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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영 Dec 31. 2024

40년 만의 귀향 - Part 1

베보와 추초 발데스 이야기

'어떤 예술 작품은 끝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1994년 10월, 70대 중반의 뮬라토 남자인 나는 군청색 방한복을 걸치고 스톡홀름 변두리의 축축하고 차가운 도로 위를 걷고 있었다. 몇 명 되지 않는 작은 고적대의 초라한 행진이 내 옆을 지나갔다.

'나는 아무래도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내 아들 추초와 그의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말이다.'


골목을 돌아 나오니 깨어진 얼음 파편들로 뒤엉킨, 공허한 하늘과 황량한 해변이 펼쳐졌다. 그곳의 차디찬 공기가 콧구멍으로 들어와 내 폐로 흘러 갔다. 나의 지난 시간들이 소환되었다.

'1966년 1월, 나는 북극점에서 몇 마일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일하러 갔다. 유난히 추웠던 그 겨울, 오직 다행인 것은 희한하게 내가 추위를 그다지 타지 않았던 거야. 엄청난 양의 눈은 아주 서서히 육상으로 강림하는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신성스럽기까지 했다. 몇 주간 태양을 못 본 적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그때가 뜨거웠다는 생각이 들고, 그립다.'


뜨거운 쿠바 하바나에서 얼어붙은 이곳까지 나를 이끈 긴 여정이 떠올랐다.


1948년 이래, 나는 하바나의 Tropicana Club에서 '그랜드 마스터'로 불렸다.

'하늘 아래 가장 화려한 나이트 클럽'으로 불리었던 그 클럽은 축구장 1개보다 더 큰 면적으로 하바나 외곽의 열대 정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인근 해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야자수 잎을 살랑이게 했고, 멀리서 들리는 파도 소리는 음악과 어우러져 낭만을 더했다. 별들이 유난히 밝은 쿠바의 하늘은, 음악과 춤의 향연 속에서도 묘한 고독을 느끼게 하기도 했다. 클럽의 야외 정원은 별들로 장식된 나르시즘에 빠진 어느 공주님의 무대처럼 보였다.

냇 킹 콜, 카르멩 미란다, 에디트 피아프 같은 아름다운 예술가들이 쿠바의 훌륭한 뮤지션들과 함께 연주했고, 반짝이는 깃털과 화려한 색상의 드레스를 입은 댄서들이 칼립소, 룸바, 맘보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춤을 추었다. 카지노와 카바레에서는 밤새 바카라, 블랙잭, 룰렛과 포커 게임이 계속 되었고, 이따금씩 서커스 공연이 벌어졌다. 오렌지색, 금색, 빨간빛 조명의 홀에는 고급스러운 테이블과 의자, 춤추는 무대, 의젓하고 자신감 넘치는 빅밴드 악단이 있었다. 관객들은 흰색 정장과 드레스 차림으로 우아함을 더 했고, 주변 길거리에는 1940년대 미국제 클래식 자동차들이 줄지어 서 있고, 스페인어 대화와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밤마다 그곳은 쿠바의 음악, 춤 그리고 유혹으로 가득 찬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였다.

트로피카나 클럽으로 오는 손님들을 위하여 마이애미에서 하바나까지 전세 비행기편이 증편되었고, 쇼 샘플이 포함된 비행 중에 사람들은 함께 노래하고 춤을 췄다.

트로피카나에서의 하룻밤은 그곳을 찾은 손님들에게 죽을 때까지 결코 잊지 못할 환상과 낭만의 세계를 선물했다.


쿠바와 카리브에는 아프리카 흑인들이 있다.

몇 백년 동안 카리브에는 백 만의 아프리카 흑인들이 끌려 왔었다. 그들의 친구라고는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종교와 리듬 뿐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마지막 남은 그것들을 죽더라도 지키고자 했었고, 그렇게 종교와 리듬은 살아 남아 살을 찌웠다.

