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벨라 바르가스와 프리다 칼로의 이야기
삐진 채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는 어린 차벨라에게 허리가 꼬부라진 인자한 모습의 할머니가 우는 여자, 요로나 전설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건 아주 무서운 이야기여. 끔찍하게 슬프기도 하고, 그니께 어여 와'
먼 옛날, 멕시코의 테우안테펙 지역에 정복자 남자를 사랑한 '로사 마르티네스'라는 젊고 아름다운 원주민 여인이 있었다. 그 곳의 지형은 큰 바다가 좌우로 있고 실핏줄처럼 여러 갈래의 강이 흘렀다. 정복자들은 이 길을 다녔다. 스페인에서 왔다는 노란 곱슬머리의 이방인 남자는 얼굴이 희고 깨끗했다. 얇지만 다듬어진 턱수염, 겸손하면서도 공손한 말씨, 살짝 마른 듯하지만 균형 잡힌 체격, 낡았지만 소박한 옷차림과 호기심 어린 커다란 여행자의 시선을 가진 그는 오래지 않아 원주민들로부터 경계심을 거두게 했다. 특히 그는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친절했다. 웃을 때 드러나는 가지런한 치아가 특히 매력적이었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우물가에서 서둘러 물을 길어가는 로사의 양동이를 날라다 주었다.
그리고 얼마 뒤 환대를 요구하는 그의 눈길에 로사는 마음을 열었다.
그들은 행복한 나날을 보내며 예쁜 아이 셋을 낳았다. 두 명의 오빠와 여자 아이 하나를
'차벨라, 어느 누군들 짧더라도 행복한 순간은 있기 마련이지. 하지만 슬프게도 그 순간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는 않아. 그래서 아쉬어서 더 아름답게 느끼는 지도 몰라' 할머니가 성호를 그으며 말을 했다.
평화로운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이 곳을 지나던 한 떼의 스페인 사람들과 어울리던 남자는 변심했고, 로사와 아이들을 버리고 멕시코 시티로 갔다.
두 달 뒤 번지르한 제복 차림으로 돌아온 그는 로사에게 말했다.
'로사, 그대가 아니었으면 난 아직도 떠돌아 다니고 있을 거야. 그 점은 고마워. 하지만 난 여기에 머물 순 없어, 이해해 줬으면 해.'
그는 커다란 금화 몇 닢을 남기고 떠났고, 사람들은 그가 멕시코 시티에 있는 돈 많은 스페인 미망인과 결혼했다고 수군거렸다.
여인은 떠나는 남자의 발끝에 매달려 몸을 떨며 혼자서는 살 수 없다고 애원했지만 남자는 한줌의 미안함만 남기고 떠났다. 배신감과 슬픔을 이기지 못한 로사는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헝클어진 머리에 새빨갛게 충혈된 로사를 보며 안타까워 했다. 어느 날 로사가 막내를 품에 안고 낮은 소리로 자장가를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차분했고, 아이들은 곧 잠이 들었다.
'강물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해지네요. 그리고 오늘따라 그 소리가 저를 부르는 것 같아요.'
음식을 가져 온 이웃 아주머니에게 로사가 남긴 말이었다. 그녀는 잠이 든 세 명의 아이를 질식시킨 후 강물에 빠뜨렸다. 그리고 자신도 물 속으로 들어갔다.
며칠이 지나 그믐달이 떴을 때, 해안을 따라 길을 걷던 장사꾼들은 흰 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머리를 풀어 헤친 채 흐느끼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며칠 동안 목격자들은 늘어 갔다. 어떤 나그네는 여자가 이 강에서 저 강으로 여기 저기를 옮겨 다니며 아이들을 찾는 듯 이름을 부르고 다녔다고 했다.
'차벨라, 그날 이후 그 곳 강가 마을에는 밤마다 여자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단다.' 할머니가 이야기를 마쳤다.
'할매. 그거 물소리 아니야?' 이렇게 톡 쏘긴 했지만, 어린 차벨라는 여자들이 본래 조금 더 약해서 슬픈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가엾은 여인들을 보살펴 주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자신은 남들보다 더 큰 체구에 활쏘기와 유도, 복싱 같은 것들을 좋아했고 또한 보통 이상으로 잘 했다.
열다섯 살 먹은 차벨라는 코스타리카의 정글 마을이 너무 갑갑하다고 느꼈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위해 당시 중남미에서 가장 역동적인 도시 멕시코 시티로 나왔다.
