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와 스페인을 거쳐, 1963년에 나는, 라틴 재즈의 바흐이면서 부유한 후원자인 위대한 '에르네스토 레쿠오나'가 만든 '레쿠오나 쿠반 보이즈'와 함께 스웨덴에 공연하러 갔었고, 공연장에서 내 운명의 여신 '로즈마리 퍼슨'을 만났다.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그녀는 기병장교인 아버지와 함께 왔고 공연장 로비에서 놀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어쩜 저렇게 예쁘고 선해보일까라고 감탄하며 지나가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발데스씨! 제 딸 아이에게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처음엔 쑥스러워 했지만 곧 쾌활해진 로즈마리 퍼슨은 라틴재즈에 흥미로워 하면서 몇 가지를 물었다. 그녀는 내가 아이처럼 웃는 것이 보기 좋다고 했다.
그녀는 이틀 뒤에 혼자서 공연을 보러 왔다. 며칠이 지나 우리는 서로에게 끌리듯 사랑에 빠졌고 같은 해에 결혼했다. 그 때 내 나이 44살이었다. 내 옆의 쿠바사람들은 어린 백인 여자와 사는, 반은 흑인인 나를 걱정하고 말렸지만 나는 스웨덴에 눌러 앉았다. 한 여자를 만나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사랑과 예술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나는 사랑을 택했다. 우리는 두 명의 아들을 두었고 나는 가족을 꾸리기 위해 호텔 라운지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하지만 한 번도 자부심을 잃은 적은 없었다.
1965년, 피델의 친구 체는 '쿠바에서는 모든 일이 끝났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사라졌고, 2년 뒤 39살의 나이로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무참히 피살당했다. 그는 쿠바에서처럼 타인이었다. 나는 카스트로 정권도 곧 끝날 거라는 믿음을 가졌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쿠바의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연락할 길은 있었지만 죄책감과 바쁘다는 일상의 타협에 묻혀 차츰 잊혀져 멀어져 갔다. 그때는 호텔과 거기에서 좀 떨어진 내집만이 나의 세계였다. 1962년 피델은 미국의 턱밑에 미사일 기지를 두려 했고, 미국은 모든 방법을 써서 막으려 했다. 어쩌면 핵전쟁으로 쿠바를 지구상에서 지워버릴 수도 있었다. 쿠바와 미국의 학교와 가정에서는 방공호를 팠다.
스웨덴의 겨울은 끝이 없다. 짧은 낮과 긴 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거리는 고요했다. 아직 어두울 때 잠에서 깬 나는 눈이 끝없이 쏟아지고 있는 뿌옇고 차가운 하늘을 보고 울음을 터뜨린 적이 있다. 그럴때면 난, 음악에 기대었다. 우울하고 막막할 때, 건반을 치면 피아노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우리는 나즈막하고 긴 따뜻한 대화를 이어갔다.
여기에도 나와 손잡고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음악이 있다.
완벽한 세상이었다.
1994년 봄, 나의 오랜 동료이자 쿠바의 재즈 밴드 Irakere 에서 추초와 함께 활동했던 '파키토 디 리베라'로 부터 전화가 왔다.
'베보, 느슨한 잼 세션 정도면 되요. 부담없을 거예요. 월드 서킷 레코드의 닉 골드가 쿠바와 아프리카 연주자들간의 퓨전 앨범을 기획중이라는 소문도 있어요. 곧 움직이기 시작할 거예요.'
그는 자신도 1980년대 초에 쿠바를 떠나 미국에서 활동중이며, 최근에 아프로 쿠반 재즈를 발굴하려는 레코드사들의 움직임이 있으니 준비를 할 겸 먼저 호흡을 맞추는 간단한 녹음을 제안했다.
나는 그것이 어쩌면 나의 마지막 작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모든 성의를 다하여 준비를 했다. 예전에 내가 쿠바에서 연주했었던 9곡을 골라 9중주로 편곡했다. 세션은 독일에서 진행되었다. 리베라는 수십 년간 풀타임 공연을 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내 연주는 놀라우리만치 좋았다고 했다. 리베라와의 세션에는 Juan-Pablo Torres (트롬본), Diego Urcola (트럼펫), Amadito Valdés (퍼커션), Carlos Emilio Morales (기타)가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Irakere 출신이어서 내게 추초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다.
'늦지 않았어요, 베보. 쿠바의 음악을 위해서라도 추초와 만나야 해요.'
리베라와의 세션은 'Bebo Rides Again'이라는 앨범으로 발매되었고, 다음 해인 1995년에 내게 그래미상을 주었다. 이십년 만의 일이었다.
쿠바에서의 내 집에는 많은 연주자들이 모여 연주를 하거나 대화를 하며 북적일 때가 많았다. 추초는 다섯 살때부터 내 옆에 앉아 내가 피아노 치는 것을 보며 자랐다. 나는 주말에 아이들과 함께 동물원에 가곤 했다. 추초가 좀 컸을 때는 트로피카나 클럽으로 데려 가기도 했다. 카바레에서 별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모히또를 마셨고, 추초는 사탕수수로 만든 노란색의 주스 과라포를 마셨다.
피아노를 치는 내 옆에 앉은 주초는 빨대로 과라포를 마시면서 한번씩 말했다.
'아빠, 이 노래 좋아.'
'그래? 네가 과라포 다 마실 때쯤에 이 곡도 끝날 거야.'
그러면 추초가 그 큰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그럼 다음 곡도 해줄 거야?'
나는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너를 위해서라면 몇 곡이라도 하지.'
내 아들 Jesús가 16살이 되었을 때, 나는 트로피카나를 떠나 Sabor de Cuba라는 오케스트라를 만들었고, 이미 그때부터 그는 나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그는 추초로 불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암버스 문도스 호텔' 바에서 헤밍웨이와 대화한 적이 있다.
'노인과 바다'를 펴낸 뒤 퓰리처상을 받았던 그해에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베보, 사람은 어디서나 살 수 있어. 하지만 음악은 언제나 고향을 그리게 하지. 언젠가 네가 쿠바를 떠나도 네 음악은 사랑하는 너의 사람들과 함께 쿠바에 머물러 있을 거야.'
'그렇다면 저는 제 음악을 통해 고향을 기억하는 거겠군요.'
'그렇겠지. 음악은 언제나 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야.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남아 있을 유일한 돌아갈 곳이지'
호텔이 있는 오비스포거리에는 여러 팀의 소규모 가장 행렬이 무릎까지 오는 막대기신을 신고 깡통으로 만든 북을 두드리며 지나가곤 했다.
95년 그래미 시상식 전에 나는 조용히 쿠바를 들러 추초를 만났다. 내 작은 두손을 맞잡은 추초의 크고 동그란눈망울이 어린아이였을 때처럼 그윽해졌다.
어렸던 그가 나를 원망하거나 그리워하면서 보였을 크고 검고 그윽했을 눈망울이 보였다.
이게 내가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이야기다.
베보 발데스는 2012년 로즈마리 퍼슨이 죽을 때까지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는 2008년 추초 발데스와 함께 앨범 '함께 영원히(Juntos para siempre)'를 발표했고, 2년 뒤에 생애 7번 째의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이어서 자신을 모델로 한 애니메이션 영화 '치코와 리타'에 들어갈 작곡과 편곡을 담당하기도 했다. 1918년에 태어난 그에게 있어 80대야말로 진정한 전성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