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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칼립투스 Sep 08. 2020

인생의 바닥을 찍고, 2일 차

새로운 결심 후 별다른 노력 없이도 지속이 가능한 시간, 3일


오늘은 2일째.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바닥 찍고 100일 여정을 기록하기로 했다. 무려 2주 만에 첫 정상출근. 하필 태풍이 겹쳐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뚫고 허둥지둥 출근을 해서는 책상에 앉았다. 직장인 신분인데도 남들 눈을 피해 틈틈이 글을 쓸 시간과 공간이 있다는 게 무척 감사한 아침.  그 덕에 오늘의 기분은, 어제보다 아주 조금 나아져 있다. 뭔가 목에 가시가 박힌 듯, 정확히 특정 짓기 어려운 어떤 이물감이 있는 것 빼고는. 


지난주, 모친상을 당한 회사 분이 복귀 후 인사를 오셨다. 지병이 있는 여든다섯 노모에게 어렵게 큰 수술을 해드렸는데 끝내 깨어나지 못하신 모양이다. 불과 1년 1개월 암투병 끝에 온 가족이 뿔뿔이 불화로 흩어졌던, 복막 전이로 말기암 중에서도 고통이라면 으뜸이라던 엄마의 투병이 기억나지 않을 수 없다. 척추 주사로 끝도 없이 투여되는 모르핀이 무색할 만큼 다스려지지 않는 통증 같은 건 알지 못한 채 평화롭게 수술대 위에서 돌아가셨을 이름 모를 할머니가 문득, 부러워진다.


인정하기 싫지만, 오늘 같은 날 명치끝이 답답한, 성가신 이 느낌이 무엇인지, 실은 정확히 알고 있다. 그건 바로, '초조함'이다. 욜로의 신봉자는 딱히 아님에도, 요즘 들어 부쩍, 지금처럼 어영부영 살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인생이 송두리째 흘러가 버리는 게 아닌지 불안하다. 해보고 싶었으나 어느덧 내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이 되어 시도해보지도 않은 채 서서히 늙어 죽는 것. 죽는 즉시 모두에게 잊히는, 사는 동안 알고 지내던 누구에게도 기억에 남지 못한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대단한 인생일 필요도 없고, 그저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썩 괜찮았던' 사람 정도로 기억되는 것. 그 정도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그렇다면 왜, 나는 스스로 선택한 현실이 이따금씩 화가 날까


고통은 주관적이다. 느끼는 사람마다 고통의 종류도, 깊이도, 제각각 다르게 자각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말기암 환자들에게는, 고통 점수 매기기 라는걸 매일 하도록 한다. 0점에서 10점까지, 10점은 출산의 고통 (또는 출산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상상할 수 있는 또는 실제 경험해본 극강의 고통)을, 0점은 전혀 고통이 없는 상태로 두고 지금 현재 느끼는 고통에 점수를 매겨보라고 한다.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한 달 내내 엄마의 고통 점수는 9점 또는 10점이었다.


24시간 시한을 두고 9점을 참으라고 하는 것과 언제까지 이럴지 모르지만 일단 6점을 견뎌 보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참을성이 부족한 난 무조건 시한이 있는 9점을 택할 것이다. 끝이 보이면 잠시 동안 지금의 편안함을 희생할 수 있고, 통증을 참는 목적이 분명하다면 더욱 쉬워질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가 될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무척 달라진다. 5점이나 6점짜리 통증일지라도 견디기 어렵다. 하루 종일 어떻게 하면 통증을 없앨 수 있을지에만 골몰하게 되고, 점점 더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들들 볶게 되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지금보다 나아진다는 '앎' (희망이라는 표현이 아닌 '앎'이라고 쎴다. 그만큼 고통의 끝이 명확히 측정 가능하고, 시기적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팩트로 증명될 수 있어야만 참아진다는 이야기다. 


마음이 괴로울 때면 격한 운동을 하던지 미친 듯이 일에 몰입하는 등 잡념을 없애기 위해 온갖 것을 새로이 해본다. 고민이 있으면 이를 해결하기보다 마음속에서 지워버리는 편이 언제나 더 쉬우니까. 작고 둔탁한 고통을 시끄럽고 요란한, 날카로운 고통으로 바꿔치기하는 것. 맑은 정신으로 견디기 힘든 굴욕은 차라리 술이라도 마셔서 흐리멍덩한 정신 저 구석진 곳으로 얼른 밀어 넣는 것이 나을 테니까. 