도시에서의 첫날 밤은 낯설었다. 그녀는 공원 벤치에 앉아 밤을 새웠다. 정글의 밤과는 완전히 다른 차갑고 서늘한 공기 속에서 처음으로 무섭고 외롭다는 감정을 느꼈다. 차벨라는 남성들의 바지와 폰초를 입고 다녔으며, 시가를 피우고 독한 술을 뭇 남성들보다 더 많이 먹었다. 사춘기를 맞은 차벨라는 또래의 남자 아이들에게서 그 어떤 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뒷골목의 남자아이들과의 싸움에서 밀리지 않았지만 얼굴은 늘 상처 투성이였다.
그녀는 멕시코시티 콘덴사와 로마 지역의 뒷골목에서 노래를 불렀다.
처음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몇몇은 지나가며 비웃었고, 어떤 남자는 동전을 던지듯 내던졌다. '더 밝고 곱고 예쁘게 노래를 처 부르거라!'라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남자 복장으로 기교없이 거칠고 격정적인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야 한다고 믿었다. 살아남기 위해선, 누군가의 기억에 남기 위해선 선한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들린 허름한 목로주점에서 술 취한 사내들이 노래를 부르면 술 한 잔 사겠다고 했다. 차벨라는 병 채로 데킬라를 원샷하고 기타를 들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밤마다 그곳에서 노래를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멕시코의 보헤미안 예술가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거리의 벽화 화가로 유명했던 '디에고 리베라'를 만났다. 차벨라의 노래를 듣고 있던 디에고는 그녀의 절규하는 듯한 거친 음성에 호기심을 보였다. 둘은 곧 친구가 되어 멕시코시티 곳곳의 칸티나에서 데킬라와 맥주를 마셨다.
차벨라의 남장을 알아 챈 디에고가 맥주 한잔으로 목을 축인 뒤 말했다.
'중세 때는 피렌체놈이라고 불리었지. 게이 말이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피렌체에 득실거렸거든, 예술이라는 마약이 원인이었나? 그런데 사실 말이야. 전쟁터에서나 수도원에서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있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더 깊게 더 많이 서로에게 감사할 일들이 자연스럽게 많이 생기거든, 서로 목숨을 살려주거나 수도하는 과정의 빌어 먹을 지루함을 달래 주니까 말야, 안 그래?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존경심과 사랑의 감정이 생기는 거고, 난 아주 자연스러운 거라 생각해.'
'아니. 난 흥미롭지 않을 뿐이야. 궁금하지도 않아.' 차벨라가 짧게 대답했다.
'그래? 그럼 나와는 술만 마셔야겠네. 흠, 굉장한 여자를 소개시켜 주어야 겠군. 그 여자는 충분히 사랑할 만 할거야'
리베라는 며칠 뒤 차벨라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했고 자신의 아내 프리다를 소개시켜 주었다.
눈썹이 짙고 발랄하면서도 강한 인상의 프리다는 배려가 많았으며 용감했고 솔직했다. 차벨라보다 열두 살이 많은 그녀는 여섯 살때 소아마비를 앓다 회복하였고 열여덟 살때는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해 30여 차례의 수술과 재활치료 끝에 다시 걷게 되었다. 하반신마비 장애와 자궁기능 저하로 본인의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세 차례 유산을 했다. 차벨라는 그런 프리다에게서 할머니로부터 이야기들은 요로나를 보았다. 프리다의 상실과 아픔 그리고 천부적인 예술감각에 공감을 했고, 자신의 역할은 기꺼이 마초가 되어 여인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프리다도 차벨라가 부르는 거친 노래에 공감해 주었다. 라 요로나를 부를 때는 눈물을 흘렸다.
'이 곡의 사연은 내 이야기와 같아!'
며칠 만에 그녀들은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었다.
'프리다, 모르나본데 난 수탉이거든!' 차벨라는 2,000 킬로를 걸어 와 운 좋게 진실한 사랑을 만났다고 했다. 만나면 유쾌한 대화와 웃음이 끊어지지 않았고 리베라는 대부분 화실에서 혼자 그림을 그렸다.
젊은 시절의 차벨라는 그렇게 리베라와 데킬라를 마셨고 프리다와는 사랑을 나누었다.
(Part 2 완결로 이어집니다.)
지난 화요일은 연재일이었는데 맞추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래 링크에서 차벨라 바르가스의 노래와 라 요로나의 여러 버전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