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칼로와 차벨라 바르가스의 이야기
그 때 즈음, 차벨라는 리베라의 소개로 '호세 알프레도 히메네스'의 공연을 따라 다녔다.
처음에는 호세가 난처하다는 투로 말했다.
'존경하는 디에고 리베라씨, 아시다시피 요즘 떠 오르는 란체라는 힘이 있으면서도 부드럽고 정제된 소리를 요구한답니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벨칸토 창법을 따라 하고 있습죠. 그리고 너무나 잘 아시다시피 그건 아름다운 노래를 의미하고 있습죠. 그런데 그녀의 소리는 그 뭐랄까, 퓨마나 재규어의 소리처럼 너무 거칠고 공격적이고, 무시무시하다고나 할까요,...?'
'거칠고 투박하긴 한데 그게 오히려 노동자나 농민들에게 먹힐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지 말고 힘도 세고 하니 짐도 잘 나르고 도움이 될 거야. 짬짬이 틈나면 한번씩 노래하게 해 주면 되네. 친애하는 호세 알프레도 히메네스 동무, 예술가들끼리 쪼잔하게 왜 이래. 저런 애들 키워야 되지 않겠어?' 당시 멕시코 공산당의 주요인물이었고 멕시코 문화예술진흥위원장을 겸하고 있었던 리베라가 떠 맡기다시피 청탁을 했다.
리베라는 차벨라에게도 부탁을 했다.'차벨라! 성질머리 세우지 말고 말 잘 들어야 한다.' 그러면서 밤새 술 마셔 줄 친구가 없어짐을 애석해 했다.
당시 멕시코 대중들은 '호세 알프레도 히메네스', '미겔 아세베스 메히아', 그리고 '페드로 인판테', 이 세 사람의 남자 란체라 가수를 '3대 수탉'이라고 불렀다. 자신감이 넘치고 감정이 폭발하는 란체라를 부르는 남성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차벨라 또한 수탉이 되고자 했다.
촌스러웠던 차벨라의 소리와 기교는 공연을 거듭하면서 세련되어 갔고, 호세 또한 차벨라 창법의 진정성을 이해해 갔다.
'벨칸토는 강렬하고 곱지만 진정성이 없지. 그런데 에쁘장하고 우악스러운 걔의 소리는 잠자코 찌그러져 있는 사람들의 심정을 깨워 일으켜 세우려는 거 같단 말이야.'
호세 알프레도 히메네스는 어린 시절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독학으로 음악을 배워, 식당에서 서빙을 하면서 틈틈이 작곡을 했다. 47세의 길지 않은 일생 동안 수백 곡 이상의 노래를 만들었다. 많은 인기와 재력, 명예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공허함에 시달렸던 그는 술에 의지하였고, 결국 심각한 간경화에 걸렸다. 1973년 TV방송에 출연하여 멕시코 국민들에게 자신의 진심을 담은 노래 '감사'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어쨌든 차벨라는 멕시코의 국가대표급 주당들과의 운명과도 같은 만남을 계속 이어가며 음주 커리어를 쌓아 갔다.
몇 달만에 멕시코 시티로 돌아올라치면 그녀는 프리다에게로 갔다.
'수탉 왔어?'
프리다는 몇 해 전부터 사고 부작용이 재발했고 이제 척추까지 손상되어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도 힘들어 했다. 그녀는 자신의 생애 최초의 개인 전시회를 앞두고 리베라와 다투었다.
'이 몸으로 참가할 수는 없어. 제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 부탁 한번 들어줘!'
고집 센 '일자 눈썹' 프리다에게 리베라가 간절하게 애원했고 차벨라 또한 거들었다.
'알겠어. 그럼 곤잘레스 선생의 말에 따를께.' 프리다가 대꾸했지만, 주치의 곤잘레스 또한 프리다의 전시회 참석은 자살행위라고 만류했다.
프리다가 치자꽃을 한아름 꺾어 온 차벨라에게 말했다.
'침대를 떠나면 안 된다하니 어떡하면 좋겠니? 차벨라'
차벨라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침대와 함께 가!'
전시회날 리베라가 찾아온 귀빈들에게 자기 아내 프리다에 대해 자기보다 훨씬 훌륭한 예술가라고 떠벌리고 있을 때, 프리다가 네 명의 남자들이 네 귀퉁이를 든 침대에 누운 채로 등장했다.
그리고 며칠 뒤 신체의 거의 모든 곳이 망가졌지만 프리다는 편안한 표정으로 그렇게 힘들었던 이 세상을 떠나 갔다.
차벨라는 절망했고, 그러면서 사랑하는 술에 더욱 빠졌다.
울기 때문에 슬픈 거다라고 생각하여, 울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런 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어쨌든 1961년에 앨범을 발표하며 정식으로 데뷔한 후, 멕시코와 스페인에서 차벨라의 독특한 보컬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인기가 많고 바쁜 와중에도 그녀는 일관성있게 알콜과의 의리를 유지했고, 점점 심해지는 폭주와 알코올 의존증으로 인해 활동을 못할 만큼 지친 나머지, 결국 1979년에 무대를 떠났다. 그러면서 말했다.
'내가 마신 데킬라가 대충 45,000리터는 될 걸.'
그 독특한 정신 세계를 가진 남자같은 여자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슬슬 잊혀져 갔다.
그러나 아직 그녀의 노래는 끝나지 않았다.
1990년대 초, 차벨라는 TV를 통해 벨기에의 수녀 가수 '자닌 데케르'의 슬프고도 황당한 사연을 알게 되었다.
빌보드 핫 100에서 수 주동안 1위를 차지했던 자닌의 히트곡 '도미니크'의 수익금 전부를 수녀회에서 몽땅 가져갔고, 자닌의 조국 벨기에 세무서에서로부터 거액의 소득세를 추징당해 경제적으로 버거운 생활을 하다가, 결국 자신의 팬이자 친구인 여자와 함께 음독 자살을 선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젠장, 산다는 게 뭔지,...'
차벨라는 자닌 데케르 또한 눈 뜨고 코 베인, 거대한 상실을 겪은 여자라고 생각했다.
'뭐 이다지도 뜯어 먹으려는 것들이 많아? 당하는 여자들만 불쌍하지. 세상 어디를 말할 것도 없이 재능있는 여자들은 언제나 탈탈 털리기만 하는 거야.' 그러다가 프리다를 추억하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프리다의 개인 전시회에서 리베라가 고백했듯이, 프리다가 난 인물은 난 인물이야. 어쩜 피카소보다도 더 위대할지도 몰라. 리베라는 갖다 대지도 못해.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늘 뒷전이니,... 우리 여자들은 늘 속상해.'
차벨라는 멕시코 여성의 원망을 세상에 알려야 겠다고 결심했고 다시 무대에 섰다. 돌아온 그녀는 마지막 불꽃을 피워 투사처럼 노래했고, 목소리는 더욱 거칠고 처절했다. 1993년에 '우는 여자'를 리메이크한 후 이 곡은 수많은 속상한 멕시코 여성들을 대변하기 시작했다.
'그 까짓게 뭐라고, 남자를 좋아하든지, 여자를 좋아하든지, 그 까짓게 뭐라고,... 이렇게 태어난 걸 어떡하라고? 날 사랑하고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면 되는 거야.'
차벨라 바르가스는 스페인의 '가톨릭 군주 이사벨라 대십자가상'을 받은 영예의 절정에서, 81세의 나이로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했다.
아래 링크에서 차벨라 바르가스의 노래와 라 요로나의 여러 버전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