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서로의 빛이 된 아버지와 아들 - Part 1

오에 히카리와 겐자부로 이야기

by 김주영

며칠 동안의 사건으로 인생 전체가 결정될 수도 있다 - 오에 겐자부로


전화가 왔다. 요즘 들어 말하기에 부쩍 재미를 붙인 히카리가 얼른 전화기를 낚아 챈 후 잠시 수화기에 집중하더만 'No !' 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내 아내 유카리가 무슨 전화야하고 전화기를 가로 챘고 영어로 몇 마디 한 후 전화기를 내게 넘겼다. 스웨덴 한림원으로부터의 나의 노벨문학상 선정 소식을 알리는 전화였다. 전화기 속의 여자는 좀 전에 말한 'No !'가 어떤 의미인지 물었고, 나는 내 아들의 영어가 서툴다고 했다.

아내와 아이들 모두 진심으로 나를 축하해 주었다.

그날 저녁 난 모두 잠들었을 때 히카리가 최근에 내게 선물한 자신의 2집 앨범 'Music of Hikari Oe 2' CD를 틀었다. '비탄 3번'이 흘러 나왔다. 나는 그 음악을 들을 때면, 울며 호소하는 어두운 혼의 소리라고 느꼈다.

나름대로 아프고 바빴던 지난 날들이 떠올랐다.


절친한 내 친구이자 처남이기도 한 '이타미 주조'와는 마츠야마 히가시 고등학교에서 처음 만났다. 이타미는 프랑스 시는 프랑스어로 읽어야 한다고 했고, 랭보를 사랑했다.

'어이, 겐자부로! 랭보는 프랑스어로 읽는 거야'

나는 그런 그의 영향으로 프랑스 문학을 전공했고, 대학시절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첫 번째 소설 '기묘한 아르바이트'는 개 150마리를 죽여야 하는 매우 드문 일에 대한 이야기였고, 다음 해인 1958년에 소설 '사육'으로 문예춘추에서 주는 아쿠타가와상을 받기도 했다. 평화로운 산골마을에 갑자기 등장한 흑인포로를 어른과 아이들 각각의 시선에서 사육하거나 돌보는 내용이었다.

나보다 이전 시대를 살았었던 이제 죽어야 할 사람들과 이제 살아가야 할 우리 젊은이들의 생각의 괴리는 꽤 멀어 보였다. 이땅을 또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내몬다고 생각한 나는 안보투쟁에도 적극 참여했다. 나는 우리 일본 사회의 비겁하고 변변치 못한 위정자들이 올바르지 못한 짓들을 저질렀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고 생각했다. 모든 행위에는 대가가 따르고 대가는 당대에서 책임져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나는 모든 종류의 전체주의에 저항하고자 했다. 그것이 좌파든 우파든, 공산주의든 파시즘이든, 모든 종류의 전체주의는 위선이고 허울뿐인 선동이다. 역겹다. 대체 그대는 누구이길래 결정을 하는가! 가면을 뒤집어 쓴 늑대다. 사람이 사는 여느 시절처럼 제각각의 탐욕과 부조리가 가득 찬 사회에 내 나름의 방식으로 자극을 주고자 했으며, 이왕이면 적극적으로 뜯어 고치고자 했었다.

그러던 중 이타미의 여동생 유카리를 우연히 보았고, 그녀를 본 순간 학자가 되겠다는 이전의 목표를 접고 결혼하기로 마음 먹었다. 글을 써서 가족을 먹여 살리기로 결심했고 그녀에게 프로포즈했다.


모든 것이 좋았다. 유카리는 28살에 첫 아이를 가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하였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수술을 받지 않으면 죽을 것이고, 수술이 잘 된다 하더라도 식물인간으로 살아야 할 거라며 우리에게 안락사를 권했다. 두개골 안에 있어야 할 뇌의 일부가 이탈한 뇌헤르니아였다.

우리 부부는 오랜 고민 끝에 아이를 낳기로 했고, 나는 태어날 첫째 아이를 위해 출생신고서, 사망신고서, 히카리라는 이름을 준비했다. 나는 그가 불쌍했고 '빛'이 되어주기를 바랬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히카리는 식물인간이 되어 울지도 못한 채 유리박스에 남게 되었다. 시력 장애, 발달 지연, 신체 조정 능력에 있어서 아들 오에 히카리의 회복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절망에 빠져 있던 1963년 8월, 잡지사 '세카이'에서 '제9회 히로시마 원수폭금지 세계대회' 취재를 요청하였고 나는 편집자 르토슈케씨와 함께 히로시마로 갔다. 그는 자신의 딸을 직전에 잃은 상태였고, 우리는 우울한 상태로 여행길에 올랐다. 게다가 핵문제에서 나를 이끌어 주었고 이번에 히로시마에서 보기로 했던 M마저 강대국들의 핵무기경쟁 꼴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파리에서 자살했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갔다.

인류가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지우고 싶은 거대한 기억이 히로시마에 있다.

'제9회 히로시마 원수폭금지 세계대회'는 개최 전부터 이미 분열된 대회였다. 강대국들은 핵반대협정을 원하지 않았고, 대회의 주체세력인 일본 공산당과 사회당은 주도하기 위해서 서로 동원하고 대립했으며, 공산당 국회의원들은 경찰 서장을 불러 대표 배지가 없는 사람들을 대회장인 평화공원에서 쫓아내라고 했다.

쫓겨나는 학생들이 말했다. '공산당, 짭새의 경호를 받으며 대회를 여는군!'

그날 이후 매년 8월 6일을 맞는 히로시마 사람들은 그날에 죽은 이들과 함께 그저 조용히 보내고자 했지만, 이제는 외부인들의 정치적 발언과 선동으로 가득찬 소음이 히로시마를 지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여기서 지옥을 보았던 켈로이드 투성이의 피폭자들은 무리하게 햇빛으로 나와 힘없는 목소리로 '다시는 이런 일이,...'라고 말을 뗐다.

그 우울했던 63년 원수폭금지세계대회를 지나 다음 해에 우리는 다시 히로시마로 갔다. 본격적으로 피폭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인간으로서의 위엄을 버리지 않으려는 히로시마적인 사람들을 만났고 나도 변해갔다.




(Part 2 완결로 이어집니다.)


아래 링크에서 오에 히카리의 음악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Adagio in D minor


keyword
이전 06화40년 만의 귀향 - Part 2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