지금 겪는 고통이 유한하다면 상황이 좋아질 때까지 숨을 참으며 견디기라도 할 텐데, 애석하지만 끝이 보이지는 않는다. 모욕을 당하고, 애써 한 땀 한 땀 만들어가던 결과물이 산산조각 나고, '이번엔 운이 나빴어'라고 툭 털어버릴 수 있는 일들을 하나하나 곱씹고 되새겨가며 난, 모두 내 탓으로, 나의 문제로 둔갑시킨다. 내가 무슨 전지전능한 것도 아니면서, 세상 모든 실패를 내 잘못으로 돌려버리는 어리석은 행동 패턴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즐거움도 괴로움도 더 이상 짜릿하게 느끼기 어려운 무딘 칼날처럼 모든 감각을 둔하게 만들어버릴 것인가. 운이든 실력이든 내가 선택한 결과를 온전히, 온몸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뜻대로 풀리지 않은 일을 모두 누군가 탓으로 돌리지 않고, 오로지 한 땀 한 땀 나를 옭아매고 있는 덫에서 헤어 나오려면 무엇부터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볼 것인가. 타인의 조롱을 아프게 끌어안고 있을 것인가 아무렇지 않게 툭 던져버릴 것인가. 현 상태를 어찌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끝도 없이 침잠할 것인가 어떻게든 무조건 나아질 거라는 막무가내 정신을 스스로 주입해볼 것인가. 


흔해빠진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오래전 실험실 개구리를 투명한, 천장이 낮은 어항에 가둬두고 관찰한 결과, 처음에는 상처가 나도록 천정에 머리를 부딪히며 높이 뛰던 개구리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낮게 뛰더니 급기야 뚜껑을 치운 후에도 원래 있던 천장 높이까지만 뛰어올랐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어항에 갇힌 개구리처럼 나 역시도, 계란으로 부지런히 바위를 치던 예전의 패기는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마음을 다치지만 않으면 된다는 식으로 살게 된 건 아닌지. 오래전 눈 뜨고 보는 앞에서 서슬 퍼런 칼날로 코를 베어가고는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그 순간에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나를 헐뜯었을 뱀, 아니 쥐 같은 그자에게 제대로 저항 한 마디 못 해보고 말 그대로 썰려 나왔으면서, 이제 와서는 같이 일하는 팀의 무능을 참지 못하고 한 번씩 욱하는 마음이 불쑥 솟는다.


내가 당할 땐 상대방이 야비하고 잔인했는데, 반대 입장이 되니 난 그저 스탠더드가 높다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게 프로페셔널리즘이든 그저 꼰대질이든 간에, 당장 멈출 필요가 있다. 죽기 전에 꼭 되어보고 싶은 '그 사람'이란 나에게 그저,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인간성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니까.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1밀리미터 더 위로 가기 위한, 오늘의 베이비 스텝


사회 초년생 시절부터 오랫동안 '일처리가 깔끔하다'는 평에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왔다. 이제 와서 그런 건, 별 아무런 소용도 없고, 나의 직장도, 인간관계도 지켜주지 못했다.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맑은걸 추구한답시고 주변 사람들을 숨 막히게 한건 아닌지 반성할 만큼 말이다. 지금 노는 물이 진흙탕인지, 온 세상 쓰레기를 품고 유유히 흐르는 바닷물인지는 시간이 더 지나면 알게 되겠지만, 어느 쪽이든 걷다가 생기는 얼룩 따위는 덮고 시작해야 말이 된다. 인생이 어지럽고 일직선으로 위로 가는 패스가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존중받고 싶은 마음을 한편에 고이 접어두고, 주변 사람들에게 무얼 주는 사람이 될지 생각해 봐야겠다. 무엇보다 각자 자니고 있는 삶과 사고의 방식을 바꾸지 않고도 나와 잘 지낼 수 있도록 '편안함'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설 때, 세상이 나를 자꾸만 힘껏 가로막는다면, 그건 마흔이 넘도록 한 가지로만 삶의 방식이 고착되어버린 탓이지 결코 다른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다. 다행히 아무리 힘든 장애일지라도, 몸을 낮추고 가만히 기다리면 언젠가는 지나가게 되어 있다. 오늘 온종일 대차게 불던 태풍 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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