마이애미와 하바나 간의 뱃길은 고작 370킬로미터에 불과해서 미국 금주법 시대에 많은 미국인들이 술을 마시러 하바나로 몰려 왔다. 이 때 재즈도 함께 들어 왔다. 재즈의 하모니와 즉흥연주가 룸바, 손(Son), 맘보 같은 쿠바의 리듬과 결합했다. 아프로-쿠반 재즈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선구자들의 희생과 도전과 협업에 의한 문화적 융합의 결과물로 아프로-쿠반 재즈가 나왔고 성장했다.  일요일에는 쿠바의 일류급 연주가들과 주트 슬림스(Zoot Slims), 스탄 게츠, 케니 드류(Kenny Drew)와 같은 미국에서 온 일류 재즈 연주가들이 잼 세션을 했다. 존경하는 '마리오 바우자'의 'Tanga'가 뉴욕에서 히트한 이래 많은 수의 쿠바 뮤지션들이 뉴욕으로 건너 왔다.


나는 열광하는 군중 속에서 트로피카나의 빅 밴드를 이끌었고 연주를 했다.

냇 킹 콜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유색인종도 사랑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을 그가 처음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델로니어스 몽크, 베니 굿맨, 듀크 엘링턴, 스탄 게츠, 디지 길레스피도 모든 종류의 입맟춤으로 존경했다. 그들은 내가 스튜던트 재즈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활동할 때부터 나의 우상이었다.

나는 카차오와 함께 아프로-쿠반 재즈를 좀 더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카차오 로페즈는 단존(danzon)에 뭔가 새로운 것을 보태려다가 기존의 단존 리듬을 변형하여 '맘보' 스타일을 만들어 선보였다. 나는 맘보와 차차차를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실험적으로, 두 개의 드럼에서 나오는 아프리카 리듬을 강하게 반영한 바탕가 리듬을 만들어 몇 곡의 노래를 발표하기도 했다. 나는 아프리카 음악을 재현하려고 애쓰는 디지 길레스피에게 바탕가를 헌정했다.

그 때쯤 나는 필라르를 만나 1941년에 추초 발데스를 낳았고, 추초는 4살인가 5살 때부터 내 옆에서 피아노를 듣고 배우기 시작했다.

내 아들 추초가 십대 중반이었을 때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옷 챙겨 입고 와.'

'왜요?'

'오늘 저녁에 여기 트로피카나에서 추초 너의 공연이 있을 거야.'

내 찬란했던 한 때는 그랬었다.


피델은 1953년에 바티스타 정권 타도를 위해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다. 습격은 실패했고 피델은 15년형으로 수감되었다가 1955년에 특별사면을 받은 후 멕시코로 망명했다. 56년에서 59년간 게릴라전이 먹혀 들어 1959년 1월에 그는 정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피델에 등 떠밀려 대통령 자리에 선 '마누엘 우루티아 레오'가 하바나의 향락적인 문화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 하바나의 잘 나갔던 사교클럽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에서는 카초 로페스,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수, 루벤 곤잘레스, 꼼빠이 세군도, 이브라힘 페레르 등이 활동했었다. 꼼빠이 세군도, 오마라 포르투온도, 엘리아데스 오초아 등 카스트로 정권의 입맛에 맞추어 댄스음악만을 약속한 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음악을 접고 구두닦이나 이발사로 전직하거나 발레하는 아이들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해 주는 등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쓸쓸히 늙어가는 길을 택했다.

사람의 감정이란 건 시시때때로 변화무쌍하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고 해소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 밖에 없다. 음악도 그렇다. 당연히 나도 그렇다.

피델의 혁명으로 발생한 선동적이고도 위선적인 사회주의 물결 속에서 내 삶은 휘둘렸다. 몇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쿠바 사람들의 삶도 바뀌었다. 혁명 세력은 음악과 예술의 기본 방향마저 바꾸려 들었고, 거의 대부분 침착성을 잃은 채 과격함에 몰두했었던 혁명의 하수인들은 트로피카나의 상징이었던 높은 무대 위에 놓인 거대한 피아노를 폭파시켜 떨어뜨리고는 환호하며 날뛰었다. 나는 결국 쿠바와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떠나 멕시코로 망명했다.




(Part 2 완결로 이어집니다.)


아래 링크에서 베보와 추초 발데스가 함께 하는 음악과 라틴 재즈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40년 만의 귀향


뜨거운 사람들의 라틴 재즈, Calle 54


Obse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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