는 약하고 무책임하고 비열하기까지 다는 것을 고백한다. 나는 히카리의 병이 의사의 오진이기를 간절히 원했고 그것을 소설로 쓰기까지 했다. 그 소설에서처럼 아들의 안락사를 부탁하러 병원으로 달려가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원한들 그건 이기심으로 가득찬 나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내가 무심코 집어 든 타올이 뜻하지 않게 너무 뜨겁게 느껴진다 하더라도, 면도를 기다리고 있는 손님의 얼굴에 던지면 안 된다. 뜨겁더라도 들고 있어야 한다. 어쨌든 내 가족에게 생긴 일은 내가, 그리고 내 가족이 함께 책임지고 감당하고 풀어 나가야 할 일이다. 가족이야 말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사람들이니 말이다.


나는 히카리의 고통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로 결심했다. 이건 집단의 체제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문제다.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여전히 내게 있음에 감사한다.

정치가 제 눈 제가 찌르는 가장 흔한 사례 임을, 그리고 한 집단이 흥하거나 망하는 데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수도 있음을 충분히 인정하지만, 나는 그동안 주제 넘게 착각하고 살았던 거다. 그보다 먼저 할 일이 있다. 자기 자신과 힘들게 싸우고 있는 내 아들을 봐야 한다. 힘들고 위험한 일들은 정치하는 자들이 직접 해야 한다. 독창성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들은 입으로 먹고 사는 코메디언이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어쨌든 국민들은 세금을 내고 그들은 그걸로 살아가는 거다.


히카리가 6살 무렵 우리 부부는 식물인간이라 생각했던 그가 TV에서 흘러 나오는 새소리에 반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우리는 어떤 아나운서가 새 이름을 얘기하고, 이어서 그 새의 울음 소리가 나오는 카세트테이프를 히카리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 가족이 함께 산책하던 중 어느 주택에서 흘러 나오는 새소리를 듣고 히카리가 말을 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제대로 된 발음으로 말을 했다. '흰 눈썹 뜸부기'라고 말이다.

우리는 음악 선생님을 찾아 히카리에게 피아노를 가르쳤고 악보 보는 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히카리는 10대 후반에 작곡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음악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나는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이라서, 적절하고도 제대로 된 문장을 쓰기 위해 데뷔 이래 수십 년간 거의 매일 온갖 훈련을 한다. 여러 종류의 고전과 현대 문장가들을 읽고 거울로 삼는다. 내가 쓴 글을 소리내어 읽어보고 몇 번이고 고쳐 쓴다. 사실 그런 일이 하기 싫을 때도 많았고, 대체 어디로 가야 할 지 막막하기만 할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내 아이들에게서 길을 본다. 아주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것만이 한 세대 먼저 살다 가는 사람의 유일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아이들은 아버지의 등불이야.

포기하지 않았던 내 자신과 아들에게 감사한다.




아래 링크에서 오에 히카리의 음악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Adagio in D min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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